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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빅뱅 직후인 137억 년 전 우주 재현한다

좀 이상한 나라가 있다. 여기 ‘주민’들에게는 사칙연산의 덧셈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가령 1+2=62.7이라는 셈을 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이곳에서는 통하질 않는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서로를 원하는 힘은 오히려 더 강해진다. 물리학자들은 이곳을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라 부른다.
 

ALICE 검출기에서 무거운 납 원자핵이 충돌한 뒤 다양한 입자로 붕괴하는 장면을 시뮬레이션했다. 이 실험은 빅뱅 직후 우주에 존재한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라는 물질 상태를 만들도록 설계됐다.


쿼크와 글루온을 해방시켜라

사실 ‘앨리스’는 거대강입자가속기(LHC)의 검출기 중 하나다. 앨리스(ALICE, A Large Ion Collider Experiment)는 길이 26m, 높이와 폭이 각각 16m로 무게만 1만t에 이르는 거대한 기기다. 앨리스에서는 납 원자핵을 빛 속도의 99%로 가속시킨 뒤 충돌시켜 태양 중심보다 10만 배나 뜨거운 상태를 만든다. 현재 29개국 86개 기관에서 1000여 명의 연구자가 참여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강릉대, 부산대, 세종대, 연세대 연구진이 참여하고 있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가 된 이유는 쿼크와 글루온이라는 입자 때문이다. 지구의 모든 물질은 산소, 질소, 철 같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 원자 중심에는 원자핵(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도는데, 원자 질량의 99.9%는 원자핵이 차지한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의 질량 대부분은 양성자와 중성자에서 나온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라는 더 작은 입자로 이뤄진다. 양성자는 위쿼크 2개, 아래쿼크 1개로, 중성자는 위쿼크 1개, 아래쿼크 2개로 구성된다. 덧셈 법칙에 따르면 쿼크의 질량을 더하면 양성자나 중성자의 질량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연구결과로는 쿼크가 양성자(또는 중성자) 질량의 약 200분의 1에 불과하다. 쿼크 3개를 더해도 양성자(또는 중성자) 질량에 턱없이 부족한 셈이다. 왜 그럴까.

쿼크들 사이를 묶어주는 힘을 *강력이라고 부른다. 강력은 글루온이라는 입자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전달된다. 결국 물질의 질량은 쿼크와 글루온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셈이다.

문제는 쿼크와 글루온이 양성자와 중성자 안에 갇혀 산다는 것. 게다가 이들은 경험적인 상식과 달리 거리가 멀수록 서로 당기는 힘이 커진다.

이 때문에 양성자나 중성자 안에 있는 쿼크를 떼어내기가 매우 힘들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양성자와 중성자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까? 서로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어 당기는 힘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이 현재로선 유일하다. 앨리스에서 납 원자핵을 빠른 속도로 충돌시키면 그 순간 쿼크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서로 당기는 힘이 작아져 양성자나 중성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이 상태를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라고 부른다.

물리학자들이 굳이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를 만드는 이유는 질량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다.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는 온도가 내려가거나 밀도가 낮아지면 쿼크들이 다시 뭉쳐 양성자나 중성자를 만든다. 앨리스 실험에서 이 과정을 포착한다면 지구 질량의 99.9%를 차지하는 양성자와 중성자, 나아가 모든 물질의 질량 근원을 설명하는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는 우주의 비밀을 푸는 열쇠도 쥐고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주에서는 무수히 많은 입자들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이 입자들을 우주선(cosmic ray)이라 부르는데, 대표적인 입자가 양성자다.

양성자들 중에는 빛 속도의 99.99%로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녀석들도 있다. 이들이 지구 대기에 있는 원자핵과 충돌한다면? 앨리스 실험에서 입자를 가속시켜 충돌시키는 실험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우리 머리 위 하늘에서는 쿼크-글루온 플라스마가 형성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 초기에는 온도가 아주 높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빅뱅 이론에서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진 아주 뜨겁고 작은 한 점이 폭발한 뒤 팽창하면서 식어 현재 약 3K(약 -270℃)이라는 차가운 우주가 형성됐다고 본다.

앨리스 실험에서 구현하려는, 태양 중심보다 10만 배나 높은 온도는 바로 빅뱅 직후 100만분의 1초가 경과한 초기 우주(약 137억 년 전)의 온도와 같다. 빅뱅 직후 초기 우주에서도 쿼크-글루온 플라스마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 때문에 앨리스 실험을 ‘미니 빅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앨리스 실험에서 쿼크-글루온 플라스마에 대한 의문이 풀리면 초기 우주에 관한 미스터리도 함께 해결된다.

블랙홀에 관한 단서도 잡을 수 있다. 은하 내부에는 중성자별이라는 밀도가 아주 높은 별이 있다. 중성자별의 질량은 태양의 2배에 이르지만 반지름은 10여km밖에 안돼 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원자핵이다. 만약 중성자별 두 개가 충돌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주에서 거대한 입자들의 충돌 실험이 일어나는 셈이다.

중성자별이 충돌하면 은하 내부에 쿼크-글루온 플라스마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두 중성자별은 하나가 돼 블랙홀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신호가 방출된다. 대표적인 예가 중력파와 감마선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중성자별이 충돌할 때 나오는 신호를 측정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여행’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들떠 있다. 빅뱅 이후 초기 우주를 들여다보고 블랙홀의 비밀도 파헤칠 앨리스의 활약을 기대해보자.

강력*

자연계에서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중력과 전자기력,
약력(약한 상호작용) 그리고 강력(강한 상호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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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이창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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