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아인슈타인은 20세기 최고의 두뇌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인가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이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그의 말처럼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평가는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성공 뒤에는 수많은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가 낳은 풍성한 연구 결과에 반대하는 입장들 역시 그의 성공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무명 청년이었던 아인슈타인의 논문에서 독창성을 발굴하고 찾아낸 플랑크나 학문적인 파트너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그로스만과 아내 밀레바, 외로웠던 그의 말년을 함께 한 괴델이 없었다면 그의 뛰어난 연구 업적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이라는 거인을 세운 숨은 공로자들, 아인슈타인의 사람들을 만나봤다.
취리히에서 만난 평생지기
1896년 취리히 연방공대에 입학한 아인슈타인은 학문 연구뿐 아니라 삶에 중요한 세 사람을 만난다. 마르셀 그로스만과 미셸 안젤로 베소, 그리고 훗날 아내가 될 밀레바 마리치가 바로 그들이다.
부다페스트 태생의 그로스만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해에 취리히 연방공대 수학과에 입학해 기하학 학위를 받았다. 친구인 아인슈타인에 비해 그는 매우 성실한 편이었다. 수업을 착실하게 들으면서 꼼꼼하게 노트를 적는 모범생의 전형이었다. 그로스만은 당대 저명한 수학자였던 민코프스키를 비롯해 당시 재직 중이던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의 수업을 꼼꼼히 챙겼다. 당시 그가 작성한 노트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을 만들 때 토대를 다져줬다. 그로스만은 그 이후에도 아인슈타인에게 수학적인 조언을 계속했다.
그로스만은 아인슈타인에게 또 하나의 도움을 줬다. 아인슈타인이 대학 졸업 직후 직장을 못구하자 그로스만의 아버지가 베른에 있는 스위스 특허국에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1911년 프라하에 2년 계약으로 가 있던 아인슈타인에게 모교에 자리를 잡아 부른 것도 당시 취리히 연방공대 교수로 있던 그로스만이었다. 당시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초빙 제안을 받고 있던 터였지만 아인슈타인은 죽마고우 그로스만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런 그로스만의 헌신적인 도움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과 ‘E=mc2’을 발표하던 1905년 박사학위논문을 친구 그로스만에게 헌정했다.
1912년 8월 연방공대의 교수가 돼 취리히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그로스만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한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공동연구는 최종적인 방정식을 얻지 못한 채 끝나 버렸다. 그로스만과 아인슈타인의 우정에 대해서는 아미르 액설이 쓴 ‘신의 방정식’에 잘 소개돼 있다.
과학사가들은 종종 아인슈타인의 사상적 발전이 두가지 요소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과학사에 관한 튼튼한 기초와 친구들과의 토론이었다. 특히 친구들과의 토론은 뉴턴을 비롯해 다른 물리연구 업적을 재검토하는데 필요한 추리와 통찰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됐다. 6년 선배이자 특허국 동료였던 베소는 바로 그런 친구였다. 무료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에 열정을 놓치지 않았던 데는 베소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905년 5월 어느날 아인슈타인은 베소와의 대화 도중 순간적으로 자신이 그때까지 시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차역마다 설치된 시계를 동기화시키는 기술에 관한 얘기였다. 서있는 사람과 직선 등속운동을 하는 사람이 보는 시간의 관계는 두 사람이 지닌 시계 사이의 관계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는 훗날 특수상대성이론의 기본 아이디어가 됐다. 당시의 상황을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내가 베소에게 어떤 문제에 대한 도움이 필요하달라고 말하려던 참에 그 생각이 내 머릿속을 들어왔다. 그리고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답을 알게 됐다. 나는 집으로 달려갔고 다음날 베소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언제나 그렇게 베소는 아인슈타인의 후견인이자 토론 상대였다. 특히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이론 완성에 영향을 미친 책들을 권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아인슈타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던 에른스트 마하의 ‘역학’ 역시 베소가 추천한 책이다. 그들은 물리학의 철학적인 기초에 대해 오랫동안 토론하길 즐겼고 이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생각과 이론에 관해 언제나 베소와 의논했으며 그의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빛을 볼 수 있었던 데는 또 한명의 숨은 조력자의 역할이 컸다. 그는 바로 첫번째 아내였던 밀레바 마리치다. 비록 그녀의 평가대로 ‘빵점짜리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아인슈타인이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밀레바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르비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밀레바는 어릴 때부터 자연과학과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당시 자연과학의 중심지였던 스위스로 유학할 수 있었던 그녀는 1896년 취리히공대에 입학한 아인슈타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당시 밀레바는 수학 과학부의 홍일점이었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과학도였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을 만난 이후 그녀의 인생은 아인슈타인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1903년 결혼 직후부터 밀레바는 남편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수학에 약했던 아인슈타인 대신 상대성 이론에 포함된 복잡한 수학 문제는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는 소문이 떠돌 만도 했다.
그러나 세상의 관심이 남편인 아인슈타인에게 쏠리면서 둘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돌아가고 아인슈타인 역시 새 연인을 사귀면서 부부 관계는 파탄을 맞았다.
상대성이론의 후원자들
1905년 당시 박사 학위가 없었던 아인슈타인으로서는 논문을 인정받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물리학 연보’에 보낸 첫번째 논문이 오늘날 원자물리학에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데는 몇몇 후원자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1900년 양자 이론을 창시한 막스 플랑크는 특수상대성이론의 중요성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플랑크는 당시 무명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했던 ‘물리학 연보’의 편집인으로, 베를린대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었던 독일 과학계의 거물이었다.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받아 본 플랑크는 곧 이 젊은 학자의 논리에 매료됐다.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의 의의를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견주었을 정도였다. 곧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적극적인 옹호자이자 후견인이 됐다.
플랑크에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물리학에서의 보편성과 단순성을 뒷받침해 준다는 의미에서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이론이었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이런 공개적인 지지에 그치지만은 않았다. 그 자신도 1906~1907년 사이에 최소 작용의 원리에 바탕을 둔 상대론적 역학을 발전시키는 등 초기의 상대성이론 발전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의 제자들도 이런 스승의 영향력 아래 상대성이론을 좀더 명쾌한 형태로 발전시켜 나갔다. 1906년부터 1914년까지 플랑크 밑에서 나온 학위 논문 가운데 무려 3분의 1은 상대론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1911년 플랑크의 제자인 막스 폰 라우에가 집필한 최초의 상대성이론에 관한 교과서가 출판된 것을 전후해 특수상대성이론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분명한 형태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편 특수상대성이론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한 사람은 플랑크 뿐만 아니다. 상대성 이론을 처음 접한 영국 과학자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게다가 1914년에서 1918년까지는 전쟁 중이어서 독일 학술 잡지가 영국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영국에서 상대성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을 왕립 천문학회 간사였던 아서 스탠리 에딩턴이었다. 그는 전쟁 중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드 지터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입수한 뒤에 1918년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영국 물리학회에 기고했다.
에딩턴은 당시 영국 천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프랭크 다이슨과 긴밀한 관계였다. 다이슨은 상대성이론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에딩턴으로부터 상대성이론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1919년 일식 때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관측대를 파견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입김으로 영국에서 ‘아인슈타인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관측대가 조직됐고, 그 해 5월 일식 관측대는 아인슈타인 효과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사진을 얻는데 성공했다. 당시 관측결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확실하게 입증하기에 너무 오차가 커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그해 11월 긴급 소집한 왕립학회와 왕립천문학회 합동 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손을 들어줬다.
이런 결정이 나온 데는 영국 천문학을 대표하는 다이슨과 에딩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11월 7일자 런던 타임스는 ‘과학의 혁명, 새로운 우주론, 뉴턴주의 무너졌다’는 제목의 기사를 대서 특필해 아인슈타인은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플랑크와 에딩턴이 ‘작심을 하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건져 올렸다면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좀다른 경우다. 민코프스키는 당시 정수론에 기하학적 방법을 도입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연구로 유명한 인물이다.
취리히 연방공대에서 아인슈타인은 아돌프 후르비츠와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같은 당대 저명한 수학자들에게 수학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직접적인 실험에 매료돼 대부분의 시간을 물리 실험실에서 보냈으며, 남는 시간은 집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수학 수업을 좋아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민코프스키에게도 아인슈타인은 기대 미만의 문제아였다. 그는 훗날 “아인슈타인은 내 수학 수업시간에 아주 게으른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는 “게으른 개”라는 표현을 썼다는 주변의 증언도 있다. 아마도 아인슈타인은 이때부터 물리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상당히 낮게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조우는 우연하게 이뤄졌다. 민코프스키는 상대성이론에 수학의 불변 이론과 함께 4차원 시공 좌표를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일반적으로 민코프스키의 시공세계로 불린다. 물론 민코프스키의 상대론 등장 이전에 이미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되는 4차원 좌표를 사용한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푸앵카레였다. 하지만 푸앵카레는 4차원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반면 민코프스키는 4차원 세계가 절대적이고 실재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을 폈다. 아인슈타인 역시 이 4차원 시공 세계의 절대성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훗날 자신의 이론을 기하학적으로 널리 알리는데 사용됐던 기하학적인 개념의 기초가 됐다.
현재 미국 프린스턴고등연구소 프리만 다이슨 교수도 “푸앵카레의 이론이 덜 알려진 이유는 아인슈타인만큼 기하학적으로 풀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민코프스키의 역할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무관심 했던 아인슈타인도 후일 민코프스키의 업적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진실을 향한 끝없는 논쟁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둘러싼 논쟁은 끊임없이 반복됐다. 한쪽에서는 ‘인류 철학사와 과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라는 찬사를, 다른 한쪽에서는 ‘형편없는 사기꾼’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을 적당히 포장한 사람’이란 비난을 듣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의식한 듯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렸다. “정치는 순간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방정식은 영원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천재일지라도 욕망을 지니고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부분이 있는 법. 이 무렵 닐스 보어와 그의 제자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태도가 이와 비슷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양자 이론을 둘러싸고 보어와 매우 오랫동안 논쟁했다.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은 역학적·전자기적으로 불안정했지만, 보어는 발전하고 있던 새로운 양자론을 도입함으로써 러더퍼드의 원자에 안정성을 부과했다. 보어의 이론이 새로운 분광학 실험과 다른 실험들에 의해 확증됐을 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그것이 ‘엄청난 업적’임을 알게 됐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나는 아직 실재의 모델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사물이 발생할 개연성만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를 표현하는 그런 이론은 가능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보어의 초기업적을 크게 칭찬했지만, 양자역학은 원자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고전물리학의 합리적 일반화’라는 보어의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두 사람은 여러해 동안 물리학의 근본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고, 때로 이 자리엔 가까운 친구였던 레이덴대 이론물리학교수 파울 에런페스트도 간혹 참가했으나 결코 근본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론에 대해 “확률만을 제시하는 양자론은 불완전하다”고 하면서 “신은 세계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토론에 대한 보어의 생각은 건설적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도전적 반대가 내 관념을 발전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했으며 깊고 지속적인 인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훗날 물리학자 아브라함 파이스는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영원한 정신적인 논쟁상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보어는 아인슈타인이 죽은 후에도 마치 아인슈타인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그와 논쟁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보어는 자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비판을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한편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형성되던 시기에 윌리엄 톰슨이 마지막까지 맥스웰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확립돼 가는 동안에도 이를 마지막까지 반대했던 사람이 있었다.
고전 전자기 이론을 끝까지 고수한 막스 아브라함이다. 그는 상대성이론이 지니는 가설적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막스 아브라함은 1897년 22세의 나이로 당시 거물급 물리학자인 플랑크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1900년부터 괴팅겐 대학의 강사로 근무하면서 아인슈타인보다 3년 먼저 속도 증가에 따른 전자 질량 증가현상을 고전 전자기학으로 설명했다. 20대에 고전 전자기학 최고 권위자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자신의 연구 업적과 상관없는 부분에서 꼬이기 시작했다. 이 젊은 천재 물리학자는 누구에게나 날카로운 비판을 내놓곤 했는데, 당시 독일 과학의 대부였고 상대성 이론을 옹호하던 스승인 플랑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물급 인물에 대한 비판은 교수 임용에 나쁜 영향을 미처 결국 그는 독일 어느 대학에도 갈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과 이탈리아 대학을 전전하다 겨우 독일 아헨공대 교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헨으로 가던 중 뇌종양으로 쓰러져, 젊은 나이에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플랑크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서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고전 전자기론을 고수한 한 천재 물리학자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생애 마지막을 함께 한 정신적 동반자
한편 프린스턴에서 한적한 말년을 보내던 아인슈타인의 삶에 끼어든 사람이 있으니 바로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쿠르트 괴델이다.
두사람이 안면을 익히게 된 것은 1933년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교분은 1942년에서야 시작됐다.
오스발트 페블렌과 파울 오펜하이머의 소개로 만난 두사람은 1955년 아인슈타인이 죽을 때까지 거의 매일 만나서 얘기를 나눴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내가 (프린스턴고등)연구소에 오는 것은 단지 괴델과 함께 집으로 걸어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각별했다. 두 사람은 나무 사이로 나있는 귀가길이나 괴델의 연구실에서 긴시간 동안 철학, 물리학, 정치 등 폭넓은 주제를 얘기했다. 그 중에는 연구에 관한 것들도 있었지만 각자 입장이 서로 달랐다. 그러나 둘 사이에 토론은 계속됐다고 한다. 다른 견해를 지니긴 했어도 아인슈타인은 자기 생각을 주저없이 얘기하는 괴델을 꽤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과 괴델이 거쳐온 삶을 살펴보면 유사한 점이 많다. 둘 다 중부유럽에서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성장했고 각자 가장 유명한 연구 업적이 완성된 곳도 그곳이었다. 초등논리의 완전성과 수학의 불완전성을 주제로 세상을 주목시킨 논문을 발표한 나이도 1905년 당시 아인슈타인의 나이보다 두 살 아래인 점도 둘만의 공통점이다.
프리만 다이슨 교수가 본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 아인슈타인만의 작품 아니다”
뜻한대로 행해도 도를 잃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의 나이를 이미 오래전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일까. 8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프리만 다이슨 교수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피력해나갔다. 이론물리학자인 그는 양자 전자기학의 완성에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통계물리와 우주물리, 핵물리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1953년부터 프린스턴고등연구소에서 근무한 그는 종종 복도에서 아인슈타인과 마주쳤다. 다음은 청년 시절 다이슨 교수가 말하는 아인슈타인의 말년.
프린스턴에서 그의 생활은
그는 매우 상냥한 사람이었지만 어떤 점에선 터프했다. 터프했던 것은 이혼 문제로 그랬던 것 같았다. 세미나와 강의를 종종 했지만 학문적으로 젊은 연구자들과 대화는 거의 없었다.
프린스턴 정착 이후 연구가 없다
맞다. 연구에 몰두하지 않았다. 정치적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를 어떻게 평가하나
상대성이론은 현대과학을 탐구하는 일종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혼자 힘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과학자이긴 하지만 그만큼 뛰어난 과학자들도 있었다. 20세기를 뒤흔든 컴퓨터의 아버지 폰 노이만도 그중 하나다.
다이슨 교수와 인터뷰는 다음달호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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