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대부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울하다고 느낀다. 특히 무언가를 잃었다는 상실감을 겪을 때 우울감에 빠지기 쉽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고, 변화는 상실감을 수반한다. 따라서 우울하다는 느낌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우울감을 넘어 의학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심한 ‘우울증’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우울증은 주변에서 매우 흔하게 발견되는 질병이다. 미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전 인구의 15%가 일생 동안 한번은 우울증에 빠지며, 특히 여성의 경우 그 비율이 무려 25%에 이른다고 한다. 우울증이 발생하는 평균연령은 대개 40세 정도. 그러나 최근에는 20세 미만의 연령층에서도 우울증 환자들이 점차 늘고 있다. 또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2배 정도 더 많이 걸리며, 도시보다 농촌에서 더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아…"
우울증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몇가지 임상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22세의 여대생A씨는 한달 전부터 시작된 불면증과 우울한 기분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 A씨는 평소 성격이 활발하고 명랑했으며 교우관계도 비교적 원만한 편이었다. 그러나 3개월 전부터 조금씩 매사에 의욕이 떨어지고 즐거운 일이 전혀 없어졌으며, 식욕도 점차 떨어져서 체중이 5kg이나 감소했다. A씨는 6개월 전 평소 자신을 무척 아껴주던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갑자기 돌아가신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하지만 막상 장례식을 치를 때는 별로 슬프다는 느낌도 안들었고,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에도 한동안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태연하게 잘 지내 주위에서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이 환자의 경우처럼 우울증 환자들은 특징적으로 의욕의 저하, 식욕 저하, 체중 감소와 같은 증상들을 보인다. 아버지 장례식 때 슬픈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부정하는 심리적인 상태를 반영한다. 이런 부정 상태가 오히려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 충격적이다 보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아버지에 대한 상실감이 감당하기 어렵게 커진 것이다.
또다른 예를 살펴보자. 25세의 B씨는 1년 전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시험에 실패했다. 그후 B씨는 고시원에 들어가 취직시험을 준비하던 중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웃으며 무능력하고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수근대는 것 같아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의사와의 면담에서 B씨는 몇달 전부터 전과는 달리 공부에 집중이 안되기 시작했고 깊은 잠을 못자고 새벽에 일찍 잠을 깨게 된다고 호소했다.
이처럼 별다른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하면서 비웃는다고 여기는 증상을 ‘관계망상’이라 한다. 관계망상은 심한 정신병적 우울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또 불안감, 불면증, 그리고 집중력의 저하 같은 증상들도 우울증 환자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A씨의 사례와는 달리 이 경우는 관계망상과 같은 사고의 장애가 동반된 정신병적 우울증이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세의 재수생 C씨의 사례를 살펴보자. C씨는 자기 코가 너무 못생겼다며 코를 수술해달라고 부모를 졸라 성형외과를 찾았으나, 의사의 권유로 정신과로 오게 됐다. C씨는 평범한 외모를 지닌 여학생으로, 코에 특별한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달 전부터 거울만 보면 코가 너무 못생긴 것 같아 신경이 쓰였고, 하루 종일 코에 대한 걱정만 하다 보니 공부를 하기 힘든 나날이 반복됐다. C씨는 재수를 하면서 점차 친구들을 멀리 하고 혼자서 집과 학원만 왕복하면서 지냈으며, 약 한달 전부터 식욕이 떨어지고 잠들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의사가 요즘의 기분상태에 대해 물어보자 기쁘지도 우울하지도 않으며, 그저 웬지 공허하고 무감각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 환자의 경우 자신의 신체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이 주증상이었지만 식욕 저하와 불면증, 그리고 혼자 고립돼 지내는 행동이 증가해 왔다. 또 자신의 기분 상태에 대해 설명할 때 우울하기보다 아무런 느낌이 없고 마치 감정이 말라버린 것 같다고 호소한다.
세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우울증에서 보이는 증상들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해서 얼핏 보면 마치 동일한 질병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울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염색체 이상 발견
우울증의 발생 원인에 대해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면 우울증이란 대개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대상을 상실했을 때 발생한다고 한다. 이런 상실에는 물질적인 대상뿐 아니라, 자신의 이상이나 신념, 사회적 지위 같은 심리적인 실체들도 포함될 수 있다. 물론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상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자기로부터 떠나버리는 것과 같이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경우다. 우울증 환자들은 그런 중요한 대상이 자기로부터 떠나버린데 대해 강한 분노감을 느낀다. 만일 분노감이 방향을 바꿔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면서 죄책감과 자기 질책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면 우울증이 발생한다고 한다.
반면 행동심리학자들은 우울증이 자기 힘으로는 주변 상황을 도저히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반복적으로 학습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동물들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전기충격을 반복해서 주었다. 그러자 동물들이 처음엔 그 충격을 피하려고 애쓰지만 나중에는 무기력해져서 마치 우울증 환자들이 보이는 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인지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우울증 환자들에게는 삶에서 겪는 경험들에 대한 부정적인 왜곡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그리고 비관주의와 절망감 등의 인지기능상의 왜곡이 잘 일어난다. 이렇게 학습된 부정적인 견해들이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심리학적 분석과는 별도로 우울증의 원인을 분자생물학적 수준에서 밝혀내고 있다. 의료계는 우울증이 뇌신경 질환의 일종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뇌 내부에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가지 신경전달물질들이 있는데, 이 중 노르에피네프린과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의 활성이 떨어지면 우울증이 발생한다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 따라서 이 물질들의 활성을 회복시켜야만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 실제로 우울증의 치료 약물로 개발돼 큰 효과를 보고 있는 많은 항우울제들은 이런 신경전달물질들의 활성을 높이는 것이 주된 작용이다. 최근에는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활성이 감소하는 것 역시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신경내분비 계통의 이상들도 원인으로 주목되고 있다. 즉 뇌에 의해 그 분비가 조절되는 갑상선호르몬이나 부신호르몬 같은 호르몬의 작용에 이상이 생기면 우울증이 생긴다는 가설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울증이 유전적 원인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개 우울증 환자의 가계를 조사해보면 정상인 가족들에 비해 우울증을 비롯한 ‘기분’에 장애가 있는 환자들이 특히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분자생물학적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5번과 11번 염색체와 X 염색체에 이런 기분장애의 유전자 표지들이 있다고 보고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5번 염색체에는 도파민이 분비되는 신경 수용체에 관한 유전자가 위치하며, 11번 염색체에는 노르에피네프린이나 세로토닌 같은 물질의 합성을 좌우하는 효소에 대한 유전자가 위치한다는 것이다. 신경전달물질이 우울증의 한 원인이라는 가설을 확인시켜주는 연구 결과다.
일상적인 슬픔과 달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겪게 되는 정상적인 슬픔은 병적인 우울증과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슬플 때 나타나는 증상이 우울증의 특성들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다르다. 단순한 슬픔에서는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볼 수 있는 심한 죄책감이나 지나치게 자신을 비난하는 태도를 찾기 힘들다.
19세기 영국의 전원시인이었던 존 클레어는 자신이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쓴 적이 있다.
아침이 없는 밤
끝이 없는 괴로움
지독하게 수치스러운 인생
친구 하나도 없는 세상
이 시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우울증의 모든 특성들이 잘 압축돼 함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희망도 없고 고통과 외로움만 가득한 마음의 감옥에 갇혀 끝없이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우울증이 지닌 무서운 파괴력이자 동시에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슬픔은 다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상실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수반될 수 있지만, 애도 작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면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상실한 대상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새로운 인생으로의 전환이다.
예를 들어 가까운 사람이 오랫 동안 중병을 앓다가 사망했다고 하자. 이때 남겨진 사람의 마음 속에서 죽은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담긴 기억과 연상들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슬픔의 과정 중에 이런 기억과 연상들이 마음 속에서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상실에서 오는 고통이 줄어들고 죽은 사람에 대한 사랑의 애착도 점차 감소하게 된다. 결국 이런 애도 작업을 통해 마음 속에서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완전히 묻혀지게 되면 우리는 다시 한번 살아 있는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사랑하면서 생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때는 애도 작업이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고 흐름이 병적으로 왜곡돼 막히는 경우도 있다. 정상적인 슬픔에서보다 이런 비정상적인 형태의 애도로부터 우리는 우울증의 성질과 유사한 부분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심한 죄책감과 자신을 비난하는 병적인 태도들은 소위 ‘자기애적’(narcissistic) 성격 때문에 모든 종류의 상실에 대해 특히 민감한 사람들에게 잘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울증 증상
다음의 항목들은 우울증에 걸릴 때 나타나는 공통적인 증상들이다. 평소에 비해 이런 증상이 많을 경우 자신이 우울증에 빠진 것이 아닌지 의심해보고,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전문의를 찾는 것이 좋다.
■기분이 우울할 때가 많다.
■뚜렷한 이유 없이 잠이 안오거나 잠을 자더라도 깊은 잠을 못자고 새벽에 일찍 잠을 깨게 된다.
■매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다.
■무슨 일이든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집중이 안되고 마음이 혼란스럽다.
■식욕이 없고 체중이 자꾸 빠진다.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고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눈물이 자주 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괜히 마음이 공허하거나 불안하다.
■성욕이 감퇴되고 쉽게 피로해진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잘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