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새해 시작과 함께 서울대 공대에 있는 풍동실험실을 찾았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길고 거대한 풍동실험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김희수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연구원의 안내로 풍동실험 장치에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 들어 있는 검은색 모형이 눈에 들어왔다.
“스키점프 국가대표 김현기 선수의 활공 자세를 3D 프린터로 출력한 모형입니다. 실제 김 선수의 4분의 1 정도 크기입니다.”
2009년 개봉한 영화 ‘국가대표’로 유명해진 한국 스키점프 대표팀은 오랜 기간 불모지와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연습해 왔다. 하지만 평창 동계올림픽이 개최되면서 국내에 국제적인 규모를 갖춘 스키점프대가 생겼고, 경기력 향상을 위한 과학적인 지원도 이뤄졌다. 최해천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팀이 국가대표 스키점프팀의 도우미를 자청하며 나선 것이다.
최 교수는 유체역학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이다.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은 최 교수팀과 함께 비행거리를 향상시킬 수 있는 자세 분석 등 과학적인 훈련을 했다.
4~5초 동안 100m 이상 날아야
최 교수팀은 소치 동계올림픽 개최 이듬해인 2015년부터 스키점프 대표팀과 훈련에 돌입했다. 먼저 비행거리를 최대로 늘릴 수 있는 최적의 자세를 찾기 위한 풍동실험부터 시작했다. 훈련하면서 자세를 바꿔보면 되지 거창하게 무슨 풍동실험까지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훈련만으로 자세를 교정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시속 약 100km의 속도로 100m 이상 빠르게 날아가는 4~5초 동안 자세를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자세를 바꿨다가 사고나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최 교수는 “안전 장비 없이 스키를 신고 하늘을 난다는 심리적인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강칠구 선수(현재 여자 대표팀 코치)와 김현기 선수가 실험실을 직접 찾았다. 연구팀은 두 선수의 활강 및 활공 자세를 3차원으로 스캔한 뒤 이를 이용해 풍동실험 시설에 넣을 수 있도록 선수의 몸을 축소한 모형을 3D 프린터로 제작했다. 과거에는 사이즈만 축소한 일반 모형으로 실험해서 최적의 자세를 찾았는데, 선수마다 신체 특징이 달라 연구 결과가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선수의 몸과 자세를 그대로 표현한 모형이 필요한 이유다.
연구팀은 선수가 직접 풍동실험 장치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는 정밀한 결과를 얻기 위해 주걱턱까지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재현했다. 또 자세를 바꿔가며 실험할 수 있도록 모형의 관절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양쪽 고관절과 발목, 그리고 발과 스키 사이에 두 개씩 총 여섯 개의 관절을 넣었다.
각 관절은 선수의 비행거리를 결정하는 변수를 조정하는 데 쓰인다. 고관절은 상체와 하체 사이의 각도를, 발목 관절은 스키가 V형으로 벌어지는 각도를, 발바닥과 스키 사이에 넣은 관절은 스키가 비틀리는 정도를 조절한다. 여기에 스키 날과 바람의 방향이 이루는 각도를 추가로 조절할 수 있게 했다.
비행거리 5~6% 늘리는 자세
연구팀은 이들 변수를 조절하면서 실험을 거듭해 최적의 ‘양항비(揚抗比)’를 나타내는 각도 조합을 찾았다. 양항비는 물체를 공중에 떠오르게 만드는 힘인 양력을, 비행을 방해하는 힘인 항력으로 나눈 값이다.
양항비가 크면 저항이 작다는 뜻이지만, 너무 크게 나타날 경우 멀리 날아가기 보다는 높이 떠버리기 때문에 거리와 높이가 이상적인 최적의 양항비를 찾는 게 중요하다. 연구팀은 풍동실험을 통해 활공 시간에 따라 몸의 자세를 어떻게 조정해야 최적의 양항비가 나오는지 찾아냈다.
가령 강칠구 선수의 모형으로 실험한 경우에는 활공 초기, 스키와 상체가 이루는 각도를 17도로 만든 뒤 점차 15도, 14도로 좁히는 게 좋은 것으로 분석됐다. 그와 동시에 스키의 V형이 이루는 각도는 20도에서 26도, 29도, 32도로 점차 넓히는 게 유리했다. 또 스키 사이의 간격은 점차 좁히고 스키를 비트는 각도는 크게 만들 때 양항비가 상대적으로 가장 좋았다.
연구팀은 선수가 체공 중에 자세를 이런 과정에 따라 바꿨을 때 비행거리를 약 5~6% 늘릴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의 최고 기록은 95m로 33위였다. 비행거리가 6% 향상되면 100.7m로 단숨에 10위권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
하지만 선수가 체공하는 4초 안팎의 짧은 시간 동안 초 단위로 자세를 조정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연습하는 동안 선수 본인은 자세를 많이 바꿨다고 생각해도 막상 영상을 찍어서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최 교수는 “초 단위로 자세를 바꾸지 않고 한 가지 자세만 유지해도 지금보다 비행거리를 늘릴 수 있는 각도가 있다”며 “선수들이 들어가서 훈련할 수 있는 풍동실험 시설이 있으면 최적의 자세를 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를 주도한 방경태 연구원은 이 결과를 2016년 12월 ‘국제과학과스키회의(ICSS)’에서 발표해 ‘젊은연구자상’을 받았다.
연구팀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시뮬레이션한 실험에서도 실제 풍동실험과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선수별 최고 비행거리를 낼 수 있는 자세를 찾기 위해 매번 풍동실험을 할 수 없는 만큼 최적의 자세를 찾을 수 있도록 컴퓨터 시뮬레이션 모델을 개발한 것이다. 시뮬레이션 결과와 실제 풍동실험 결과가 일치하면 시뮬레이션만으로도 최적의 자세를 찾을 수 있다.
인공 바람 속에서 찾은 최적의 양항비
대형 풍동실험 시설은 스키점프 대표팀의 자세 교정뿐만 아니라 훈련에도 활용됐다. 스키점프는 준비 과정이 복잡하고 높은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만큼 하루 4~5회 훈련이 최대다. 때문에 유럽의 스키점프 강국은 선수들이 풍동시설에서 자세 훈련을 하도록 지원한다.
풍동시설에서는 하루 종일 자세 훈련을 할 수 있어 훈련량을 극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는 사람이 들어갈 만큼 규모가 큰 풍동시설이 네 곳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일년 내내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연구팀은 2015년과 2017년 공군사관학교의 풍동시설을 대여하고, 선수들이 훈련할 수 있도록 몸을 지지하는 장치와 자세 촬영용 카메라, 속도, 양항비 모니터링 시스템을 설치했다. 선수들은 풍동시설에 들어가서 실제와 유사한 초속 20~30m의 바람을 맞으면서 활공 자세와 도약 자세를 훈련했다.
도약 자세는 스키점프대에서 공중으로 도약할 때의 자세를 말하는데, 초기 속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로 활공 자세만큼이나 기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표팀은 평소 하루 몇 차례밖에 할 수 없었던 실전 훈련을 하루 종일 반복하면서 도약할 때 바람의 저항이 가장 작은 자세가 무엇인지 몸으로 느끼며 훈련했다.
국내 최초 여자 스키점프 선수인 박규림 선수는 “유튜브에서 외국 선수들이 풍동실험 시설에서 훈련하는 영상을 보면서 동일한 훈련을 하고 싶었다”며 “실제로 훈련해 보니 스키점프대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바람의 느낌을 지상에서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활공 훈련에서는 스키가 V형으로 벌어진 각도와 스키 뒷부분 사이의 간격을 바꿔가며 최적의 양항비를 찾는 훈련을 반복했다. 김현기 선수는 약 20도로 각도를 벌리고 스키 뒷부분 사이의 간격이 스키 길이의 약 5%가 됐을 때 양항비가 1.33 정도로 가장 좋았다.
최 교수팀은 2019년까지 스키점프 대표팀의 과학 훈련을 계속 도울 계획이다. 최 교수는 “이번 연구가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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