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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디자인은 대화다

유머와 세련됨의 공존

“잠깐, 링이 어떻게 떠있는거지?”

연필꽂이에 연필이 하나 꽂혀있구나 생각하다가 문득 연필꽂이의 링이 허공에 떠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마치 마술을 본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봐야 비스듬이 꽂혀있는 연필이 사실은 기둥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디자이너 아드리안 올라부에나가가 디자인한 이 제품은 오늘날 좋은 디자인이 갖춰야할 요소, 즉 ‘유머와 세련됨의 공존’을 잘 보여준다. 이 연필꽂이를 선물받은 사람은 선물을 준비한 사람의 재치에 흐뭇해할 것이고, 연필꽂이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기발한 디자인을 설명하는 즐거움을 두고두고 누릴 것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필립 스탁이 자신이 디자인한 오토바이 ‘애프릴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위의 주시 살리프도 그의 작품.


주방용기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는 이탈리아 알레시사의 제품들 가운데 하나인 감귤류과즙기 ‘주시 살리프’(Juicy Salif)도 기발한 디자인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필립 스탁의 작품으로 디자인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한 레스토랑에서 오징어 요리를 먹던 그는 그 위에 레몬즙을 뿌리다 ‘영감’을 얻은 것. 그는 즉시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아이디어를 스케치했다.

이렇게 탄생한 쥬시 살리프가 디자인의 측면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은 ‘기발한 형태’이면서도 어느 과즙기보다 ‘뛰어난 기능’을 구현했기 때문. 오렌지나 레몬을 반으로 잘라 위에 놓고 누르면서 돌려주면 과즙이 흘러내리며 밑의 뾰족한 꼭지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쓰고 난 과즙기는 물로 한번 씻어주면 된다.


연필꽂이


미국 노스웨스턴대의 심리학자 도널드 노먼 교수는 쥬시 살리프를 지난해 출간한 그의 책 ‘감성적 디자인’의 표지사진으로 싣고 본문에서 그 매력을 자세히 분석했다. 주방에 놓여 있는 주시 살리프를 보고 사람들은 ‘뭐하는 물건인가’ 내지 ‘장식품인가보다’라고 반응한다. 그러다 집주인이 과즙을 짜는 시범을 보이면 감탄한다는 것.

필립 스탁은 어떤 자리에서 “내 과즙기는 레몬과즙을 짜기 위한게 아니라 사람들이 대화를 시작하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에피스톨라(Epistola)


라틴어로 ‘편지’를 뜻하는 에피스톨라는 편지봉투 개봉칼이면서도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편지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이다. 스웨덴의 디자이너 테오 엔룬트의 작품으로 수차례 국제 디자인상을 받았다.

소비자가 제품을 완성하는데 참여하게 함으로써 의미를 더해주는 디자인도 있다.
러시아의 건축가 아르키텍트 카르코프가 디자인한 방사형 전등갓 ‘놈(norm)69’는 69개의 부품형태로 판매된다. 구매자는 69개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노먼 교수는 위와 같은 제품의 디자인적 특성을 ‘반성적 디자인’(reflective design)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즉 첫눈에 보기에 좋거나 써보니까 편해 만족한 단계를 넘어 그 이상의 가치를 줄 수 있는 디자인의 측면이다. 오늘날 디자이너들이 가장 고심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 하면 싫증이 나지 않는 디자인을 만드냐는 것이다.

눈에 확 들어와 샀다가 막상 한두번 써보고 처박아둔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노먼 교수는 “예쁘거나 눈에 띠는 형태가 기능과 무관할 때 사람들은 곧 싫증을 느낀다”며 “위대한 문학작품이나 그림처럼 오랫동안 사용해도 그 가치가 느껴지는 것이 위대한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약간의 불편함도 감수한다


시계


시계의 미덕은 무엇일까. 당연히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이리라. 한눈에 쉽게 시간을 볼 수 있어야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최근 정확한 시간을 ‘원천적으로’ 알 수 없게 하는, 즉 시계의 ‘본분’을 망각한 시계들이 버젓이 그것도 일반 시계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 왜 그럴까.

노먼 교수는 “제품은 그것이 구현하는 기능의 총합 이상의 무엇”이라며 “진정한 가치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사용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하는 물건을 통해 자신을 남과 ‘차별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지위 제품’(status product)이다. 지위 제품은 미려한 외관 뿐 아니라 참신한 디자인 컨셉이 중요하다.

오늘날의 소비자는 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할 각오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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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박근태 기자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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