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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1929년부터 ‘타임’지 표지를 5번이나 장식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 원자폭탄 그림과 함께 등장한 1946년 7월 1일자 타임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세계에 12명밖에 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실험적으로 검증된 직후인 1919년 11월 10일자 뉴욕타임스는 이런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하지만 정말 그의 이론이 너무 어려워 이를 이해한 사람이 전세계를 통틀어 12명밖에 되지 않았을까? 과연 당시 동료 과학자들조차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화 깨기

아인슈타인이 천재 중의 천재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천재성을 등에 업고 상대성이론의 난해함을 선전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후계자들이 아니라 언론이었다.

단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한 사람이 전세계를 통틀어 12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그가 1905년에 내놓은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꽤 빠른 속도로 수용됐다. 플랑크, 로렌츠, 푸앵카레, 민코프스키 같은 당대 유수 물리학자들은 특수상대성이론 그 자체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다른 과학자들은 상상할 수도, 생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이론을 만든 사람이라는 생각은 곧 신격화로 이어지기 십상이며, 아인슈타인을 신격화할수록 그의 천재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의미가 없어진다.

지난 40년 동안 아인슈타인의 뇌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아인슈타인 같은 세기의 천재의 뇌는 일반인과 무언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인슈타인의 뇌가 성인 남성 평균치보다 70g 가볍고, 뇌의 신경세포를 받쳐주고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신경교세포가 더 많으며, 뇌의 위쪽 가운데 부분과 양쪽 옆부분을 가르는 커다란 주름인 실비우스 주름이 보통 남성들보다 커 두정엽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사실들이 알려졌다.


아인슈타인의 뇌 사진. 아인슈타인 사후 그의 뇌는 연구를 위해 미국 프린스턴 병원의 토머스 하비 박사에게 인수됐다.


뉴욕타임스는 1999년 실비우스 주름 연구 결과를 인용해 아인슈타인의 뇌구조가 일반인과 크게 달라 그의 천재성은 타고난 것이었다고 보도하면서 다시 한번 아인슈타인을 신격화시켰다. 하지만 현재 전문가들은 아인슈타인의 뇌가 크게 보면 보통 사람의 뇌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얘기한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이 보통 사람들보다 특출한 뇌 때문은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천재적 발견의 과정은 동시대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것이 아니었으며, 또 일반인들과 차원이 다른 뛰어난 뇌 덕분도 아니었다.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을 만드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천재성은 오히려 평범하고 기본적인 것에서 나왔다.

사소한 문제에 10년을 매달리다

아인슈타인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을 때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똑똑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꼴찌에 가까운 ‘불량학생’이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높은 평점을 받고 대학을 졸업했지만, 학점보다는 자신이 관심있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학문적 역량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던 학생이었다. 특히 한번 생각한 문제는 의문이 풀릴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특수상대성이론도 그렇게 탄생했다.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의 단초가 되는 문제를 처음 생각했던 것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빛과 관련해서는 갈릴레오의 상대성이론이 잘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 고민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푀플이라는 전기공학자가 쓴 ‘맥스웰의 전기이론 입문’이라는 교과서를 읽으면서 도선의 움직임과 자기장의 움직임이 단순한 좌표계의 차이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막상 푀플의 교과서에서 이 ‘사소한’ 문제를 붙들고 고민했던 사람은 당시 아인슈타인이 유일했다.

대학을 졸업을 한 뒤 그는 대학에 조교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임시직 교사와 실업 상태를 전전했다. 그렇지만 힘든 와중에서도 그는 이 문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1901년 9월 친구 그로스만에게 편지를 보내 물체의 상대운동에 대한 실험을 얘기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마리치에게 대학교수가 자신의 실험을 칭찬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또 그는 1903년 5월에 베른에서 열린 지방물리학회에서 전자기학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다.

결국 1904년 말엽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일정한 것이 아니라 관찰자에 따라 달라진다고 가정했을 때 모순이 발생함을 깨닫고 빛의 속도가 어느 경우에나 일정하다고 확신하게 됐다. 전자기학의 문제, 빛의 운동에 대한 문제, 갈릴레오의 고전적 상대성이론의 문제 등이 얽혀있는 채로 그는 1905년을 맞이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따지자면 10년이 넘게 이런 문제에 골몰해 있던 셈이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맥스웰 이론을 베버 교수가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학시절 내내 그를 ‘베버씨’라고 부른 고집도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고집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의 이런 놀라운 고집과 끈기가 바로 천재성의 첫번째 비밀인 것이다.

지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다

아인슈타인은 ‘독불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주변의 지적, 인적 네트워크를 충분히 활용해 자신이 궁금해 하던 난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물론 그가 사교적인 사람이거나 친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보다 물리학 실험에 몰두하고 추상적인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자신의 지적 호기심과 학문적 탐구를 촉진하는 네트워크를 만들고 이를 잘 유지했던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의 천재성의 두 번째 비밀이다.

아인슈타인이 고등학교 시절 집에 머물렀던 유태인 의학도 막스 탈미도 그의 지적 폭을 넓힌 네트워크의 한명이었다. 탈미는 그에게 독일 철학자 엠마뉴엘 칸트의 철학을 가르쳤다. 칸트의 철학에 심취한 아인슈타인은 자연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이 그 뿌리에서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자연의 단일성을 신봉하게 됐고, 이러한 철학적 방법론은 여러 가지 모순적인 현상을 그 근원을 파헤침으로써 해결했던 그의 특수상대성이론 연구에서 뚜렷하게 표출됐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친구가 된 같은 학과의 그로스만, 마리치, 그리고 기계공학을 전공하던 베소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마리치와의 관계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연인에서 부부로 발전했다. 마리치는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1905년에 특수상대성이론을 내놓을 때까지 어려운 기간 동안에 동료로서, 연인과 부인으로서 아인슈타인을 지지하고 자극했다.

그로스만은 자신의 노트를 아인슈타인에게 빌려줌으로써 아인슈타인이 대학 졸업 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는 나중에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의 수학과 교수가 됐는데,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 때 자신이 알고 있던 고등수학 지식을 그에게 제공하고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등 그의 인생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

베소는 아인슈타인이 직장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에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아인슈타인을 베른의 특허국에 취직시켰다. 특허국에 취직한 뒤 아인슈타인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연구에 매진했다. 베소는 수시로 그의 학문적 고민을 들어주는 든든한 조언자가 됐고, 1905년 5월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베소와 토론을 하던 중 특수상대성이론을 완성하는 결정적 단서를 포착했다.

특히 아인슈타인이 조직한 ‘올림피아 아카데미’는 젊은 아인슈타인을 계속 지적으로 자극했다. 대학교수는커녕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조차 없었지만 이들은 모두 당시 물리학을 혁신하겠다는 꿈을 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에 몰입했고,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논문을 쓸 때마다 그 논문에 대해서도 깊이 논의했다.

추상적 시간을 구체적 시계로 바꾸다

1904년 말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항상 일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왜 빛의 속도는 항상 일정한가’라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빛’을 발한 것은 바로 자신의 사고실험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모순을 발견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제로 실험을 하기 보다는 사고실험을 택했다. 특히 사고실험을 할 때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사물로 바꿔 상황을 꾸몄다. 전기기구 제조업 집안 출신인 아인슈타인은 어린시절부터 기계와 친했기 때문에 추상적인 전자기장 대신 전자석을, 에테르 대신 기계적 진동을 생각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국 그는 갈릴레오의 상대성이론과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모순 사이에 어느 쪽을 포기할지 고민할 때도 추상적인 시간 대신 시계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이는 그가 스위스 특허국에서 특허 심사관으로 일했던 경력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도시를 잇는 열차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러 도시들 간에 시간을 맞추는 일이 점점 더 중요해졌고, 특허국에는 시계에 대한 특허가 빈번히 접수됐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작용했다. 도시를 정지해 있는 좌표계로 생각하고 시계로 두 도시, 즉 두 좌표계의 시간을 맞추는 일을 생각했다. 이로부터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에 도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끌어냈다.

만약 두 좌표계 중 하나가 움직이고 있다면 시계를 어떻게 맞출까?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과학자들은 시간이 운동과는 무관하게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것이라고 간주했는데, 대체 두 좌표계에서 시간이 같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느 한 좌표계에서 ‘동시’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이 다른 좌표계에서는 ‘동시’가 되지 않는다면?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시계를 통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주목함으로써 자신의 고민을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 구체적 사물인 시계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이 한 논문에서 결합된 것이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시켜 가시화하는 것, 이로부터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결합하는 능력,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의 세 번째 요소다.


최후의 아인슈타인 연구 흔적을 보여주는 칠판.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천재성은 아직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고정관념을 버리다

빛과 에테르의 문제를 고민하던 사람이 아인슈타인뿐인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유수한 물리학자들이 이와 연관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 중 유럽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로 꼽히던 프랑스의 푸앵카레와 네덜란드의 로렌츠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나오던 1905년 무렵에 아인슈타인과 거의 비슷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특히 로렌츠는 1895년에 운동하는 물체의 길이가 수축한다는 ‘수축가설’을 주창했으며, 이 수축가설을 통해 빛의 속도가 일정함을 보이는 마이켈슨-몰리의 실험 결과를 설명했다. 마이켈슨-몰리가 더 정확한 실험결과를 내놓자 로렌츠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1904년에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간이 일정치 않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길이가 수축하고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간이 변한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바로 유도되는 결론들이었다. 사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상대운동을 하는 두 좌표계 간의 관계를 표시하는 ‘로렌츠 변환 공식’은 로렌츠가 1904년에 이미 제창했던 것이었고, 아인슈타인은 이를 모른 채 이듬해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에서 같은 공식을 유도했다.

하지만 로렌츠와 아인슈타인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로렌츠는 에테르의 존재를 가정했기 때문에 당시 마이켈슨-몰리의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는 계속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이론 체계에 새로운 가설들을 자꾸 붙여나갔다.

운동하는 물체의 길이가 수축한다는 가설과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간이 변한다는 가설은 모두 이렇게 도입됐다. 따라서 로렌츠는 운동하는 좌표계의 시간이 변한다는 것이 자연에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단지 ‘수학적 도구’라고 생각했다. 좌표계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로렌츠의 이론은 막 난파하려는 배를 여기저기 땜질하면서 간신히 버티는 상황과 흡사했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고전물리학이라는 배가 여기저기 땜질해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다. 아인슈타인은 구멍이 숭숭 나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배를 버리고 새로운 배로 갈아탔다. 그는 절대공간과 에테르라는 고전물리학의 가설들이 빛의 속도나 전자기유도와 같은 현상에서 모순을 낳고 있음을 인식한 뒤 시간의 동시성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또 절대좌표계를 부정하는 대신 물리량 사이의 관계, 즉 물리 법칙의 절대성이 만족되는 새로운 변환식을 고안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당시 물리학이 직면한 문제점들을 잘 이해했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맥스웰, 마하, 헬름홀츠, 로렌츠, 푸앵카레, 플랑크의 논문과 책을 탐독했지만, 하나의 학설에 교조적으로 매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국 그가 특수상대성이론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이론 체계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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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홍성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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