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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블랙홀 공장'짓는다

뜨겁고 수명 짧은 미니 블랙홀 생겨

지난 3월 미국 하와이주 수도인 호놀룰루 법원에는 이색 소송이 제기됐다. 물리학과 법학을 전공한 전직 공무원인 하와이의 월터 와그너와 스스로를 작가이자 시간이론 연구자라고 밝힌 스페인의 루이스 산초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를 상대로 거대강입자가속기(LHC) 실험을 당장 중지하라고 요구한 것.

이들은 LHC 실험에서 고에너지 입자가 충돌하면 조그만 블랙홀이 만들어질 것이며 결국 지구가 몽땅 그 속으로 빠져들어 멸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LHC가 소송 당한 이유는?

18세기 말 영국의 자연철학자 존 미첼은 뉴턴의 중력이론을 토대로 ‘너무 밀도가 높은 나머지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물체’, 즉 블랙홀이 우주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수학자 라플라스도 같은 아이디어를 그의 유명한 역학 교과서에 실었다.

20세기에 들어와 블랙홀은 더욱 각광받았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중력장 방정식이 실제로 블랙홀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칼 슈바르츠쉴트를 비롯한 천체물리학자들이 밝혔기 때문이다.

그 뒤 천문학자들은 이미 발견된 100여 개 이상의 천체가 블랙홀이라는 증거를 포착했으며 거대한 블랙홀이 우리 은하 중심을 비롯해 우주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킵 쏜에 따르면 블랙홀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의 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질량 혹은 에너지를 모은다. 그리고 그 에너지에 해당하는 블랙홀 크기인 슈바르츠쉴트 반지름을 갖는 반지모양 고리를 상상한다. 만약 그 고리로 둘러싸인 공간 속에 전체 에너지가 고스란히 들어갈 수 있으면 블랙홀이 만들어진다. 간단히 말해 큰 에너지를 작은 공간에 모으면 블랙홀이 생긴다.

물리학자들은 LHC 실험에서 이런 상황이 생길 수 있음을 눈치 챘다. LHC 실험에서는 양성자가 각각 7TeV(테라전자볼트, 1TeV=1012eV)의 에너지로 가속된 뒤 충돌한다. 충돌할 때 최대에너지가 14TeV나 되는 셈이다.

이때 양성자를 이루고 있는 쿼크들과 이들을 묶어주는 글루온 입자들도 함께 충돌하는데, 만약 두 입자가 충돌하는 순간 입자 사이의 거리가 슈바르츠쉴트 반지름보다 작으면 블랙홀이 생긴다. 어마어마하게 큰 에너지를 가진 입자들이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작은 공간에 가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LHC 실험에서 블랙홀이 얼마나 많이 만들어질까? 이 질문은 사실 양성자보다 크기가 작은 초미시세계에서 중력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달렸다. 만약 초미시세계에서 중력이 거시세계와 정확히 동일한 역할을 한다면 LHC에서 블랙홀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실제로 양성자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큰 길이인 1cm부터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인 1AU(천문단위, 1AU=1.5×1011m)까지 거시세계에서 실험과 관측으로 알아낸 내용에 따르면 중력이 강해지는 에너지 대역은 소위 플랑크에너지로 불리는 1019GeV(기가전자볼트, 1GeV=109eV)에 이른다. 이는 LHC에서 도달할 수 있는 에너지보다 약 1016배나 많다. 따라서 중력은 LHC에서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영향만 미친다.

하지만 초미시세계에서 중력의 역할이 미미하다고 가정하는 초끈이론은 매우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초끈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실제로 11차원 또는 10차원이며 따라서 6개 혹은 7개의 ‘여분의 차원’(extra dimension)이 존재한다.
 

ATLAS 검출기에서 양성자가 충돌할 때‘미니 블랙홀’이 생성된 뒤 호킹 복사 과정을 거치며 순식간에 다양한 입자로 붕괴되는 장면을 시뮬레이션했다.


수명 10-23초 ‘미니 블랙홀’

1990년대 중반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초끈이론에서 중력은 시공간의 기하학을 결정지으며 어느 방향으로나 전파되지만 자연계의 다른 힘들, 즉 전자기력, 약한 핵력 그리고 강한 핵력은 여분의 차원 방향으로 전파되지 못하고 부분 공간인 3차원 ‘막우주’(brane world)로만 전파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

빛은 3차원으로만 퍼져나가는데 중력은 11차원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만약 중력이 새나갈 수 있는 여분의 차원이 충분히 넓다면 중력은 전자기력에 비해 매우 약해질 수밖에 없다.

1990년대 말 물리학자들은 이런 아이디어가 실제로 ‘왜 중력은 다른 힘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한가?’라는 의문에 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만약 여분의 차원이 존재한다면, 또 그것이 관측된 중력 세기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면, LHC의 고에너지 입자 충돌 과정에서 강한 중력 효과가 발생할 것이며 그 결과 블랙홀이 생길 확률도 매우 높아진다. LHC가 ‘블랙홀 공장’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호놀룰루의 소송 사건이 있기 수년 전부터 물리학자들은 LHC에서 ‘미니 블랙홀’의 물리학적 성질을 연구했다. 미니 블랙홀은 매우 뜨겁고 수명은 10-23초보다 짧아 눈 깜짝할 사이에 붕괴돼 사라진다. 와그너와 산초의 걱정과는 달리 LHC에서 관측할 현상은 지구의 붕괴 대신 빠르게 붕괴하는 블랙홀이 내놓는 빛과 에너지이며, 이는 LHC에서 고스란히 인류에게 다가올 것이다. 앞으로 인류를 흥분시킬 물리학 발견의 순간을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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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박성찬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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