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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인간의 역사를 바꾼 꽃의 유혹


 

 


꽃의 첫번째 유혹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통해서였다.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선호하던 사람에게 꽃은 열매라는 보상으로 보답했다. 한 달 전 산딸기 꽃이 피었던 장소를 기억한 사람은 나중에 그곳에서 산딸기를 먹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는 얘기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스티븐 핑커 교수는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자연선택은 식물학자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 편이었다”고 밝혔다.

시간이 흘러 꽃은 인간의 욕망을 더욱 진하게 유혹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장미다. 장미는 오래 전부터 아메리카대륙에서 감상하며 즐기기 위한 식물로 재배됐다. 장미는 인간 세계에 최초의 화훼 전문가를 탄생시켰다. 1844년에는 초보 원예가를 위해 최초의 ‘장미 안내서’까지 나왔다. 1860년대 어느 날 영국 최초로 열린 장미 전시회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장미를 서리로부터 보호하려고 담요를 가져온 이마저 있었다. 장미는 현재 1만6000여 종으로 번성했다.

장미가 인간을 성공적으로 유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꽃잎에 나타난 오묘한 색(色)이다. 가장 사랑 받는 장미는 역시 ‘빨간’ 장미다. 17세기 네덜란드인을 사로잡은 튤립은 핏빛 바탕에 흰 줄무늬가 있는 종류였다. 소설가 김훈은 수련을 보고 “열리는 꽃 속에서 빛과 색이 쏟아져 나온다”고 썼다.

실제로 꽃은 색을 만드는 뛰어난 화학자다. 꽃잎에 들어 있는 대표적인 색소가 ‘안토시아닌’이다. 이 물질은 산성에서는 붉은 색을 발하고 알칼리성에서는 푸른 쪽빛을 낸다. 노란 개나리는 ‘카르티노이드’ 계통의 색소를 만든다. 하얗고 눈부신 목련은 어떤 색소 물질도 만들지 않는다. 그저 햇빛을 난반사해 누구보다도 희게 빛날 뿐이다.


'인간꿀벌'을 유혹하다 - 향기

꽃은 곤충을 부르기 위해 자극적이고 기분 좋은 향기를 풍긴다. ‘인간꿀벌’이 이 향기에 매혹됐다. 대표적인 꽃이 사프란이다.

향기로 유명한 사프란은 완벽하게 좌우 대칭인 꽃망울을 틔우는 매력적인 알뿌리 식물이다. 사프란의 독특한 향은 ‘사프라날’이라는 화학 물질 때문이다. 1653년 니콜라스 컬페퍼가 펴낸 ‘약용식물전집’에는 “사프란의 암술을 채집해 전용 건조실에서 조심스럽게 말린 후에 만든 사각형 덩어리가 바로 상점에서 파는 사프란”이라고 적혀 있다. 암술은 꽃마다 오직 세 개만 있기 때문에 사프란 1kg을 만드는 데 약 15만 송이의 꽃이 희생된다. 사프란의 몸값이 치솟아, 중세에는 사프란 만한 사치품이 없었다. 덕분에 사프란은 더욱 많이 길러졌다. 처음 재배된 후 약 3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프란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향료로 거래되고 있다.

라벤더는 뿌리를 제외한 온 몸에서 향이 나는 기름을 생산한다. 이 기름을 필요할 때마다 공기 중으로 뿜어 향기를 낸다. 라벤더의 독특한 향은 벌과 인간꿀벌을 유혹하고, 초식동물의 식욕을 억제해 스스로를 보호한다. 인간들은 라벤더 꽃이 피기 직전 꽃대를 잘라 햇살에 말려 향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라벤더 입장에서는 씨앗을 퍼뜨리기 전에 잘려 나가는 셈이지만, 걱정은 없다. 인간들이 라벤더 향수를 만들기 위해 지구 곳곳에서 가꿔주기 때문이다. 1709년 이탈리아인 조반니 마리아 파리나가 미량의 라벤더를 섞어 만든 향수 ‘쾰른’이 유명하다.
 

치료제, 혹은 환각제 - 독

꽃은 독하다. 수정이 될 때까지 꽃잎은 물론, 동물에게는 훌륭한 에너지원인 씨앗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꽃은 특히 배아가 숨겨져 있는 씨앗에 집중적으로 독을 저장했다. 그러나 씨앗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은 꽃의 방어 전략을 자신을 위해 이용했다. 현대의 예로는 1970년대 소련 KGB가 사람을 암살하는 데 이용한 리신이 있다. 리신은 피마자 씨앗이 가진 강력한 화학무기로, 독성이 코브라 독보다 강하다.

인간이 꽃이 만들어낸 독에 눈독을 들이자 똑똑한 꽃은 한번 더 머리를 썼다.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독을 만들어 해가 되는 동물은 피하고 오히려 인간은 끌어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칠리의 매운 맛을 내는 캡사이신이라는 알칼로이드는 칠리 씨앗에 가득 들어 있는데, 쥐에게는 독이지만 씨앗을 퍼뜨려주는 새나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다. 독을 가장 잘 이용한 꽃식물은 커피나무다. 커피나무가 만들어낸 카페인은 박테리아와 곰팡이, 그리고 경쟁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독성 화합물이다. 특히 커피나무의 새싹은 에스프레소 열 잔에 해당하는 카페인으로 철저하게 무장하고 있다. 그러나 카페인의 매력에 빠진 인간들은 커피나무를 원산지인 에티오피아에서 지구촌 구석구석 옮겨 심었다. 커피는 카페인이라는 독을 이용해 가장 성공적으로 지구에 퍼진 꽃식물이다.

대마초나 양귀비, 담배 등은 인간 의식에 신비한 효능을 발휘하는 화학물질을 만들어 인간들이 자신을 숭배하게 만들었다. 가령 대마 씨앗은 테트라히드로카나비놀(THC)이라는 화학물질을 갖고 있는데, 동물 몸에 들어가면 독성을 나타낸다. 인간은 대마씨를 가열해 그 김을 들이마심으로써 기분이 몽롱해지는 환각 효과를 즐겼다. 반면 의사들은 수천 년간 대마를 진통제나 우울증 치료제로 사용했으며, 최근에는 리신 역시 항암제로 연구하고 있다.
 

EVENT - 이 꽃은 무엇일까요?

씨앗 속에는 꽃이 만들어낸 또다른 무기가 있다. 원래는 자신을 위해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인간을 유혹하는 데 사용했다. 바로 씨앗기름이다.

꽃은 밑씨를 두 번 수정시킨다. 꽃가루에는 정자가 두 개씩 들어 있는데, 정자 한 개는 난자세포와 결합해 배아를 만들고 다른 한 개는 밑씨 속의 다른 핵과 결합해 ‘내배유’, 즉 식량저장고를 만든다. 자식이 싹을 틔울 때를 대비해 엄마 꽃이 양분을 미리 저장하는 것이다. 이를 ‘중복수정’이라고 하며, 옥수수 같은 곡식 낱알이 바로 이 식량저장고다. 러시아 식물학자 세르게이 나바친은 1898년 최초로 꽃의 중복수정을 발견했다.

내배유에는 기름 성분이 많다. 기름에 에너지를 많이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인데, 화학 구조에 따라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다르다. 지방산 사슬이 모두 단일결합이면 포화지방, 이중결합이 하나 이상이면 불포화지방이라고 한다. 포화지방이 에너지를 더 많이 저장한다. 그런데 꽃은 먼저 포화지방을 만들고 나중에 일부를 불포화지방으로 바꾼다. 왜 굳이 한번 더 수고해 에너지 적은 불포화지방을 만들까. 이유가 있다. 불포화지방은 포화지방보다 녹는점이 낮아 추운 곳에서도 액체 상태로 존재한다. 싹을 틔울 때 액체 상태의 지방이 필요한 씨앗에게는 더 요긴한 것이다. 기온이 낮은 곳에 사는 씨앗일수록 불포화지방이 많다.

인간들은 꽃씨에서 추출한 불포화지방을 식용기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19세기 초 러시아정교회는 크리스마스 전 40일 동안 먹어서는 안 될 ‘기름 많은 음식’ 목록을 발표했는데, 그 때까지 해바라기를 잘 몰라 금지하지 않았다. 가장 추운 시기, 액체 상태의 기름이 절실했던 러시아인은 약 30%가 기름인 해바라기 씨앗을 이용해 고급 기름을 만들어냈다. 씨앗기름은 오늘날 1년 거래량이 세계적으로 65조 원에 달한다.

씨앗을 식용기름으로 빼앗겼지만, 문제는커녕 꽃들에겐 더욱 이득이다. 기름이 필요한 인간이 자신을 정성껏 재배해주기 때문이다.

씨앗을 퍼뜨리는 포장재 - 열매

가장 추운 지역에서 살아가는 귀리, 보리, 밀, 도토리, 밤나무 등은 불포화지방조차 사용하지 않고 에너지 대부분을 탄수화물로 저장한다. 그 덕에 이 작은 식량저장고는 현재 세계 식량의 60%를 담당하고 있다.

최초로 인간을 길들인 꽃식물은 벼다. 정확하지 않지만 1만 년 전쯤부터 중국, 중동 등지에서 농경이 시작됐다. 벼는 오늘날 세계 곡물 생산량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간들이 다양한 품종을 개발한 덕분에 지난 30년동안 수확량이 그 이전보다 두 배 증가했다. 야생의 꽃식물과 비교하면 엄청난 번식력인 셈이다. 밀은 유럽인을 선택했다. 온난한 유럽 기후에서 밀이 살기 쉬웠기 때문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라고 말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국민에게 밀로 만든 바게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던 무지의 대가를 단두대에서 치러야 했다.

보리는 자신이 선택한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무지 탓에 처음에 어려움을 겪었다. 보릿가루는 글루텐 함량이 낮아 큰 빵을 만들기 어려웠다. 선호도에서 밀에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보리는 발아와 건조 과정을 거쳐 ‘맥아’로 만드는 원리를 인간에게 일깨워줬다. 맥아는 효모로 발효된 뒤 술통으로 옮겨져 맥주로 다시 태어났다. 역사적으로 깨끗한 물이 공급되기 전에는 알코올 함량이 적은 맥주가 오염된 우물물보다 더 안전한 음료였다.

벼와 밀, 보리 외에도 호박은 9000년 전 멕시코 사람들을, 바나나와 타로는 7000년 전 뉴기니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옥수수, 토마토, 카카오, 바닐라, 아보카도, 파파야, 해바라기, 강낭콩, 호박, 감자, 파인애플, 망고, 오이, 감귤 등 수많은 꽃식물이 열매를 요금으로 지불하고 전 지구의 들판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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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ge. 튤립은 어떻게 세상에 퍼졌나
PART 3. 인간의 역사를 바꾼 꽃의 유혹

2014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우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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