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중고생들 사이에 입시를 앞두고 성패를 점치는 ‘분신사마 놀이’가 유행하고 있다. 혼령을 부르는 소질이 있는 친구가 영매가 돼 혼령을 부른 다음, 의뢰자와 혼령간의 대화를 주선하고 의뢰자의 미래를 알아보는 놀이다.
영매와 의뢰자가 볼펜을 함께 잡고, 영매가 주문을 외우면 혼령이 볼펜에 내려와 이름을 적거나 자신임을 알리는 표시를 한다. 그러면 영매는 의뢰자가 원하는 것들을 묻고, 혼령은 볼펜을 움직여 가부를 표시한다.
분신사마는 최면현상
이 놀이를 경험해본 일부 학생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저절로 볼펜이 움직이고, 비밀스런 질문에 가부를 대는 것을 보고 혼령이 진짜로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영적인 힘을 빌어 친구의 비밀을 알아내고, 공부를 잘하게 되고, 시험에 합격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놀이는 최면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영매의 주문을 신호로 실험자들은 최면에 들어가고, 이때 무의식에 들어있던 기억들이 풀려나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종이 위에 표시를 남기는 것이다.
불려나온 혼령들이 영매나 의뢰자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것도 무의식에 있던 기억이 최면으로 풀려나오기 때문이다. 또 혼령이 말해주는 비밀들도 영매나 의뢰자가 이미 알고 있고 공개해도 좋은 비밀을 최면상태에서 쓴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면상태에서도 의식은 있으므로 진정으로 내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은 혼령이 절대 알아맞히지 못한다.
주술을 부추기는 불안감
분신사마 놀이를 통해 영적인 힘을 경험하고, 그 힘을 빌어 불확실한 미래를 점쳐보려는 생각은 허망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 그것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쉬이 억누를 수 없는 모양이다. 해마다 입시철이면 어느 종교 마당에나 낟가리처럼 쌓이는 부모들의 발원은 그래도 마음이 짠한 것이지만,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부적이나 기물들에 너나 없이 몰려드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광경이다. 항간에는 쏘나타 승용차의 금속제 S자가 서울대를 가게 한다며 이를 떼어내 수많은 승용차 주인들의 마음을 언짢게 하고 있다. 시험에 대한 불안감이 이처럼 도에 지나치는 집착들을 만드는 것이리라.
꼭히 유난스럽지 않으면서도 시험 때면 등장하는 정겨운 주술이 있으니, 그것은 수험생에게 합격엿과 찹쌀떡을 선물하는 일이다. 엿과 찹쌀떡이 찰싹 달라붙는 것처럼 수험생도 찰싹 붙어 합격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이것은 미신적인 주술이지만 폐해가 없으면서 수험생을 격려하는 기회도 되니 그래도 미풍에 속한다.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낳는다’는 원리에 바탕했다고 이런 주술을 유감주술이라 하는데, 동서고금의 어느 문화에나 퍼져 있는 매우 흔한 주술의 한 형태다.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 금기(터부)도 넓게는 이러한 유감주술에 속한다. 시험날에 바나나나 미역국을 먹지 않는 금기의 바탕에는 “바나나나 미역은 미끄러운 것이므로 그것을 먹은 사람은 미끄러진다, 즉 시험에 떨어진다”는 생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미역은 조혈작용이 뛰어나고 위에 부담을 주지 않아 오히려 수험생의 아침음식으로 좋다는 의사들의 조언을 상기해보면 수험생이 매달리는 주술이나 금기들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1900년대 초 영국의 인류학자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주술은 발육이 덜 된 기술이며, 거짓과학이라고 단언했다.
합격엿과 암시 효과
그런데도 우리는 생활 속에서 수많은 유감주술을 행하며 산다. 연인들 사이에는 손수건 사주기와 신발 사주기가 이별을 불러온다며 금기가 돼 있다. 또 손잡고 다닐 때 깎지를 끼는 것은 이별을 부른다는 금기가 있고, 4자는 죽을 사(死)자와 통하므로 건물에는 4층을 두지 않는 등 무수히 많은 주술과 금기들이 행해진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비과학적인 줄 알면서도 시험 전날에 엿을 선물하고, 시험보는 학교 교문에 덕지덕지 엿을 붙여놓고 시험에 임하는 것일까. 혹 그것은 주술이 종종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 아닐까.
기실 효과는 엿의 작용이 아니라 주술을 행했다는 생각이 주는 암시 때문이다. 시험 수시간 전에 포도당을 섭취하면 기억력이 증가된다는 최근의 쥐 실험 보고를 보면 당분이 많은 엿이 시험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듯도 하지만, 전날에 먹은 엿이 다음날까지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도 엿을 먹은 사람이 실제로 시험을 잘 치르는 경우가 많은 것은, 엿을 먹었기 때문에 시험을 잘 칠 것이라는 암시가 안도감으로 작용하고, 그러면 긴장 상태에서보다 자신의 실력을 훨씬 잘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암시효과는 금기를 어겼을 때 생기게 되는 비관적인 암시에 비하면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미역국을 먹으면 떨어진다는 금기를 지닌 사람이 미역국을 먹었다면, 그것 때문에 시험을 그르칠 것이라는 비관적인 암시에 시달리게 되고, 그 때문에 긴장해서 더욱 시험을 그르칠 가능성이 크다.
암시효과는 실재로 정신의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암시의 효과를 극대화해서 병적으로 잘못된 관념이나 행동을 치료하는 방법이 최면의학에서 사용된다. 최면상태에서 계속해서 ‘너는 잘 할 수 있고, 잘 될 것이다’라는 긍정적인 암시를 주면, 최면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무의식에 각인된 암시효과가 계속 발휘되면서 병적인 상태가 개선되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
지금도 종종 무속인이나 일부 신비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유감주술을 신뢰하고, 그 원리로 오래 전부터 전통유학에서 주창된 동류상응, 동기감응의 원리를 내세운다. 기를 통해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끼리 서로 감응한다는 것이다. 죽은 어버이의 기가 자손의 기와 감응해서 자손에게 화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명당의 논리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일찍부터 이러한 신비주의 허구성을 간파했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 후기 실학자 담헌 홍대용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중형을 받은 죄수가 옥중에서 겪는 고통이 견딜 수 없다 해도 그 아들의 몸에 악한 병이 생겼다는 말을 듣지 못했거늘, 하물며 죽은 사람의 송장에 있어서랴! 술수의 망령됨은 실로 그 이치가 없으면서도 그대로 전해지고 믿어온지 오래됐다.”
그런데 홍대용은 이러한 혹독한 비판의 말미에 합격엿을 먹으면서 되새겨야 할 귀한 한마디를 덧붙이고 있다. "여러 사람이 '신령스러운 마음'을 합하면 왕왕 없는 일도 생기게 되는데, 이는 사람의 마음이 하늘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성이면 감천'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술수가 아니라, 가장 선하고 정성스런 마음, 바로 많은 사람들의 신령스런 마음이다. 하늘도 움직이는 신령스런 마음이라면 다른 무엇인들 가능하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