아침에 출근해보니 상사가 왠지 잔뜩 격앙돼 있다. 상사에게 다가가 평소에 좋아하는 화제로 얘기꽃을 피우자 그의 기분이 다소 가라앉는 듯했다. 그리고 그가 화가 난 이유를 들어주고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위기를 모면한다. 이 일화는 우리가 흔히 겪는 일상사 중 하나다. 어떻게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이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바로 그 물음에 감성컴퓨터의 필요성에 대한 해답이 있다.
자신과 상대방의 감성에 반응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을 감성인터페이스, 혹은 감성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 눈빛이나 목소리만으로도 상대의 감성과 기분을 알아채고 재치있는 해답을 내놓는 것, 이것이 감성인터페이스를 확장한 감성컴퓨터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다.
컴퓨터가 사람의 감성을 이해한다?
인간은 다양한 외부 자극에 대해 끊임없이 반응하며 살아간다. 공학에서는 이런 생체신호를 인간의 상태를 측정하는 가장 객관적인 정보로 평가한다. 차가운 컴퓨터에겐 인간의 감성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인 셈이다. 몸에 붙인 각종 센서가 측정한 여러가지 생체 신호를 분석하면 인간의 감성을 어느 정도 객관적인 정보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성컴퓨터는 컴퓨터 기술의 자연스런 진화과정의 한부분일까. 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 감성컴퓨터 개발에 앞서 인간의 감성이 구현되는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과 감성에 대한 철저한 이해 없이 이상적인 감성컴퓨팅 환경을 그린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인간 뇌의 신비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초기형태의 감성컴퓨터에 대한 연구들도 속속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한 예로 미 뉴욕대 조셉 르뒤 교수는 수년째 인간의 감성 메커니즘을 이용한 감성뇌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의 연구 주제는 사람 뇌의 정보처리과정을 밝혀 감성에 따라 반응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것이다. 미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마빈 민스키 교수도 사람의 감성에 반응하는 ‘감성기계’를 수년안에 선보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의 연구 역시 감성이나 추론, 사유 같은 인간 정신활동의 기본 메커니즘을 이용해 친인간적이고 이상적인 컴퓨터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초보단계에 머물고는 있지만 감성컴퓨팅에 대한 수요는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실제 일본 소니사가 만든 로봇개 아이보의 인기가 수년째 식지 않는 것도 감성기계의 대중화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점을 예고한다.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로봇은 인간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고 상품성도 뛰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가 ‘인공 감성창조물 프로젝트’의 하나로 로봇 애완동물을 개발하고 있는 것은 감성컴퓨팅의 미래에 밝은 전망을 던져주고 있다.
감동 주는 컴퓨터
최근 컴퓨터 분야의 발전은 단순히 기술을 넘어 인간의 삶과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일상에서 만난 모든 사물들이 점차 컴퓨터로 바뀌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연결돼 예약 녹화할 수 있는 TV, 저장돼 있는 음식을 알려주는 냉장고, 길을 찾아주는 자동차, 약속시간을 알려주는 수첩, 자동응답하고 위치를 알려주는 휴대전화, 교통상황을 감시하는 가로등까지. 크기와 종류에 상관없이 온갖 컴퓨터가 주변 환경에 빽빽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컴퓨터들은 서로 연결되고 통합돼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처럼 형태는 사라지지만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를 쓸 수 있는 공간을 일컬어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컴퓨터들이 인간의 감성까지 이해하게 된다면?
유비쿼터스 환경은 감성컴퓨터의 능력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유비쿼터스 공간은 감성을 읽는 센서들에 둘러싸인 거대한 네크워크로 구성된다. 이 거대한 감성 네트워크는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감성이나 정신상태를 점검하고 그 결과에 대해 센스있게 대응한다. 지금까지 사람의 정서와는 무관하게 존재했던 환경이 인간을 위로하거나 격려해주는 감성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아마도 피로나 정서상태를 파악해 실내환경을 그에 맞도록 조절하는 것은 감성컴퓨팅의 기본 기능에 속할 것이다. 슬플 때 즐거운 내용의 영화나 경쾌한 음악을 추천해주거나 차량 운전자가 피로를 느끼지 않도록 실내환경을 조절해 주는 것 역시 감성네트워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감성컴퓨팅은 이처럼 일상에 무궁무진한 시나리오를 제공하게 될 전망이다.
여기서 인간은 컴퓨터에게 자신의 감정 상태를 알릴 필요는 없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컴퓨터에게 자신의 감성을 들켜버리면 그뿐이다. 그에 대한 반응은 컴퓨터의 몫이다. 인간은 그저 감동할 뿐. 이것이 감성컴퓨팅의 본질이다.
5감을 표현하는 디지털 콘텐츠
최근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차세대PC 연구팀은 인간의 5감을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콘텐츠 제작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사람이 느끼는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의 5가지 감각을 디지털 정보로 변환해 전송한 뒤 이를 다시 재생하는 기술이다. 사진기로 정원에 있는 꽃을 찍어 그 향기와 주변 새소리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보내 실제 정원에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소리와 그림 형태로 제한돼 있던데서 벗어나 후각과 촉각, 미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이 연구팀의 목표다. 해외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일본 우정성의 오감통신연구회와 MIT 촉감형미디어 연구팀도 이와 비슷한 기술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5감 융합형 콘텐츠 기술의 가능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5감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제 느끼기까지 한다. 즉 인간의 감성을 느끼고 그것을 똑같이 표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게임에 5감 융합형 콘텐츠 기술이 사용됐다면 그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나 시나리오는 게이머의 감성에 따라 다양하게 바뀔 수 있다. 5감 융합형 아바타는 사용자의 감성에 대응해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게임 캐릭터나 아바타가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그 상품성은 무궁무진해질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감성을 파고드는 콘텐츠는 앞으로 더욱 매력적인 자기 표현 수단으로 각광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콘텐츠가 5감 융합형 콘텐츠를 지향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5감 융합형 콘텐츠 기술은 다양한 감성에 반응하고 스스로 이를 유발하기도 하면서 사이버 세계를 새롭게 재편하게 될 전망이다. 그리고 실제로 수년 내에 이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 출현은 세계 콘텐츠 시장의 판도를 크게 바꿀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감성컴퓨팅은 컴퓨터 기술의 발전으로 실현 가능성이 더 앞당겨지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기 마음과 감성을 알고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쉽게 얻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그렇게 ‘대접’을 받게 되는 인간은 컴퓨터의 그런 반응에 감동할 것이다. 마치 자신을 이해하고 원하는 답을 주는 상대에게 감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감성컴퓨팅 환경에서 인간이 느끼는 잔잔한 감동이며 향상된 삶의 질이다. 감성컴퓨팅이야말로 진정한 웰빙을 가져다 줄 인간친화적 기술이다. 한국도 1987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인간공학연구실을 설립한데 이어 1992년 G7 후보과제로 감성공학을 선정하는 등 현재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각 대학 연구실에서도 관련 연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감성컴퓨팅의 주요 연구 사례들
지난 1988년 시드니 국제 인간공학회가 명명한 ‘감성공학’은 미국과 유럽, 일본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흥미로운 몇가지 연구를 살펴보자.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로잘린드 피카드 박사 연구팀은 신발 속에 생체 변화를 감지하는 센서를 붙여 인간이 겪는 좌절감을 측정하고 있다. 연구팀은 이밖에도 지루함이나 집중력, 스트레스, 즐거움 같은 인간의 다양한 정서적 상태를 함께 측정한다. 이를 위해 신발 외에도 센서가 달린 반지, 목걸이, 안경, 스카프 등 다양한 디지털 장신구가 활용된다.
MIT 미디어랩의 뎁 로이 박사는 오랫동안 사람처럼 인지하는 컴퓨터를 연구해왔다. 생체공학기술의 도움을 받은 이 ‘인지기계’는 현재 기억이나 자각은 물론, 추론과 이해, 표현을 자유롭게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IBM의 알만더 연구센터와 상명대 황민철 교수는 감각이 있는 컴퓨터를 연구 중이다. 컴퓨터가 각종 센서를 통해 인간의 감각 정보를 읽어들여 마치 사람처럼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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