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둘레 길이 2만 6659m, 자석 수 9300개로 세계에서 가장 큰 기계. 초당 1만 1245번 ‘트랙’을 도는 지상에서 가장 빠른 양성자. 태양 중심부보다 10만 배나 뜨거운 공간과 우주에서 가장 추운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보유한 ‘기네스 기록’의 일부다. LHC가 가동을 시작하면 여기에 새로운 기록들이 더해질지 모른다. 거대한 ‘테크노파크’ LHC의 감춰진 기록들을 소개한다.
1.9K, 우주에서 가장 추운 곳
LHC는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을 가로질러 지하 50~175m에 건설됐다. 원형의 이 ‘지하 터널’은 둘레만 약 27km다. 터널은 때론 마을 아래를, 때론 도로 밑을 지나고, 중생대 쥐라기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쥐라산 기슭 아래도 통과한다.
사실 지하에 이렇게 거대한 원형 터널을 정확하게 건설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의 어떤 기업에서도 이 일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과학자들이 직접 터널을 설계하고 측량하고 공사를 지휘해 완성했다. 마지막에 불과 5cm 오차로 원형 터널이 완성됐다는 사실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다.
터널에는 수십 종의 초전도자석이 설치돼 있다. 이들은 터널에서 양성자들이 움직일 때 원형 궤도를 유지하게 할 뿐 아니라 양성자들을 서로 충돌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양성자는 빛 속도의 99.99%로 움직이는데, 이 정도 속도면 초당 터널을 1만 바퀴 이상 도는 셈이다.
양성자가 움직일 때는 7TeV(테라전자볼트, 전자를 1조V 전압으로 가속했을 때 전자가 갖는 에너지)라는 엄청난 에너지를 갖는다. 이들이 부딪히면 14TeV라는 에너지가 생성된다. 이는 프랑스의 고속전철 테제베(TGV) 400t짜리가 시속 150km로 달릴 때 갖는 에너지보다 더 크다.
이런 양성자들을 원형 궤도에 묶어두려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자기장이 필요하다. 초전도자석은 8.36테슬라(T)의 자기장을 만들어 양성자들의 ‘탈선’을 막는다. 이는 인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구자기장의 약 10만 배에 이르는 크기다.
이렇게 큰 자기장을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초전도현상 때문이다. 초전도현상을 이용하면 도선에 저항이 없고 전력 소모도 없이 전류를 흘릴 수 있다. 이때 초전도자석은 1.9K(-271.25℃)라는 극저온에서 작동하는데, 보통의 우주공간보다 온도가 낮아 LHC는 ‘우주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불리기도 한다.
초전도현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초유체헬륨이 필요하다. 초유체헬륨은 매우 특이한 열전도성을 띠고 있어 수kW의 냉각 상태를 1km나 전달할 때도 온도 변화가 0.1K이 채 안된다. 이 때문에 LHC에는 파이프 4만 개와 액체헬륨 70만L가 저장돼 있고, 최초 냉각에 사용되는 액체질소는 1200만L가 있다.
1. CMS 양성자끼리 충돌시켜 힉스 입자를 만든 뒤 힉스가 뮤온 4개로 붕괴되는 현상을 관측.
2. LHCb 반b쿼크 붕괴 관측. CP 대칭성 깨짐을 통해 물질과 반물질 관계 연구.
3. ATLAS 양성자끼리 충돌하는 순간 생성된‘미니 블랙홀’이 순식간에 다양한 입자로 붕괴되는 현상 관측.
4. ALICE 납 원자핵끼리 충돌시켜 빅뱅 직후 우주 초기에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쿼크-글루온 플라스마 관측.
5. 진공챔버 양성자가 지나는 빔 파이프 내부. ${10}^{-13}$기압이라는 초고진공 상태를 유지한다.
6. 중앙검출기(트랙커) 입자 궤적 추적.
7. ECAL 광자와 전자 검출기.
8. HCAL 쿼크와 글루온 검출기.
9. 초전도자석 검출기 내부에 균일한 자기장 유지.
10. 반환요크 초전도자석에서 생성된 자기장을 되돌려주는 역할 담당.
11. 뮤온챔버 뮤온 검출기.
금 18t 녹이는 세계 최대 자석
‘LHC 기네스’를 얘기할 때 CMS 검출기도 빼놓을 수 없다. CMS 검출기는 길이 22m, 지름 16m의 원통형으로 부분 검출기 4개(중앙검출기, ECAL, HCAL, 뮤온챔버)로 나뉜다. CMS 검출기에는 37개국 155개 대학과 연구기관이 참여하고 있으며 과학자 2000여 명이 협력하고 있다.
중앙검출기(트랙커)는 입자를 검출할 때 가장 중요한 정보라고 할 수 있는 입자 궤적을 추적한다. 입자가 ‘살아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 궤적을 보고 입자의 존재와 움직임을 간접적으로 확인한다. 이를 위해 중앙검출기 안에 전선을 빼곡하게 까는 기존 방법 대신 CMS 중앙검출기는 모두 실리콘센서를 사용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택했다.
실리콘스트립센서 2만 5000개가 210m2에 이르는 방대한 면적을 촘촘히 채우고 있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다. 특히 실리콘센서로 된 하나의 픽셀은 가로세로 150μm인 작은 검출기인데, 결국 CMS는 천문학적인 수의 부분 검출기들로 구성돼있는 셈이다.
픽셀은 검출하려는 입자가 중앙검출기를 지나면서 주변 원자에서 튕겨낸 전자들을 모은다. 이때 전자들의 움직임이 전류고, 이 전류가 펄스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입자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다. 결국 픽셀 크기가 작고 수가 많을수록 입자 궤적의 정확도가 높아진다.
CMS 검출기에 있는 초전도자석 역시 기록 경신의 일등공신이다. CMS 초전도자석은 4T의 강한 자기장을 만든다. 초전도코일을 감은 지름 6m, 길이 12.5m짜리 솔레노이드는 물론 뮤온챔버도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 크기가 지름 14m, 길이 21.6m로 거대하다. 무게는 1만 2000t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초전도자석이다. 이 초전도자석이 만드는 자기에너지로는 금을 한 번에 18t까지 녹일 수 있다.
CERN은 1990년 월드와이드웹(www)을 처음 개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CERN이 월드와이드웹을 만든 이유는 연구소 내부 연구자들이 각종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기술이 인터넷에 적용되면서 전 세계가 ‘인터넷 시대’에 들어섰다.
또 1970년대 세계 최초로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 기기를 만들어 스위스 제네바대에서 암 진단에 사용한 뒤 세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LHC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최초’ 기술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제2의 인터넷’으로 불리는 그리드 컴퓨팅이다. LHC는 매년 15PB (페타바이트, 1PB=1015B)라는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쏟아낸다. 새로운 입자를 발견하려면 실험에서 생성될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분석해야 하는데, 이를 처리하기 위해선 엄청난 성능의 컴퓨팅 기술이 필요했고 이로 인해 그리드 컴퓨팅이 등장했다.
월드와이드웹에서 그리드 컴퓨팅까지
그리드 기술은 쉽게 말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컴퓨팅 자원을 초고속 네트워크로 모아 하나의 컴퓨팅 자원으로 묶는다는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작업 속도를 무한정 향상시킬 수 있다. 월드와이드웹보다 1만 배나 빠른 속도로 정보를 처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기술을 실생활에 응용하면 영화나 음악 파일도 몇 초 만에 내려 받을 수 있으며 화면정지 현상도 없어진다.
현재 LHC 실험을 지원하기 위해서 LCG(LHC Computing Grid)라는 그리드 시스템이 운영 중이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LCG 그리드로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분석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EGEE라는 그리드 시스템은 유럽연합 내의 학계와 산업계에서 활용되며, LCG를 도와 LHC의 실험 데이터 분석과 처리를 맡는다.
또 영국의 옥스퍼드대, 케임브리지대 병원과 이탈리아의 많은 병원이 마모그리드(Mammogrid)로 유방 X선 촬영 영상을 공유하고 있다.
초고진공 기술을 이용한 집광판도 LHC의 대표작이다. 태양광은 환경친화적이고 사용할 수 있는 양이 무한하며 가격은 공짜다. 문제는 집광판의 효율이 떨어져 현재 1m2당 900W 수준에 그친다는 것. 중부유럽에서는 집광판 한 개가 태양광을 모으는 능력이 50% 정도며, 이마저도 대류나 마찰로 잃는 양이 많다.
여기에 LHC에서 양성자와 공기 입자의 충돌을 없애기 위해 개발한 초고진공 기술이 빛을 발한다. 초고진공 기술을 사용한 평면진공집광기는 집광판에서 유리와 금속 사이의 간극을 줄이고 집광 면적을 상대적으로 넓혔으며 설치와 유지 보수를 간편하게 만들 뿐 아니라 복사로 인한 열손실을 줄였다. 수명도 20년으로 늘었다.
‘그린 테크놀로지’는 LHC에 들어가는 수많은 전선에도 적용된다. LHC는 절연케이블을 많이 사용한다. 절연케이블은 할로겐이나 유황 성분이 들어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화재가 발생하면 인체에 해로운 연기를 내뿜는다.
LHC의 시설이 복잡하고 더군다나 지하에 건설되자 CERN은 1980년대 절연케이블에 할로겐이나 유황 성분이 들어가지 않은 물질만 쓰기로 결정하고 절연케이블 생산 기업에도 같은 내용을 요구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인체에 무해한 절연케이블이 사용된 데도 LHC가 일조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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