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과학자는 선천 면역반응과 후천 면역반응이 일어나기 위한 생체 내 핵심 물질을 규명하고, 이런 면역반응이 활성화되는 경로를 밝혀 인체 면역과정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크게 확장한 공로로 201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브루스 보이틀러와 율레스 호프만이 선천 면역반응 기작을 밝혀내 상금의 절반을, 랠프 스타인먼이 후천 면역반응에 핵심적인 수지상세포의 역할을 알아내 나머지 절반을 받았다.
인간의 면역시스템은 크게 선천 면역반응과 후천 면역반응으로 나뉜다. 선천 면역반응은 인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면역 신호물질과 호중구, 대식세포, 자연살해세포 등 면역세포가 항원을 물리치는 경우를 말한다.
반면 후천 면역반응은 항원의 특징을 매우 특이적으로 잡아내는 방식으로 항원을 완전히 제거한다. 물론 항원이 너무 강력하거나 새롭게 출현한 경우에는 인체의 면역시스템이 작동해도 항원이 제거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호프만은 1996년 초파리 연구를 통해 생물의 체내에서 병원성을 띠는 항원을 판별하는 물질을 찾아냈다. 초파리는 후천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면역시스템은 없지만, 인간과 비슷한 선천 면역반응 시스템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초기 면역학 연구에서 자주 사용됐다.
호프만은 초파리의 생김새를 결정하는 유전자인 톨(toll) 수용체의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겨 제 기능을 못 하면 아스펠로길루스 푸미가투스(Aspergillus fumigatus)라는 곰팡이에 감염돼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실험을 통해 초파리의 선천 면역반응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톨 유전자가 발현돼 만들어진 단백질(수용체)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초파리에게는 톨 수용체가 병원성을 띠는 항원을 잡아내 자신의 면역시스템을 작동시키는 핵심 물질이었던 것이다.
보이틀러는 십수 년의 연구 끝에 톨 수용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수용체를 쥐의 몸속에서 찾아냈다. 외부에서 들어온 항원의 표면에 존재하는 지질다당류(LPS·lipopolysaccharide)가 숙주세포에서 염증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1983년 미국 록펠러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선천 면역반응을 주도하는 대식세포와 반응하는 카첵틴(cachectin) 단백질을 연구했다. 카첵틴은 암세포 등에 의해 생성되고 지방세포에 작용해 지질다당류를 줄이는 물질로 알려져 있었다.
1986년 텍사스대 사우스웨스턴의학센터 로 옮긴 보이틀러는 유전자 연구를 통해 카첵틴이 쥐의 종양괴사인자(TNF)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를 처음으로 정제하는 데 성공했다. 1990년대부터 보이틀러는 약 2100여 마리의 유전자 돌연변이 쥐와 TNF-α(알파)를 이용해 LPS 수용체를 본격적으로 찾았다.
그리고 결국 보이틀러는 LPS 수용체를 찾는 데 성공했고, 1998년 LPS 수용체의 전체 유전자 분석까지 완료했다. LPS 수용체는 초파리에 있는 톨 수용체에서 이름을 따 ‘톨 유사 수용체(TLR)’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서로 다른 항원과 결합하는 약 10여 종의 톨 유사 수용체를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2017년 강연 차 한국을 찾은 보이틀러 는 당시 과학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연구 당시 성과가 나지 않는 시간이 길었고, 노벨상을 받는 것도 당연히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다”며 “동료들과 함께 애써온 만큼 노벨상 수상이 매우 기쁘고 앞으로도 인류의 건강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연구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보이틀러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인체의 면역시스템 연구를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면역반응이 일어나는 과정을 밝히고, 이 과정에 관여하는 단백질의 종류와 기능을 확인하면 이를 이용해 염증이나 암을 치료할 새로운 치료제의 후보물질을 만들 수 있다.
보이틀러가 처음 정제한 종양괴사 인자(TNF)-α를 억제하면 각종 염증을 막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로 TNF-α 억제제인 에타너셉트(Etanercept)는 류머티스 관절염과 건선성 관절염, 만성 장염을 일으키는 크론병에 널리 쓰이는 약물이다.
미국 제약회사인 암젠은 2002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아 에타너셉트를 엔브렐(Enbrel)이라는 상품명으로 출시했다.
보이틀러 교수는 “톨 유사 수용체에 저항성이 있는 돌연변이와 자가면역, 암 등을 연구하고 있다”며 “특히 LPS 수용체는 인간의 면역시스템뿐만 아니라 체내 대사, 행동발달 등 인체 내 다양한 생물학적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보이틀러는 유전자 분석 기술을 활용해 톨 유사 수용체의 돌연변이 표현형을 찾고, 이 중에서 질병 완화에 효과가 있는 돌연변이 유전자만 선별해 이 유전자가 만드는 단백질로 여러 질병에 대항할 신약을 만들기 위해 계속 연구했다.
2018년 8월 보이틀러는 선천 면역반응 단계에서 TNF 생성을 조절할 수 있는 10만 개의 화합물 합성 라이브러리를 얻었다. 그리고 여기서 찾아낸 디프로보씸(Diprovocim)이라는 화합물을 암 백신의 새로운 보조제로 추가하면 암세포 주변으로 면역세포를 끌어들여 면역반응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국제학술지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한편 1973년 당시 록펠러대 박사후연구원이었던 랠프 스타인먼은 최초로 수지상세포를 발견했고, 2011년 스타인먼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연구실은 수지상세포만 연구했다.
이를 통해 수지상세포가 포식 작용과 같은 선천 면역반응을 하는 동시에 후천 면역반응을 개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수지상세포는 포식 작용을 하는 중 항원의 일부를 떼어다가 그 특징을 간직한 단백질(후에 ‘주조직 적합성 복합체(MHC)’라 명명됐다)을 자신의 막 표면에 발현시키는 능력이 있다.
T림프구나 B림프구는 수지상세포 표면에 나타난 항원 유래 단백질을 인식해야만 각각 세포독성 T림프구와 형질세포로 활성화돼 항원을 매우 특이적으로 인식해 제거한다. 후천 면역반응의 핵심인 T림프구과 B림프구가 활성화되려면 수지상세포의 도움이 필수인 셈이다.
공교롭게도 스타인먼은 노벨상 수상 발표 사흘 전인 2011년 9월 30일, 약 4년 6개월에 걸친 췌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고, 노벨 위원회는 스타인먼의 작고 소식을 모른 채 수상자로 결정해 공표했다. 노벨위원회는 1974년부터 사망자에게는 노벨상을 주지 않는다는 규정을 명문화해 고수해왔지만, 스타인먼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수상을 철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스타인먼은 췌장암 판정을 받은 뒤 자신이 발견한 수지상세포를 활용한 연구단계의 치료제 물질 등 아직 효능이 입증되지 않은 치료법에 대해 스스로 실험 대상이 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일으킨 상황에 대해 호프만은 2020년 3월 20일 프랑스 주간지 ‘파리 매치(Paris match)’와 인터뷰에서 인체 면역강화를 위한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세계적인 위기를 불러온 코로나19를 물리치기 위해 연구소와 제약사, 정부가 힘을 합쳐 연구를 전개하고 있다”며 “최근 20년간 생물의학 연구 기술이 크게 발달한 만큼 코로나19의 특징을 분석하고 방어물질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