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 쇼’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 Large Hadron Collider)가 고에너지의 입자를 충돌시킬 날이 다가온 것. 14년의 연구가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기자가 CERN을 찾은 5월 27~29일, CERN은 흥분된 분위기로 가득했다.
CERN엔 언어의 벽이 없다. 카페테리아에서 점원이 커피를 건네며 프랑스어로 ‘메르시’(merci, 고맙다는 뜻)라고 말하자 독일어인 ‘비테’(bitte, 천만에라는 뜻)가 돌아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벼운 아침 인사인 ‘Good morning’도 천차만별이다. ‘굿~다이’(호주식 영어) ‘할로’(독일식 영어) ‘차우’(이탈리아식 인사)가 뒤섞인다. 대화 당사자들은 일상인 듯 전혀 어색하지 않다.
CERN에는 다양한 국적의 과학자가 넘쳐난다. LHC가 우주의 비밀을 풀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하고자 전 세계에서 과학자들이 몰려든 까닭이다. CERN의 로버트 아이머 소장은 “CERN은 세계 각국의 대학과 기업이 연계된 국제협력체계”라며 “전세계 입자물리학자들은 성지순례를 하듯 CERN을 찾는다”고 말했다.
CERN에 상주하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약 2500명. 방문과학자까지 합치면 그 수는 약 8900명으로 늘어난다. CERN의 호스텔은 올해 말까지 이미 예약이 꽉찼다. CERN은 지난해 LHC 가동을 앞두고 호스텔을 한 채 더 지었지만, LHC에 대한 열망을 안고 몰려드는 과학자들을 수용하기엔 부족한 형편이다.
노상률 박사
힉스 입자 감지할 CMS 연구
한국도 CERN의 LHC 프로젝트에 ‘두뇌’들을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다. 현재 CERN의 한국그룹 터줏대감은 7년째 CMS(Compact Muon Solenoid) 연구에 참여한 노상률 박사(55)다. CERN의 핵심 연구는 40동에서 이뤄진다. RA32호에는 태극무늬 부채가 당당히 걸려 있는데, 이곳이 노 박사를 비롯한 한국인 과학자들의 연구실이다.
LHC의 제1 목표는 힉스 발견이다. 양성자가 정면충돌할 때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입자도 검출될 것으로 기대한다. 충돌할 땐 힉스 외에도 초당 약 1억 개의 다양한 입자가 생기는데 이를 ‘배경사건’이라고 부른다. 노 박사는 힉스 입자의 흔적을 명확히 찾을 수 있도록 배경사건을 제거하고 있다. 모래 안에서 바늘을 찾기 위해 모래를 없앨 방도를 찾는 셈이다.
힉스를 뚜렷하게 관찰하려면 입자 신호 1개당 배경사건이 2개 이하로 낮아야 한다. 최근 그는 배경사건을 30개까지 줄였다. 그는 “마지막 배경사건 한 개까지 잡아내 연구 오차를 줄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입자 감지는 CMS가 맡는다. 프로젝트의 성패가 CMS의 검출능력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월 27일 오전 노 박사의 안내로 CMS를 찾았다. 노 박사가 일하는 40동과 CMS는 LHC 터널의 양 끝에 위치한다. 직선거리만 8km나 된다. 스위스에 있는 40동을 출발해 국경을 넘어 프랑스에 있는 CMS에 닿았다. 자동차로 20분이나 달린 뒤였다. 너른 초원과 어우러진 노란색 건물은 아담했다. 그러나 건물 지하에는 거대한 검출기가 자리하고 있으리라.
마당에는 헬륨 가스를 실어 나르는 실린더가 가득했다. LHC는 초전도체를 만들기 위해 파이프의 온도를 영하 271℃까지 내린다. 이때 헬륨가스가 필요하다. 노 박사는 “CMS의 가장 안쪽 부분인 이칼(ECAL)에 크리스털 조각만 끼워 넣으면 CMS가 완성된다”며 “입자가 CMS에 감지돼 차곡차곡 데이터로 쌓일 순간을 생각하면 벌써 손에 땀이 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CMS에서 감지된 데이터를 처리하는 연구에도 한국인의 참여가 활발하다. 석 달 전 CERN에 입성한 서현관 박사는 2006년 성균관대에서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데이터 퀄러티 모니터링’ 그룹에서 데이터가 감지될 때 실시간으로 데이터와 검출기의 상태를 보여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서 박사는 “LHC 가동 직전에 연구에 합류하게 돼 긴장된다”며 “두 달 동안 열심히 노력해 실전에 대비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알렉산드레 니키텐코 박사
협동심 이면엔 치열한 경쟁이
“우리 그룹이 힉스를 발견할 것이다!”
CERN에는 연구 그룹이 100개 이상이다. 각 그룹의 목표는 힉스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것.
2007년 말까지 7년 동안 힉스 그룹을 이끈 알렉산드레 니키텐코 박사는 “힉스가 발견될 확률은 99.99%”라며 “어느 그룹이 이 영광을 차지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힉스가 어떤 형태로 어디서 발견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후보로 거론되는 뮤온, 전자, 광자, b쿼크 중 질량이 가장 큰 b쿼크에서 힉스가 발견될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나머지 확률도 무시할 수는 없다.
니키텐코 박사도 최초의 힉스 발견자가 되는 게 목표다. 그는 요즘 머리를 기르고 있다. 그는 “러시아에서 핵폭탄을 처음 만든 과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연구 내내 머리를 길렀던 것을 따라했다”며 “사하로프의 ‘머리카락’에서 아이디어가 나왔듯 나도 머리를 기르면 그처럼 좋은 연구결과를 낼 수 있다고 주문을 건다”고 말했다.
니키텐코 박사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현재 영국 임페리얼대 소속이다. 임페리얼대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업적을 낸 과학자를 재빠르게 스카우트하기로 유명하다. 7년 동안 힉스 그룹장을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가 스카우트 된 일은 당연했다.
CERN은 연구 분위기가 자유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니키덴코 박사는 “CERN에서 일하면서 과학자들은 열린 마음으로 연구하는 자세를 배운다”고 말했다.
세계 과학자와 교류하며 얻은 사교적인 성격도 CERN에서 얻은 큰 선물이리라.
로버트 아이머 CERN 소장
CERN은 물리학자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
CERN은 LHC를 가동하기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전장’을 종횡무진 누빈 사람이 CERN의 수장인 로버트 아이머 소장이다. 그는 2004년 CERN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아이머 소장은 1994년부터 10년 간 핵융합 국제 공동 프로젝트인 이터(ITER)를 공격적으로 경영한 경험을 살렸다.
CERN은 당시 예산의 10%가 삭감됐고 협력기업이 줄줄이 파산해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부임할 당시 과연 기계라도 한 대 완성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며 “대출을 받기 위해 일일이 은행에 찾아가 LHC가 성공하면 돈을 갚겠다며 배짱을 부렸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에도 LHC는 번번이 가동이 지연됐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가동 직전 파이프의 냉각장치가 고장났다. 아이머 소장은 “하루빨리 결과를 내려는 욕심에 작년 일정을 무리하게 진행했다”고 시인했다.
그의 단언대로라면 곧 LHC가 가동된다. 어려운 상황을 헤쳐 온 그에게 LHC 가동 소식은 남다르다. 실험 준비를 끝냈고, LHC가 물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아이머 소장은 힉스가 발견되면 후속 연구를 위해 선형가속기(CLIC)를 한 대 더 지을 계획이다.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는 1960년대 이후 가속기를 건설하지 않았다. 자국에 가속기를 짓는 것보다 유럽이 연합해 CERN에 강력한 가속기를 만드는 편이 낫다는 공감대를 이뤘기 때문이다. 아이머 소장은 “CERN은 아시아 국가들에게도 개방돼있다”며 “과학자들을 교환하면서 입자가속기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CERN에는 아인슈타인, 맥스웰, 퀴리 같은 역사적인 물리학자의 혼이 살아 숨 쉰다. 길에도 이들의 이름이 붙어있다. 아이머 소장은 “LHC 실험이 끝나면 세계를 놀라게 할 연구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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