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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술과 철학을 뒤흔든 상대성 이론

상대성이론이 바꾼 세상

아인슈타인은 유명한 물리학자이기도 하지만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처칠, 드골, 루스벨트 같이 영향력 있는 정치인, 시인 타골, 철학자 러셀, 사르트르, 화가 피카소, 조각가 헨리 무어 그리고 지휘자 번스타인 등을 제치고 20세기의 인물로 선정된 것은 그의 영향력을 우리사회 구석구석에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입체파 미술에 기여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을 보면 죽은 시계가 해변에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정지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림 제목처럼 기억이 각인돼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시간이 정지할 수 있을까.


마그리트의 ‘거울을 보는 남자’. 앞이 비쳐야 할 거울에 뒷모습이 비친다. 마그리트는 얼굴의 앞뒤가 뒤섞인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이는 상대성이론에서 빛의 속도로 달리면 길이가 사라져 앞과 뒤가 합쳐지는 현상과 비슷하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멈추고 길이가 없어진다. 이런 물리학 개념은 미술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달리가 상대성이론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않았겠지만 달리가 살았던 시대는 상대성이론이 과학계에 혁명을 일으키던 때였다. 이런 분위기는 달리와 같은 미술가들에게도 사고의 전환을 일으켰다. 마그리트의 그림 ‘유리의 집’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을 보면 두께(길이)가 없어지고 뒷모습이 앞에서 보여 얼굴과 뒷머리가 하나로 합쳐져 있다. 이 그림에서도 상대성이론에 의한 길이 수축 원리가 강하게 투영돼 있다. 실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기차가 빛의 속도의 2/3수준으로 달리면 기차가 정지할 때 보다 짧게 보인다. 만약 빛의 속도로 모든 물체가 달린다면 긴 물체도 길이는 없어지고 맨 앞과 뒤가 붙은 평면으로 보인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에서 새로운 차원을 발견했다면 피카소가 속한 입체파 화가들은 화폭에서 새로운 차원을 발견했다.


상대성이론의 영향은 파블로 피카소 등 입체파 화가들에게 가장 많이 나타난다. 피카소는 1907년 여름 프랑스 파리에서 ‘아비뇽의 여인들’을 완성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인정받을 때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듯 피카소의 그림도 1920년대초에 가서야 걸작으로 인정받았다.

‘아비뇽의 여인들’을 보면 피카소는 사각의 큐빅 모양으로 입체감을 표시했다. 또 한쪽 면에서만 대상을 보고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본 모습을 하나의 평면에 합쳤다. 아인슈타인이 3차원 공간에 시간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더해 4차원 시공간 개념을 만들었듯 피카소는 새로운 차원을 첨가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피카소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상대성이론을 배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게 상대성이론의 영감을 주었던 한 과학자가 피카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는 비유하자면 같은 정신적 스승의 사제 사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과학자는 프랑스의 최고 과학자로 불리던 앙리 푸앵카레였다.

피카소는 파리에서 후대에 ‘피카소 패거리’로 불리는 사람들과 카페에서 과학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어느 날 그들로부터 앙리 푸앵카레가 ‘과학과 가설’에서 다룬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4차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 역시 ‘과학과 가설’의 독일어 번역판을 읽었다. ‘아인슈타인, 피카소’라는 책을 쓴 런던칼리지대 과학철학과 아서 밀러 교수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것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서 깨달았고 피카소는 화폭 위에서 깨달은 것이다.

당시 화가들은 4차원을 3차원에서 표현하려고 했다. 피카소의 작품 가운데 ‘마라부인’을 보면 눈 속에 눈이 있는 영상을 볼 수 있다. 이는 4차원의 3차원 투시도를 암시한다. 만일 4차원의 물체가 있어서 3차원에 투영한다면 입방체 속에 입방체가 있는 모습이 될 것이다.

피카소나 달리 같은 예술의 천재들이 4차원의 수학을 알았으리라 믿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천재적인 영감이 이런 표현을 하게 했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뒤바뀐 물질과 시공간의 철학

상대성이론은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는 지은이가 객관적인 실재를 그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의 영향으로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회의가 일어났다. 시공간이 관찰자에 의해 달라지듯 대상은 보는 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문학에서는 저자의 서술 대신 인물의 서술인 독백 형식이 강해진 소설이 나온다. 이를 ‘의식의 흐름’기법이라고 하는데 ‘율리시즈’를 쓴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대표적이다.

실제로는 어떤 소설은 상대성이론보다 먼저 나왔다. 아인슈타인이 당시 철도와 시계를 보며 상대성이론에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듯 시공간에 대한 개념의 변화는 당시 거대한 사회적 흐름이었다. 이런 사회적 흐름은 상대성이론과 문학, 미술에 함께 영향을 미쳤으며 서로서로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아인슈타인의 가장 큰 업적을 철학적인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대한 ‘존재’의 형식을 송두리째 새로 일깨웠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만물과 인간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시간 따로 공간 따로 편을 갈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 4차원 시공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물론자 레닌은 상대성이론의 도전에 대응해 새로운 물질의 개념을 제시했다.


아인슈타인 이전 사람들은 시간이란 무한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엇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을 흔히 쓴다. 그러나 시간이 물처럼 어떤 실체가 흐르는 것인가. 신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의 바깥 어느 곳에 계신단 말인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시간이란 영원할 수도 있고 시작과 끝이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신은 그런 시간을 초월해 시간밖에 있는 그 어떤 ‘존재’라는 합리적인 철학을 시사하기도 한다.

철학사에서는 19세기말까지만 해도 물질은 불변하고 영원한 것 또는 모든 사물들의 근원이 되는 변하지 않는 기체(基體)로 보는 것이 주류였다. 20세기를 전후한 현대 과학자들이나 당시 풍미했던 철학의 한 사조인 유물론도 물질은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으로 이러한 사고방식은 큰 타격을 받았다. 물질이 에너지로 사라지거나 에너지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절대성이 훼손된 것이다. 이 때문에 ‘물질이 사라진다’든가 ‘유물론은 죽었다’라는 다소 과격한 주장들도 나왔다. 이런 위기는 상대성이론 직전부터 당시 과학에서의 새로운 발견들 때문에 벌써 시작됐다.

러시아의 유물론자 레닌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특수상대성이론이 발표된 것과 같은 해인 1905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책을 써서 물질의 철학적 개념을 새로 정의했다. 즉 물질의 변환 가능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상대성이론이 발표된 이후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물질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철학계에서 시간과 공간은 고대 이래로 일반적으로 인간이 경험하기 이전의 것, 물질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해석됐다. 뉴턴은 이런 영향을 받아 시간과 공간이 물질보다 앞서 존재하고 신의 직관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독일 철학자 칸트도 시간을 인간의 경험을 규정하는 절대적 관념으로 보았다. 모두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상대성이론이 나오면서 시공간은 관측자에 따라 변할 수 있고 물질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런 사상은 독일의 카시러 등 신칸트학파에 속한 일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아인슈타인의 학문에 대한 태도는 또 다른 대철학자 칼 포퍼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며 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 실험 3개를 제시했다. 만일 실험이 잘못되면 자신의 이론은 틀렸다는 것이다. 젊은 포퍼는 이 사건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이처럼 ‘반증가능성’을 갖고 있는 이론만이 과학적인 이론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 주장은 ‘반증주의’라는 새로운 과학철학이 됐다.

특수상대성이론에 영향을 받은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1916년 ‘관점주의’ 철학을 새로 발표했다. 그는 관점의 수만큼 현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관점주의는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다.

상대적 시간으로 본 기독교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은 세상이 약 5000년 전에 창조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룡은 그때 어디에 있었는가. 공룡 화석이 나오는 지층은 적어도 수천만년이 넘는데 모순이 아닐까.

예전에 읽은 ‘신의 과학’(Science of God)이라는 책은 상대성이론을 이용해 이런 모순을 피해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일반상대론에 의하면 중력이 강한 곳을 보면 시간이 늦게 흐른다. 예를 들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사람을 지구에서 관측하면 무한히 천천히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빨려 들어가는 당사자의 시간으로는 몇 초밖에 되지 않는다.

현대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는 탄생 당시 많은 에너지가 뭉쳐 있었고 밀도 역시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중력이 강하고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1억년이 그 상황의 1초일 수도 있다. 즉 중력이 강했던 창세기의 하루는 지금의 시간으로 볼 때 100억년 일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120억년이 신의 잣대로 이야기할 때는 5000년일 수 있다. 동양에서 신선나라의 하루가 하계의 3000년이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여러 불교적인 개념을 상대성이론에 맞춰 설명하는 시도가 있다. 이렇듯 상대성이론은 종교와 과학의 화합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스타트랙’ 등 SF영화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을 뿐만이 아니라 그의 영향력은 21세기 과학을 선도하고 있다. 거시적인 이론인 상대론과 미시의 세계를 지배하는 양자론을 조화하려는 노력이 벌써 초끈이론으로 그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21세기에도 큰 변화를 주도하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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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김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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