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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인슈타인이 가장 좋아하는 유머는?

아인슈타인의 복잡한 사생활

 

울름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위에는 아인슈타인 얼굴(왼쪽 아래)이 숨어 있다.


독일 뮌헨에서 자동차로 2시간 동안 내달리면 아인슈타인이 태어났던 자그마한 도시 울름이 나타난다. 눈보라가 오락가락 하는 겨울 날씨에 자동차가 흔들릴 정도의 강풍 ‘오르칸’을 뚫고 울름에 도착하자 높다란 성당이 눈앞을 막아선다.

울름 대성당. 아인슈타인의 흔적은 고풍스런 성당을 장식한 커다란 창에도 숨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위에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같은 위대한 과학자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려져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생가는 어디 있는 걸까. 서울로 치면 명동거리처럼 보이는 ‘반호프 슈트라세’(역전거리)의 모퉁이를 돌자 햄버거 집 앞에 이상하게 생긴 조각물이 눈에 들어온다. 기둥 중에 하나를 잘 보니 “이곳에 1879년 3월 14일 세상에 태어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집이 있었다”는 내용이 독일어로 쓰여 있다. 아인슈타인의 생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완전히 파괴되고 지금은 그 자리에 1982년 스위스의 예술가 막스 빌이 만든 조각물이 우뚝 서있었던 것이다.

바퀴가 안 달렸잖아?

“너무 뚱뚱해. 또 머리통 좀 봐.”

아인슈타인이 태어나자 그의 외할머니가 보인 반응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우람하기도 했지만 큼직한 머리통은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그러진 머리는 정상이 됐지만 각진 뒤통수는 그후에도 변치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 말문이 늦게 트였다고 한다. 본인은 세 살이 지날 때까지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울름의 한 유치원 건물 앞에 있는 ‘아인슈타인 참새’. 새의 날개에 아인슈타인을 상징하는 수식 ‘E=${mc}^{2}$’이 보인다. 참새는 ‘울름의 상징’으로 도시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쓴 편지 내용은 이와는 다르다. 아인슈타인이 태어난지 2년이 조금 넘었을 때 외할머니가 외손자를 만나고 돌아간 후 쓴 편지에는 “아이가 참 기특하더구나. 그 아이의 생각이 어찌나 깜찍하던지…”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말하지 않고 깜찍한 생각을 전달할 수는 없지 않을까.

세돌이 안된 아인슈타인은 여동생 마야가 태어나자 “바퀴가 안 달렸잖아?”라는 깜찍한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심통이 난 얼굴로 이런 말을 했다는데, 그는 동생이 생긴다는 걸 장난감이 생기는 일쯤으로 여긴 것 같다.

바이올린은 아인슈타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을 아들에게 쏟아 부었다. 그에게 바이올린을 사주고 음악선생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하기 싫다고 화를 내며 의자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여선생은 놀라서 도망갔고 새로운 선생이 와서 그를 가르쳤다. 그는 수년간 억지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런 역경을 거친 후 뜻밖에도 아인슈타인은 음악중독자가 됐고 파이프 담배처럼 바이올린을 항상 끼고 살았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를 여동생 마야만큼 즐긴 사람은 없었다. 밤마다 마야는 어머니와 오빠의 이중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공부할 때도 음악의 도움을 받았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다가 느닷없이 “그래, 바로 이거야”라며 문제를 푼 적도 있다고 한다. 그가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는지는 논란거리였지만, 후에 인도주의적 사업을 돕기 위해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콘서트를 갖기까지 했다.

세 여자와 숨겨진 딸

아인슈타인은 울름에서 태어난지 15개월 만에 가족들을 따라 뮌헨으로 옮겨갔다. 1889년에는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그런데 학교의 분위기는 군대처럼 무거웠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분위기였다. 그가 3학년이 됐을 때 아버지는 새로운 사업을 찾아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족을 데리고 갔다. 홀로 남은 아인슈타인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가족 곁으로 온 아인슈타인은 시험에만 합격하면 입학할 수 있는 스위스 취리히 공대에 도전할 준비를 했다. 대학 입시에서 수학과 물리학은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나머지는 엉망이었다. 다행히 물리 부분을 채점했던 하인리히 베버 교수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어떤 고등학교에서든지 졸업장을 받아오면 이듬해 입학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서 40km 떨어진 아라우에 있는 고등학교를 선택하고 그곳 교사인 요스트 빈텔러의 집에 하숙하게 됐다. 그는 자유스런 학교 분위기를 좋아했고 하숙집에서 첫사랑 마리를 만났다. 빈텔러의 딸인 마리는 아인슈타인보다 2살 위였다. 둘은 야외로 나가 희귀종 새를 구경하기도 했고, 틈만 나면 함께 연주를 했다. 마리는 피아노를, 아인슈타인은 바이올린을 맡았다.

봄방학 때 가족 곁으로 온 아인슈타인은 마리와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한번은 그녀의 ‘매력적인 편지’에 고마워하며 “사랑하는 나의 작은 태양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제야 알았다”는 답장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마리는 사랑의 편지를 계속 보냈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리히 공대에 입학해 세르비아 여학생 밀레바 마리치를 만났기 때문이다. 둘은 이방인으로서 서로에게 의지했던 것 같다.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를 ‘나의 귀여운 병아리’라고 부르면서 “당신을 생각하지 않고는 이 유감스런 사람들의 무리에서 더 살고 싶지 않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결국 대학 졸업 무렵에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결혼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밀레바가 나이가 너무 많고 여성적이지 못하며 건강하지도 않아 며느릿감으로 완전히 실격이라고 생각해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4살 위였고 다리를 약간 절었다. 둘은 1903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그후 한스와 에두아르트 두 아들을 두었다(1986년 공개된 두 사람 사이의 편지들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결혼 전 둘 사이에는 리제를이라는 딸이 이미 있었고 이 딸은 두살 때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었고 밀레바와 시어머니의 갈등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사이가 멀어졌고 아인슈타인이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되던 해인 1919년에 이혼했다. 두 아들은 밀레바가 키우게 됐고, 아인슈타인은 딸 둘을 둔 육촌 누이 엘자와 곧바로 결혼했다.

1922년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타자 상금 일부를 밀레바에게 이혼 위자료로 줬다.


아인슈타인하우스에 자리하고 있는 울름 개방대학 2층에 마련된 아인슈타인 관련 전시물. 어릴 때부터 노년까지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상대성이 뭐꼬?

근엄한 과학자에게 유머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아인슈타인은 연구를 하다가 짬이 나면 유머를 얘기하기 좋아했다. 한번은 영국 태생의 프린스턴대 인류학자 애슐리 몬터규가 두 유대인 재단사에 대한 유머를 들려주었다. 이 유머는 아인슈타인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몬터규는 유대인 어투로 말했지만 편의상 여기선 경상도 버전으로 간다.


러시아 스파이 마구에리타 코넨코바와 아인슈타인. 그는 코넨코바가 러시아로 돌아가기 전에 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시계는 1998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 나왔다.


한 사람이 우연히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들먹이자 다른 사람이 물었다. “아인슈타인이 누꼬?” “이런 문디 자슥! 아인슈타인도 모르나? 갸는 세계 최고의 과학잔기라.” “우예 최고가 됐노?” “상대성을 밝혔다 안 카나.” “상대성이 뭐꼬?” “문디 자슥, 들어봐라. 네 무릎에 마누라가 걸터앉았다 캐 바라. 1분이 한시간 같을기라. 하지만 이쁜 가시나가 네 무릎에 앉았다 캐 바라. 한시간이 1분 같을기라. 이게 바로 상대성이라 카이.” “그라문, 갸는 그걸로 밥 벌어 묵고 사나?”

아인슈타인의 연구 조수 중에는 1948~ 1949년에 일했던 헝가리 출신 존 케메니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즐기는 유머를 되풀이해 얘기했기 때문에 케메니는 아인슈타인이 가장 좋아하는 유머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건 바로 수리공에 관한 유머였다.

한 남자가 자기 차를 수리하러 갔다. 수리공은 찬찬히 살펴보더니 차를 한번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차가 멀쩡하게 굴러갔다. 차 주인은 흐뭇해했고 수리공은 25달러(1940년대 후반엔 상당한 거금)를 달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서 항목별 청구서를 요구하자 수리공은 ‘발길질 25센트, 발길질할 장소 발견 24달러 75센트’라는 청구서를 써주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유머를 좋아한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발길질이 아니라 어디에 발길질해야 할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꺼내지 마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영국의 아서 에딩턴이 일식을 관측하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을 검증한 일은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영국 천문학자가 독일 학자의 이론을 증명했다는 사실 때문. 또 전세계 평화를 지지하는 언론인들은 이 사건을 되찾은 평화의 한 상징으로 소개했다. 에딩턴도 아인슈타인에게 “이 사건은 과학 부문에서 영국과 독일의 유대관계를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전쟁이 한창이던 1914년 자신의 평화주의적 신념을 선포했다. 당시 베를린의 모든 지식인은 독일 군대와 그 지휘자를 지지하고 독일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탄원서를 내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유럽인에게 보내는 호소’를 작성해 지식인들이 모두 나서서 고삐 풀린 민족주의자들의 광분을 끝내자고 촉구했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후 유대인 학자들은 급속히 대학에서 쫓겨났고,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일조차 금기시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인슈타인은 프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 사직서를 보내며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939년 8월 2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은 특히 유명하다.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핵폭탄 제조 계획에 착수해야 한다는 걸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핵폭탄을 개발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며 태평양 전쟁을 끝냈다. 하지만 수십만의 희생자가 따랐다. 그래서인지 아인슈타인은 1945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핵 관련 지식인 비상대책회의’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또 당시 만연했던 매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에 대한 미국 지식인들의 저항에도 적극 동참했다. 변절자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았던 공산주의자 물리학자 부부 에설과 줄리어스 로젠버그 사건에 적극 개입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동료과학자들에게 호소문을 보내기도 했다.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FBI의 감시 하에 들어갔다. FBI는 시간과 돈을 낭비하며 아인슈타인이 ‘위험한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풍향계 거리 더 어울릴듯

아인슈타인과 나치의 좋지 않은 인연은 울름에도 숨어 있다. 1922년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수상한 직후 울름 시위원회는 그를 기리기 위해 한 거리에 ‘아인슈타인 거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후에 나치가 이를 ‘피히테 거리’라고 이름을 고쳤고 독일이 전쟁에 패하자 원래 이름대로 돌아왔다.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제 생각에는 중립적인 이름, 예컨대 ‘풍향계 거리’가 어울릴 것 같네요. 시대가 바뀌어도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으니까.”

아인슈타인은 울름에서 15개월밖에 살지 않았지만 울름과 아인슈타인의 인연은 이보다 더 길다. 1929년 아인슈타인이 50번째 생일을 맞아 ‘아벤트포스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태어난 도시는 마치 생모로부터 받은 혈통처럼 뭔가 독특함을 삶에 걸어줍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울름 곳곳에서 인용되고 있다. 또 1949년 울름 시가 아인슈타인 70세 생일 기념으로 명예시민을 수여하겠다는 제의를 했을 때 그가 비공식적으로 거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한 사람이 말년에 아인슈타인에게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건 모차르트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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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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