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2005년 03월 과학동아

가장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세련됨? 우아함?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그 제품을 보면 그 사용법이 저절로 와 닿게 하는 디자인 아닐까요?”

한성대 미디어디자인컨텐츠학부 지상현 교수는 대표적인 예를 들어달라는 질문에 우리나라 전통 농기구인 키를 예로 든다. 앞은 넓고 평평하며 뒤는 좁고 우긋한 키에 곡식을 담고 위아래로 흔들면 무거운 낟알은 안쪽으로 몰리고 가벼운껍질이나 쭉정이는 바깥으로 이동하면서 서로 분리된다.

“키가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는 외국인도 키를 제대로 잡아 위아래로 흔들어봅니다. 디자인 자체가 사용설명서인 셈이지요.”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사의 좌석조절버튼도 형태가 곧 매뉴얼인 대표적인 사례다. 보통 좌석의 높낮이나 각도를 조절할 때는 레버를 회전시키거나 당겨 몸을 움직여 맞춘다. 그런데 벤츠에는 좌석모양의 버튼이 장착돼 있어 손으로 각도를 조절하면 좌석이 그 모양대로 움직인다. 한번만 써보면 사용법을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디자인이다.

테이블 겸 궤

도시를 안내하는 지도 역시 디자인을 개선하면 방문객이 알아보기가 훨씬 쉬워진다. 1995년 영국 브리스톨은 ‘읽기 쉬운 도시’ 프로젝트를 통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손쉽게 목적지에 갈 수 있는 안내 시스템을 만들었다. 지도에 있는 주요건물은 투시도처럼 그려져 있어 건물의 형태를 숙지할 수 있다. 그뒤 전세계의 많은 도시들이 이런 디자인을 따랐음은 물론이다.

Table=Chest

일본 디자이너 아즈미 신과 아즈미 도모코가 만든 테이블(table) 겸 궤(chest). 세부분으로 이뤄진 테이블의 한쪽을 들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접히면서 3단 궤가 되도록 디자인된 멋진 작품이다.

생각을 바꾸면 디자인이 바뀐다

진공청소기를 쓰다보면 필터에 먼지가 쌓이면서 빨아들이는 힘이 떨어지고 먼지주머니를 갈기도 번거롭다. 소비자들은 원래 그러려니하고 불편함을 감수한다. 그러나 영국의 디자이너이자 발명가인 제임스 다이슨은 달랐다. 그는 원심력을 이용한 사이클론을 청소기에 도입함으로써 먼지주머니를 쓰지 않으면서도 흡입력이 유지되는 진공청소기를 1979년 만들었다.

그후 견본품을 들고 유명 기업을 다니며 설명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사재를 털어 회사를 설립해 직접 제품화했다. 1993년 초기 제품을 개량한 ‘듀얼 사이클론 진공청소기’가 출시되면서 다이슨사는 급성장해 전세계 청소기 시장을 점령했다. 큰 먼지는 필터가 달린 바깥쪽 통이 돌아가면서 통과되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따라서 필터가 막히지 않아 흡입력이 유지된다. 필터를 통과한 미세먼지는 깔대기모양의 안쪽 통이 돌아가면서 원심력이 큰 좁은 쪽으로 이동해 역시 아래로 떨어진다. 따라서 기존 청소기처럼 미세먼지가 날리지 않는다.

먼지주머니 타입보다 훨씬 비싼 가격임에도 다이슨 진공청소기가 인기를 끄는 것은 이처럼 성능이 뛰어날뿐더러 쓰기 편하고 위생적이기 때문. 먼지를 비우려면 흡입통을 분리해 쓰레기통 위에서 버튼을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이제 억만장자가 된 제임스 다이슨은 “디자인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라며 “어떤 문제라도 그것을 세분화해 해결하다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일본 브리지스턴사이클사의 자전거 역시 소비자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불편함을 없앤 제품이다. 다리의 회전운동은 체인을 통해 뒷바퀴에 전달된다. 따라서 자전거 체인이 벗겨지고 기름이 묻어도 ‘필수부품’이므로 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체인 드라이브대신 ‘샤프트 드라이브’를 자전거에 도입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동력을 뒷바퀴에 전달하기 위한 샤프트는 긴 강철봉의 끝단에 베벨기어를 설치해 동력의 방향을 90。로 변환시킨다.

탠저린의 이돈태 부사장은 “유명 디자이너 가운데는 엔지니어가 많고 심지어 저널리스트 출신도 있다”며 “생활의 불편함을 개선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획기적인 디자인을 탄생시키는 밑바탕”이라고 말했다.

불편한 체인 대신 ‘샤프트 드라이브’라는 방식을 도입한 일본 브리지스턴사이클사의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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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디자인이 매뉴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