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한국 동계스포츠의 전환점이 됐다. 이상화, 이승훈, 모태범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쇼트트랙 종목에서만 강세를 나타내던 국내 동계스포츠의 경쟁력이 한 층 확대된 계기였다. 특히 이상화 선수는 올해 올림픽 3연패를 노리고 있다.
※ 스피드스케이팅 vs. 쇼트트랙
두 종목 모두 아이스링크 위를 빠르게 질주해 순위를 겨룬다. 쇼트트랙은 아이스링크 둘레가 약 111.2m이고, 스피드스케이팅은 400m다. 정식 명칭은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과 롱트랙 스피드스케이팅이다. 일반적으로 스피드스케이팅이라고 하면 롱트랙을 가리킨다.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 전체로 보면 쇼트트랙과 달리 선수층이 얇고 선수별 기록 차이가 상대적으로 커 메달을 노리기에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가령 500m 경기에서는 출발 속도가 전체 기록을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한데, 이상화 선수를 제외하면 출발 속도가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메달권은 100m를 10초대 초반에 끊어야 하는데, 이상화 선수를 제외한 여자 선수들은 대부분 10초대 중후반이었다.
출발 속도를 향상시킬 방법을 고민하던 대표팀 코치진은 선수별로 출발 동작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2015년부터 한국스포츠개발원 연구팀의 도움을 받아 출발 동작을 교정하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초당 120프레임 촬영해 동작 분석
송주호 한국스포츠개발원 책임연구위원이 이끄는 연구팀은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을 돕기 위해 초고속 영상촬영 기법을 도입했다.
일반적인 동영상 카메라는 초당 30~60장의 사진을 찍어 영상을 만든다. 반면 초고속 카메라는 초당 약 120장을 찍기 때문에 찰나의 순간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 카메라로 선수들의 출발 동작을 촬영해서 자세와 동작, 이동 궤적을 분석해 기록을 향상시킬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연구팀은 2015년 겨울부터 2017년 겨울까지 국내에서 열린 세 차례 대회에서 남녀 대표팀 선수 약 10명의 출발 동작을 촬영했다. 아이스링크 주변에 카메라 9대를 설치해 출발선에서부터 50m 지점까지 빙판을 질주하는 선수의 동작을 다각도로 기록했다.
하지만 촬영한 영상을 대표팀 코치진과 선수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처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프레임별로 변하는 선수의 동작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려면 몸동작을 그래프 형태로 변환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노가다’에 가까웠다. 영상에 기준이 되는 좌표를 설정한 뒤, 각 프레임마다 선수 몸의 각 부위에 점을 찍고 선으로 연결하는 과정을 수천 번 반복해야 했다.
프레임마다 점을 찍은 뒤 점만 남기고 영상을 제거하면 공간좌표 위에 선수의 몸동작을 나타내는 점과 선만 남는다. 마치 그림 밑에 카본지(먹지)와 흰 종이를 대고 그림을 따라 그리면 그림의 윤곽만 남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게 재구성한 각 프레임을 하나의 좌표 공간 속에 동시에 나타내면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선수의 동작을 점과 선 형태로 파악할 수 있다. 선수의 관절 각도와 주행 경로 등을 정량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영상 수치화 작업이라고 한다.
이 방법은 ‘모션 캡처’로 불리는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과 반대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에는 배우의 몸에 마커를 붙인 뒤 이 마커가 공간좌표 위에 찍은 점과 선에 캐릭터를 입혀서 영상을 완성한다. 하지만 경기 중인 선수에게 마커를 달 수 없는 만큼 동작을 영상
으로 찍은 뒤 분석하기 쉬운 공간좌표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모태범 선수 기량 회복 지원
연구팀은 영상에서 선수의 출발 동작을 약 0.008초 단위로 분석했다. 상체를 정면으로 숙이는 각도와 스케이트 날로 빙판을 미는 ‘푸시 오프’ 자세, 빙판 위를 미끄러져 가는 ‘글라이딩’ 자세, 여기에 주행 경로도 확인했다.
특히 발목에서 무릎, 엉덩이로 이어지는 ‘키네틱 체인(kinetic chain)’이 제대로 형성되는지 분석했다. 키네틱 체인은 발과 다리, 허리 등 신체의 연결된 부위가 동작하는 순서를 말한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무릎과 발목, 엉덩이가 순서대로 펴지면서 거의 동시에 최대 각도로 펴질 때 가장 이상적인 키네틱 체인이 만들어진다.
송 책임연구위원은 “출발할 때 아주 짧은 시간에 손실 없이 힘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키네틱 체인이 매우 중요하다”며 “상체와 하체가 만들어낸 힘을 빙판에 전달해 추진력을 만드는 키네틱 체인이 균형을 이뤄야 출발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일부 선수는 키네틱 체인의 균형이 무너져 출발할 때 주행 경로가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관찰됐다. 한쪽 다리는 키네틱 체인이 조화를 이룬 반면 다른 쪽은 그렇지 않아 빙판에 전달되는 힘의 차이가 생겼고 결과적으로 주행 방향이 틀어진 것이다.
키네틱 체인이 제대로 형성돼야 힘의 손실을 최소로 줄이고 빙판을 미는 힘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 야구에서도 타자가 순간적으로 배트를 휘두르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키네틱 체인에 신경 써야 한다.
모태범 선수는 연구팀의 영상 분석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점차 하락세를 걸었던 모 선수는 영상 분석을 통해 체력적인 보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반응 속도가 느려졌고, 키네틱 체인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과거 그가 보여줬던 폭발적인 출발 스피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 선수는 작년 하반기 체력 훈련을 통해 무너진 균형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송 책임연구위원은 “체력적인 부분은 전성기 시절의 상태를 거의 회복했다”며 “키네틱 체인의 균형도 좋아졌고, 스타트뿐만 아니라 후반 속도도 향상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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