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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뉴턴에 날개 달아준 여성 물리학자들

2017년은 뉴턴의 ‘프린피키아’가 출간된 지 330주년이 되는 해다.
출간 당시 뉴턴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그의 새로운 물리학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포함돼 있다. 바로 소수의 여성 과학자들이다.
당시 과학은 여전히 남성이 주도하는 학문이었지만, 그럼에도 여성 과학자들은 뉴턴의 실험을 재현하고 보완했으며 뉴턴의 책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고 강의했다. 오늘날의 뉴턴은 그들에게도 빚이 있다.

 

뉴턴은 지구나 달이 궤도를 도는 이유가 중력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1687년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한 ‘프린키피아’를 출간했다. 그의 이론은 혁명적이었지만, 유럽 대륙의 과학자들이 완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한 세기가 더 걸렸다. 당시 유럽은 데카르트의 이론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우주에 눈에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가 존재해 이들이 돌면서 행성을 움직이게 한다고 주장했다.

 
에밀리 드 브르퇴유: 퉁명스러운 뉴턴의 원서에 인간적인 문체로 숨을 불어넣다
 
뉴턴을 프랑스에 널리 알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과학자는 샤틀레 후작부인으로 알려진 에밀리 드 브르퇴유(1706~1749년)다. 에밀리는 어려서부터 과학과 수학에 뛰어났다. 당시 여성은 남성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팽배해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가 있었고 신분도 귀족이어서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에밀리는 수학과 과학 공부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독학한 해석기하학을 이용해 도박판에서 돈을 땄고, 그 돈으로 책을 사서 읽을 정도였다. 에밀리는 여성이 무지한 것은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에밀리는 수학자와 과학자들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한 카페에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파리의 카페들은 여성의 출입을 금지했다. 이 규칙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에밀리는 일주일 후 남장을 하고 카페에 다시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출입을 허락 받은 그는 과학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야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그의 배짱과 열정에 놀랐다.

에밀리는 1733년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를 만났다. 그는 프랑스 계몽주의 작가로, 필명인 볼테르로 더 유명하다. 이들은 프랑스의 시레이 성을 일종의 ‘과학연구소’로 만들어 함께 연구했다. 온갖 종류의 과학기구를 들여 실험을 하고 당대 최고의 과학자, 수학자들을 불러 교류했다. 이는 시레이 성을 다녀간 사람들의 편지와 문헌으로 남아있다. 미국 마이애미대역사학과 주디스 진서 교수는 2007년 논문에서 프랑스의 유명한 수학자였던 피에르 루이 모페르튀, 알렉시 클로드 클레로가 이곳에 머물며 에밀리에게 수학을 가르쳤다고 밝혔다(DOI: 10.1098/rsnr.2006.0174). 또, 베네치아의 작가 프란체스코 알가로티는 시레이성에 장기 투숙하며 ‘여성을 위한 뉴턴주의, 또는 빛과 색깔에 대한 대화’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한 기사가 후작부인에게 6일 동안 뉴턴의 광학을 쉽게 알려주는 내용이다. 지금 시각으로는 남성이 여성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구도가 불편할 수 있지만, 당시의 통념으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에밀리는 볼테르와 함께 뉴턴의 실험을 재현하고 ‘뉴턴 철학의 요소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공동 저작이었지만, 당시 여성은 저자로 이름을 올릴 수 없었기 때문에 볼테르의 이름으로만 출간됐다. 하지만 볼테르는 친구와의 편지에서 이론적인 부분은 모두 에밀리가 맡았고 자신은 이를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1737년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는 열, 빛, 불의 본질에 대한 논문을 공모했다. 에밀리는 볼테르 몰래 밤을 지새우며 혼자 논문을 써서 제출했다. 그는 성별과 볼테르의 명성을 떠나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만 평가받고 싶었다. 여전히 데카르트의 이론을 고집했던 과학아카데미는 다른 사람에게 일등상을 줬지만, 에밀리의 논문에도 특별상을 줬다. 과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은 그는 특히 뉴턴을 지지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구심점이 됐다. 흔히 에밀리는 볼테르의 연인으로만 언급되지만, 이처럼 과학과 수학 지식에서는 그가 볼테르보다 훨씬 뛰어났다.

에밀리의 가장 큰 업적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뉴턴은 소수의 사람들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프린키피아를 썼고, 자신의 이론을 계산과 수학공식으로만 표현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뉴턴의 이론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고 있었다.

에밀리는 프린키피아를 단순히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세한 해석을 덧붙였다. 수학으로 된 개념을 알기 쉬운 단어로 번역했고, 중력의 작용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 등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 현대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했다. 그의 번역판으로 뉴턴의 물리학은 더 완전해졌다. 영국의 과학사학자 사라 허튼은 ‘뉴턴과 뉴턴주의: 새로운 연구들’(2004)에서 에밀리의 번역판이 “퉁명스러운 뉴턴의 라틴어 원서에 유려하고 인간적인 문체로 숨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미국대중과학저술가인 데이비드 보더니스도 ‘마담 사이언티스트’(2007)에서 “에밀리의 노력으로 오랫동안 프랑스를 지배하던 데카르트 철학이 물러가고 새로운 뉴턴의 물리학이 자리를 잡게 됐으며, 이후 프랑스의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18세기 부유한 귀족여성들은 자신의 집에 살롱을 열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교류했다. 지적 토론의 장이었던 살롱에서는 과학도 주요 주제 중 하나였다. 과학에 관심을 가진 여성들은 과학 강연을 듣고 대중 과학 도서를 읽었으며 과학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여성 과학자들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로라 바시와 크리스티나 로카티: 이탈리아 곳곳에서 뉴턴의 물리학을 가르치다

대학에서 뉴턴의 물리학을 가르친 여성 과학자들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로라 바시(1711~1778년)와 크리스티나 로카티(1732~1797년)가 주인공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 영국과 달리 제한적이지만 여성들도 과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수 있었고, 과학아카데미에도 가입할 수 있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여성으로서는 각각 두 번째, 세 번째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로라 바시는 부유한 법률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1732년 볼로냐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대학교수가 됐다. 미국 스탠포드대 역사학과 파울라 핀들렌 교수는 논문에서 바시가 후원자들의 네트워크를 똑똑하게 활용해 남성 위주의 과학자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DOI: 10.1086/356547). 당시 유럽의 과학 문화는 후원자가 중요했다. 이들의 지원이 있어야 대학에서 좋은 자리를 얻고 궁정에 진출할 수 있었다. 바시는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했고, 교황 베네딕토 14세 등의 후원을 받아 커리어를 쌓았다.

이후 바시는 볼로냐에서 과학의 상징이자 대중의 아이콘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순결한 미네르바’라는 별명에서 볼 수 있듯, 그에 대한 찬양은 여성에 대한 또 다른 고정관념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바시를 ‘과학과 결혼한 예외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가 결혼 상대가 될지를 가십거리로 삼았다. 반면 남성과학자들은 이런 일로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시는 뉴턴의 물리학을 전파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아 과학 활동을 계속했다. 1730년대부터 광학을 포함한 뉴턴의 이론을 가르쳤고, 뉴턴의 원리를 실험에 응용하기도 했다. 바시는 1776년 볼로냐대 실험물리학과 주임 교수로 임명됐다.

크리스티나 로카티도 바시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다. 베네치아 로비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인 파도바대는 1600년대에 엘레나 피스코피아라는 여성에게 첫 번째로 박사학위를 준 이후 더 이상 여성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로카티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볼로냐대에 입학했다. 당시 로비고와 볼로냐는 서로 다른 나라(각각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령)에 속한 도시였다. 여성이 다른 나라까지 건너가 대학에 입학한다는 건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는 볼로냐대의 첫 외국인 학생이자 남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은 첫 여성이었다.

로카티는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바시처럼 탄탄대로를 걷지는 못했다. 집안이 파산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카티는 계속해서 혼자 공부했고 뉴턴의 물리학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로비고의 콘코르디 아카데미에서 27년간 사람들을 가르쳤다. 1752년부터 1777년까지 54개의 강의를 했는데, 그 중 51개가 뉴턴 물리학에 대한 내용이었다.


300년 뒤… 오늘날의 에밀리와 바시는?

300년이 넘게 흘렀지만 과학에서 여성의 위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 물리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피지컬 리뷰 물리학 교육 연구’는 8월 ‘물리학에서의 젠더’라는 주제의 특집호를 냈다. 다른 과학 분야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소수지만, 물리학은 특히 성격차가 매우 크다. 미국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 중 여성의 비율은 11%에 불과하다.

연구자들은 고정관념이 큰 방해물이라고 지적한다. 18세기 볼테르는 독일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에밀리는 위대한 사람이지만 그의 유일한 단점은 여성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식은 현재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국 워싱턴대 다니엘 그런스팬 교수팀은 2월 ‘플로스원’에 발표한 논문에서 남학생들이 성 고정관념의 영향으로 동료 여학생들의 지식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DOI:10.1371/journal.pone.0148405). 게다가 성 고정관념은 여학생들 스스로도 자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과학기술 분야의 성 격차를 연구하는 미국 UCLA 린다 삭스 교수는 8월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성 고정관념 때문에 여성들이 자신감을 잃고 물리학자가 되는 진로에 불안감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18세기 여성들이 이미 보여줬다. 그것은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2016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오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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