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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1596~1650) -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동시에 물리학자다.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담은 ‘방법서설’을 1637년에 썼다. ‘해석기하학’과 더불어 오늘날 사용하는 ‘좌표평면’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지난 5월 15일 12년 만에 ‘악마’가 부활했다. 서울 왕십리 일대를 마비시켰다는 인기 게임 ‘디아블로3’ 이야기다. 그러나 악마는 종교나 신화, 게임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가장 합리적이라는 과학자들도 가끔 악마를 소환한다. 과학자들은 왜 악마가 필요한걸까. 그들의 전능함 때문이다. 독자들이여, 과학자들이 불러낸 악마를 만나보자. 악마가 돌아왔다(Evil is back).

과학자들이 불러낸 악마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이들은 성경에서 예수를 유혹했던 악마처럼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만고불변의 진리라 믿는 과학 법칙의 틈새를 파고 들어 과학자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때때로 이론과 이론이 부딪혀 발생하는 모순을 들이밀며 세기의 천재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하지만 유혹을 이겨내면 값진 선물을 주기도 한다. 과학사에서 유명한 4대 악마를 만나보자.




17세기 근대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는 아무리 의심하려고 해도 의심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지식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의심해 봤다. 일종의 시험이다(철학적으로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감각에 의한 지식은 가장 확실한 지식이 되기 어렵다. 우리는 꿈속에서도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냄새를 맡지만 그곳이 꿈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슨 지식이 남을까. 수학 지식은 어떨까. 수학 지식은 감각적 지식과 달리 현실에서나 꿈속에서나 똑같이 성립한다. 꿈속에서나 현실에서나 ‘2+3=5’다.

데카르트는 여기에서 악마를 불러냈다. 사람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주물럭거리는 악마다. 이 악마는 본래 ‘2+3=4’인데, 사람들이 계산을 할 때마다 끼어들어 ‘2+3=5’라고 속일 수 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말 그대로 위대한 악마 아닌가. 만약 이러한 악마가 존재한다면 완전하다고 생각되는 수학 지식마저 사실은 악마가 우리를 속이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확실한 지식은 없다고 생각하는 회의론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의심이 불가능한 확실한 지식을 찾아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속일 수 있는 악마라도 ‘2+3=5’라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해야 비로소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1637년에 쓴 ‘방법서설’에 등장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이 문구는 결국 모든 것을 속일 수 있는 악마가 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한 이 지식을 ‘명석판명한 지식’이라고 불렀고 이 지식으로부터 다른 모든 지식들을 이끌어 냈다. ‘연역’이라고 부르는 이 추론 방법은 영국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귀납’과 함께 근대의 과학 방법론을 이루는 중요한 두 축이 됐다.




이번 주 로또 당첨 번호를 알 수 있을까. 내일 어느 주식이 폭등할까. 짝사랑하는 그녀에게 고백하면 받아줄까.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 세상을 지켜보는 음험한 존재가 있다. 바로 ‘라플라스의 악마’다. 이 악마는 세상의 과거와 현재 상태에 대해 원자 하나하나의 움직임부터 사람들의 심리까지 모두 꿰뚫고 있다.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도 모두 알고 있다. 따라서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있다. 로또 당첨 번호는 물론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될지, 심지어 10년 후의 날씨도 모두 알 수 있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1814년에 그가 쓴 저서 ‘철학적 확률론’을 통해 이 악마를 세상에 불러냈다. 그는 이 악마를 통해 철학의 결정론이 옳을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결정론이란 세상의 모든 일에는 원인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라플라스는 ‘철학적 확률론’에서 이 악마를 ‘어떤 지식인’이라 표현했다. ‘라플라스의 악마’라 이름 붙인 건 후대의 사람들이다).

원인을 모르는 질병이나 역사적 사건도 아직 많지만 라플라스의 악마라면 원인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허리케인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지만 라플라스의 악마는 카오스 이론에 지배받는 날씨마저 예측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라플라스의 악마는 점점 힘을 얻었다. 과거 원인을 알 수 없던 많은 것들의 원인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라플라스의 악마는 그를 불러낸 과학자의 바람처럼 이 세계를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로 만들 수 있을까. 아쉽게도 20세기 들어 믿었던 과학에서 결정론이 틀렸음을 보여 주는 이론이 등장했다.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입자들의 현재 상태를 완벽하게 알아도 미래 상태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다. 입자들이 어떤 위치에 있을 것 같다고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아니라 그 악마의 할아버지라고 해도 미래 상태를 알수가 없다.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세상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불완전한 이론이라고 생각하며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
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러나 결정론자들은 자신의 가설이 여전히 옳다고 해명한다. 먼저 양자역학은 입자 차원의 이론일 뿐이므로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설령 세상이 양자역학적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확률적으로 예측하는 것도 넓게 보면 결정론이라고 주장한다. 확률적이라는 것이 제멋대로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과연 결정론일까. 모든 것을 아는 존재, 라플라스의 악마에게 그 답을 묻고 싶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1749-1827) - 프랑스의 천문학자 겸 수학자. 그가 1827년 완성한 ‘천체역학’은 뉴턴의 ‘프린키피아’와 맞먹는 명저다. 수학에서는 그가 남긴 ‘라플라스 변환’과 ‘라플라스 방정식’이 유명하다.]




‘맥스웰의 악마’는 꽤나 명확하게 태어났다. 1867년 12월 11일, 맥스웰은 동갑내기 친구인 에딘버러대 자연철 학교수 피터 테이트에게 “열역학 제2법칙(용어설명)에 허점이 있다”고 편지를 썼다. 두 물체가 접촉하고 있을 때 외부 작용 없이는 뜨거운 것이 차가운 것으로부터 열을 빼앗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열역학 제2법칙에서 뭔가 미심쩍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맥스웰은 ‘작은 존재(a finite being)’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데카르트의 악마가 전능하며 라플라스의 악마가 전지적인 힘을 가졌다면, 맥스웰의 작은 존재는 분자 하나하나의 운동을 꿰뚫어볼 수 있는 ‘마의 눈’을 가진 존재다. 맥스웰은 만약 이런 존재가 있다면 역학법칙을 하나도 위반하지 않고 열역학 제2법칙을 깨트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맥스웰의 지적이 옳다면 여름날 에어컨이 없이도 방 안이 저절로 시원해질 수 있다(70쪽 박스기사 참고). 훗날 테이트와 맥스웰의 선배이자 저명한 영국 물리학자 윌리엄 톰슨은 이 ‘작은 존재’에게 ‘악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맥스웰은 48세로 요절하기 전까지 이 작은 악마를 끝내 퇴치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의 눈을 가진 맥스웰의 악마도 끝내 열역학 제2법칙을 파괴하진 못했다. 맥스웰의 악마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증명으로는 1929년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질라르트가 제기한 설명이 가장 유명하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마의 눈을 가진 악마가 분자를 관찰한다는 것은 악마와 분자가 빛을 주고 받는 등 상호작용을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체 분자와 악마의 엔트로피를 함께 계산해야 하고, 이렇게 하면 열역학 제2법칙이 어긋나지 않는다.

아이러니는 맥스웰도 질라르트와 비슷한 착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20대의 맥스웰은 색맹 현상을 물리적으로 연구하고, 독자적인 사진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관점을 조금만 달리했더라면 빛으로 ‘본다’는 행위가 에너지를 주고받는 과정임을 어렵지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맥스웰이 전자기학을 연구하면서 전파를 예언하고, 빛도 전파의 일종이라고 지적하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맥스웰처럼 위대한 물리학자도 등잔 밑은 어두웠던 것이다. 추측컨대 맥스웰 본인에게는 ‘작은 존재(악마)’가 머릿속 골칫덩이가 아니라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자연지식의 한계를 말해주는 좀 더 원초적인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제임스 클락 맥스웰(1831~1879) -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수학자. 당시 별개의 힘으로 이해하던 전기력과 자기력을 단일 힘으로 통합해 전자기학을 확립했다. 전기력이 자기력을 유도하고, 자기력이 다시 전기력을 유도한다는 것을 설명한 ‘맥스웰 방정식’이 유명하다.]


[빨간 입자가 뜨거운 분자, 파란 입자가 차가운 분자다. 맥스웰은 ‘마의 눈’을 가진 작은 악마가 역학법칙은 어기지 않으면서도 뜨거운 분자는 뜨거운 분자끼리, 차가운 분자는 차가운 분자끼리 따로 모을 수 있다고 믿었다.]


[몸길이 15mm의 민물지렁이 ‘스틸라리아 라쿠스트리스’는 ‘다윈의 악마’의 후보로 거론될 만큼 번식 속도가 빠르다.]


[찰스 다윈(1809~1882)  - 영국의 생물학자. 진화론을 정면으로 내세운 ‘종의 기원’을 1859년에 발표해 모든 생물은 신이 창조했다고 믿고 있던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생물의 진화에는 과연 끝이 있을까. 그리고 진화의 끝에 다다른 생물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생물학자들은 진화의 정점에 올라선 ‘가상의 생명체’에게 ‘다윈의 악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 악마는 게임에 빗대면 완성형이나 최종병기와 비슷한 개념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불멸을 꿈꿔왔다. 그렇기 때문에 다윈의 악마는 영원불멸하다. 우세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번식력이 뛰어나야 한다. 다윈의 악마는 한 번에 많은 자손을 만들 수 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태어나는 즉시 성적으로 성숙해 자손을 만들 수 있다. 다윈의 악마는 ‘영원한 수명을 가진 동시에 태어나는 즉시 자손을, 그것도 많이 만들어내는’ 그런 가상의 생물이다. 만약 이러한 악마가 지구에 존재한다면 지구에는 오직 그 종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만 생물학자들은 실제로 다윈의 악마가 될 수 있는 후보 생물을 찾고 있다. 유럽에 사는 민물지렁이 스틸라리아 라쿠스트리스(Stylaria lacustris)가 그런 후보다. 이 민물지렁이는 영원히 살 순 없지만 개체수를 늘리는 속도가 발군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늦가을에 유성생식으로 알을 낳고, 봄이 돼 알에서 깨면 곧바로 무성생식을 시작한다. 몸길이가 약 15mm, 체중이 1mg이 될 때마다 칼같이 두 개의 개체로 나뉘는 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개체 수를 늘린다. 이 민물지렁이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개체수를 늘리는 까닭은 잠자리 유충 등 포식자로부터 잡아먹히는 속도보다 개체수를 더 빨리 늘리기 위해서다.

과학사 속에서 새로운 개념의 등장은 꼭 실험실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공기의 저항이 없다면 모든 물체는 똑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낸 곳은 사실 피사의 사탑이 아니라 갈릴레이의 머릿속이었다. 이렇게 과학자의 머릿속에서 행해지는 실험을 ‘사고실험’이라고 한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찾아낸 것도 사과나무 밑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봤기 때문이 아니라 사고실험을 통해서였다.

악마 역시 편리한 사고실험 도구였다. 당시 과학 수준으로는 설명하기 힘들거나 일단 전제로 깔고 싶은 것들을 악마라는 단어가 갖는 전지전능한 힘으로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악마를 퇴치하면서 과학은 한 단계 더 도약했다. 지금 당신의 생각을 헷갈리거나 곤란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과학자들처럼 잠깐 악마의 힘을 빌려보는 건 어떨까.

2012년 6월 과학동아 정보

  • 최훈, 이관수 교수, 이우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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