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촛불집회를 높은 건물 위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자. 시위가 무르익어 촛불 파도타기를 하려고 한다. 사회자가 “출발!”이라고 외치면 촛불을 든 개인들은 모두 앞 사람의 행동을 유심히 보면서 자신이 언제 촛불을 올려야 할지 시점을 잰다. 각 개인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곧 건물 위 관찰자에게는 노란 빛으로 넘실대는 커다란 파도가 보인다(개개인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창발하는 중력’, ‘창발하는 시공간’을 연구하고 있다. 중력을 양자론으로 기술하는 양자중력이론의 한 종류다. 시공간이 태초부터 존재하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것들의 상호작용에서 발현되는 성질이라고 기술한다. 위 예에서 촛불을 든 개인들은 새로운 이론에서 제안하는 우리 우주의 근원이며, 그 근원들의 관계로 ‘창발하는’ 촛불 파도가 바로 우리가 사는 4차원 시공간이다.
필자를 비롯해 창발하는 시공간을 믿는 학자들은 우리 우주를 이루는 근본이 비가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비가환 공간이란 수학적 위상공간으로, 비가환 대수(교환법칙이 성립하는 xy-yx=0을 가환 대수, 교환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xy-yx=iα를 비가환 대수라고 한다. α는 끈이론에서 도입된 상수)를 기하학으로 다룬다. 마치 x2+y2=1이라는 함수를 반지름이 1인 원으로 다루는 것과 같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보는 고전적인 4차원 시공간은 이 같은 대수 체계, 즉 비가환 공간의 행렬로부터 유도된다.
이론에 따르면, 시공간이 창발하려면 먼저 진공에 플랑크 에너지가 응축돼야 한다. 플랑크 에너지는 에너지의 플랑크 단위로, 약 1.22x1019GeV(1eV는 전자 하나가 1V의 전위를 거슬러 올라갈 때 드는 에너지. 1GeV=109eV)다.
행렬로 이뤄진 비가환 대수를 사용해 플랑크 에너지의 응축을 기술할 수 있다면, 이론이 예측하는 진공의 성질은 상대성이론과 완전히 달라진다. 상대성이론이 기술하는 가환 공간에서 진공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플랑크 에너지가 응축된 진공에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서로 밀쳐내는 성질과 비국소성(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 즉각 그 상태를 변화시키는 성질. 양자역학의 얽힘 현상을 떠올리면 된다)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공간의 안정성이 보장되고 시공간의 특이점이 배제된다.
이는 비가환 위상공간에 기초한 양자역학(플랑크 상수 ħ를 도입해 비가환 공간을 만들었다)이 고전역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원자의 쿨롱 특이점과 불안정성을 한 번에 해결한 것과 비슷하다. 양자역학이 태동하기 전에는 원자 속 전자는 회전 반경이 줄어들어서 결국 원자핵과 충돌할 거라는 ‘쿨롱 특이점’ 문제가 예측됐다. 이 말이 맞다면, 우리 우주는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양자역학적 원리(불확정성 원리. 운동량과 위치 정보가 비가환 대수의 관계에 놓임)가 발견되면서 전자가 원자핵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한계 반경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공간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특이점으로 소멸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비가환 시공간에서는 불확정성 원리가 적용된다. 양자역학에서 위치와 운동량의 개념이 고전적인 영역에서만 정의되듯, 창발하는 시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거시적인 세계에서만 유의미하게 정의된다.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거시세계로 뻗치는 현상이 가능하며,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은 이런 미시세계와 거시세계가 얽히면서 나온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다. 공간 성분과 시간 성분의 미세한 요동들이 거시적인 공간에서 각각 척력(암흑에너지)과 인력(암흑물질)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한 가지 희망적인 사실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기술할 때 리만 기하학이 이미 있었듯 양자중력이론을 정립하기 위한 수학이 이미 발전해 있다는 점이다. 잘 엮고 다듬는 일이 남았다. 이론의 특성상 실험으로 직접 검증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이 예측하는 여러 현상이 실제 관측과 맞아 떨어진다면, 그것이 곧 간접 증거로 채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