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의 선 하나하나에 세상 만물을 담는 사람들이 있다. ‘ㅎ’의 꼭지에는 장대한 하늘을, 양쪽 사선으로 곧게 뻗은 ‘ㅅ’에는 젊은이의 역동성을, ‘ㅏ’의 삐침엔 조선 말기 황제의 마음을 담는 식이다. 글꼴에 세상을 표현하고, 다시 세상에 글꼴을 내보내기까지의 과정을 세 명의 글꼴 개발자에게 들어봤다.
박윤정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 교수
‘크레이티브(Creative)에 대한 갈망’.
육아로 일을 관둔 뒤 다시 돌아가게 된 계기, 상무이사라는 직함을 내려놓은 이유, 학생을 가르치는 원동력 등 각기 다른 질문을 던졌지만 박윤정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의 답은 늘 같았다. 30여 년간 지속적으로 크레이티브에 대한 갈망을 좇고 있다는 박 교수를 9월 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인턴으로 입사한 윤디자인연구소에서 상무이사까지 오른 뒤 2015년 박윤정앤타이포랩을 창업했다. 서울남산체, 윤명조720, 함초롬체 등의 글꼴을 총괄해 디자인했으며 신한카드, 이니스프리, JTBC, 롯데캐슬 등 브랜드의 전용서체도 디자인했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시작은 단순했어요. 존경하던 스승님이 글꼴 디자인을 추천했고 윤디자인연구소에 입사할 기회가 생겼죠. 당시 매킨토시 컴퓨터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디지털 글꼴 시장이 막 열리고 있었거든요. 한때는 패키지 디자인을 꿈꿨는데 막상 해보니 글꼴 디자인이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그는 글꼴 디자인을 ‘철저하게 조형의 영역’이라고 소개했다. 색이 없고 오직 구도로만 승부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나무(글자)를 하나하나 정성 들여 만들면서도 숲(글꼴)의 이미지를 지켜야 한다.
숲과 나무를 가꾸며 수많은 글꼴을 디자인하다 육아로 4년 6개월간 공백기를 겪었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시 글꼴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어요. 우연한 기회로 복귀했을 때 새로운 글꼴 시장이 열려 있었어요. 글꼴은 디자이너들만 소비해왔는데 싸이월드나 삼성 애니콜랜드의 등장으로 일반인도 글꼴을 사고 팔게 된 거예요.”
그가 글꼴 디자인의 콘셉트를 얻는 방식은 다양하다. ‘경기’의 이름을 정한지 천 년이 된 기념으로 2017년 디자인한 경기천년체는 ‘천 년 전과 후를 잇는다’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춰 초성, 중성, 종성 사이에 이을 수 있는 획은 다 이어서 디자인했다. 한 드라마의 주인공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글꼴도 있다.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도전적이고 역동감 있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타이포랩와이드체다.
한글 초성, 중성, 종성에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만들 수 있는 총 글자수는 1만 1172자다. 모든 글자를 디자인하려면 최소 3개월에서 최대 6개월까지의 시간이 걸린다.
최근 그는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박사과정생과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했다. ‘느린 학습자’를 위한 글꼴을 디자인하고 있다. 느린 학습자는 장애등급을 판정하는 기준에 따라 지적장애에 해당하진 않지만 평균 지능보다는 낮은, 경계선의 지능에 해당한다. 대부분 주의 집중이 어렵고 감정 표현이나 의사소통에 서투르다.
박 교수는 “느린 학습자들은 일반 글꼴에서 ㅇ/ㅁ의 구분, ㅂ/ㅍ의 구분도 어렵다”며 “37명을 대상으로 매주 인터뷰를 하며 어떤 서체가 필요한지 알아내고 디자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되지만 20년이 넘게 글꼴 디자인 분야에 종사해도 배울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더욱 열심히 하게 된다”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글꼴 디자인의 끈은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정 태시스템 대표
외국 영화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하는 글꼴이 있다. 1994년부터 외화 자막의 70~80%를 담당하고 있는 태-영화체다. 손글씨를 썼을 때처럼 글자의 오른쪽 윗부분이 약간 올라가 있고 획의 끝 부분이 둥글게 뭉쳐있다. 태-영화체를 개발한 태시스템의 김태정 대표를 9월 3일 서울 종로구의 공방에서 만났다.
“태-영화체가 등장하기 전에는 필경사가 영화자막을 직접 썼어요. 필경사들이 필름에 자막을 입히는 과정에는 화학약품으로 동판을 부식시키는 단계가 필요해요. 이때 글자도 함께 부식되면서 끝이 뾰족해지기 때문에 필경사들은 부식될 부분을 감안해 획 끝을 둥글게 했죠. 저희 회사의 수석디자이너 김화복 선생님이 이 필체를 그대로 재현해 태-영화체를 만들었죠.”
김 대표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다. 김화복 디자이너가 글자를 한 땀 한 땀 디자인한 것을 소프트웨어에 입력해 균형을 맞추는 등 미세한 조정을 한 뒤 하나의 글꼴로 만들어낸다. 이 과정을 수행하는 글꼴 개발 프로그램도 직접 만들었다.
“뉴욕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김화복 선생님을 소개받고 글자의 매력을 느꼈어요. 필름이나 인화지에 글자를 감광하는 수동식 자판으로 인쇄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 김 선생님과 함께 400여 종의 글자를 디자인했죠.”
한컴오피스 초기에 기본으로 탑재돼 특이한 글씨로 주목받은 태-나무체, 가지체, 오이체 등이 모두 태시스템의 작품이다. 김 대표는 “아직도 곳곳에서 태-나무체로 쓰인 간판이 많이 보인다”며 “태시스템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글꼴 중 하나”라고 말했다.
태시스템은 글꼴 생태계의 관성을 깨며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신문 서체에 파격적으로 탈네모꼴을 적용하려 시도한 한겨레결체가 대표적인 예다. 안상수체와 같은 대표적인 탈네모꼴과 비교하면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활’ ‘빼’와 같이 상하나 좌우가 긴 글자에 선택적으로 탈네모꼴을 적용한 것과 윗선맞춤을 시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반향이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이런 도전을 했으면 좋겠어요. 관성에 젖어 인쇄 매체에서 쓰던 바탕체를 의심없이 전자책에도 그대로 쓰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글꼴을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고 대신 글꼴을 디지털화한 파일을 저작물로 인정하고 있다. “태-영화체가 영화계의 한 요소로 자리잡으면서 흡사한 서체가 많이 나왔어요. 이 분야를 굉장히 사랑했지만, 의욕을 잃는 순간이었죠. 글꼴 디자인의 창작성이 인정받지 못하면 결코 이 분야는 올바른 생태계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글꼴에 대한 김 대표의 애정은 여전하다. “요즘 태시스템의 주요 고객은 동영상 제작자예요. 프로그램에서 지원하는 기본 글꼴 대신 개인이 직접 색다른 글꼴을 찾고 돈을 지불해 콘텐츠에서 소비하는 걸 보면 신기해요. 글꼴이 점점 대중화되고 영역이 넓어지는 현상은 글꼴 생태계에 분명 좋은 변화예요.”
류양희 글꼴 디자이너
한글 글꼴을 만들 때엔 라틴 문자(로마자)와 숫자도 함께 디자인한다. 이때는 한글이 우선이기 때문에 글자의 인상과 시각적 크기, 획의 굵기, 기준선 높이 등의 기준이 한글이 된다. 반면 다국어 글꼴은 여러 문자를 동등하게 고려해 디자인한다. 영국에서 활동하며 한글과 로마자, 그리스자 등 다국어 글꼴을 디자인하는 ‘윌로우 프로젝트’를 진행한 류양희 디자이너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잡지나 전시도록에서 한글과 영어가 나란히 있는 경우 둘 중 한 문자는 배열의 짜임새가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이 있을 거예요. 다국어 글꼴이 필요한 이유죠. 윌로우 프로젝트에서는 한글과 라틴, 그리스 문자마다 문장부호의 크기와 위치를 다르게 하고 각 문자의 쓰기 방향과 속도를 고려해 글자의 기울기와 획의 대비를 다르게 했어요.”
그는 홍익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고운한글과 아리따부리와 같은 서체를 디자인했다. 디자인한 글꼴을 컴퓨터에 타이핑했을 때의 짜릿함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다양한 서체를 디자인하며 라틴 문자와 문장부호에 관심이 생겼고 유학을 선택했다. 글꼴 디자인은 굉장히 문화적인 영역으로 한국 문화권에서 성장한 그에게 다른 언어의 문자 디자인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윌로우 프로젝트를 하며 그리스 문자를 디자인할 때 특히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리스 문자의 리듬과 균형감에 익숙해지지 않았죠. 한글은 긴 문장에 다양한 글자를 넣고 읽어내려가면서 테스트하는데 그리스 문자는 읽을 수가 없기에 테스트도 불가능했죠. 그리스 출신 교수님과 동기의 도움으로 끝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평을 받았죠. 작은 한걸음을 뗀 기분이었어요.”
그는 가장 좋아하는 글꼴로 이용제 디자이너의 ‘꽃길체’를 꼽았다. 가로쓰기가 대중 매체와 일상을 장악한지 이미 오래된 시기인 2006년에 나온 세로쓰기 전용 서체다. 그는 “세로쓰기는 한국의 문자 생활에서 가로쓰기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며 “꽃길체를 보며 글꼴 디자인을 할 때 당장 필요한 것이나 앞으로 유용할 것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화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