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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종이 전성시대

정전기 줄인 투표용지부터 불타지 않는 난연지까지

"내 나이가 올해로 1903세에요. 참 오래도 살았네요. 요즘 젊은 후배 중에 잘 나가는 녀석은 매년 기억 용량을 두 배씩 늘리면서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지요. 주변에선 이제 이런 녀석들에게 밀려 내 인기가 곧 시들해질 거라며 걱정을 하곤 했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건재해요. 그 유명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도 10년 전 내 운이 다했다고 예언했지만, 보세요, 틀리지 않았소."

바야흐로 종이 전성시대다. ‘종이의 멸종’은 정보기술(IT) 시대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종이 없는 사무실’은 그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 중 하나였지만 오히려 종이소비량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종이가 필요 없는 전자시대지만 복사용지, 물건 포장용지의 수요가 늘어난 데다 비데 전용 화장지, 자동차 오일이나 에어컨의 필터 같은 신규 수요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자동차 연비가 향상되면서 통근거리가 길어지고 장거리 여행이 많아져 연평균 주행거리가 늘어난 것과 같다.

종이의 ‘생존전략’은 맞춤형 변신이다. 먼지가 나지 않아야 하는 반도체 공장에서는 무진지로, 음식을 담는 포장용기에는 무형광지로, 나무를 ‘먹어치운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친환경 재활용지로 카멜레온처럼 모습을 바꿨다. 외양도 기능도 ‘착한’ 만능종이를 만나보자.
 

투표 당일 날씨가 조금만 건조해도 정전기가 발생해 투표용지가 서로 엉겨붙을 수 있다. 정전기가 일어나지 않는 투표용지가 필요한 이유다.


투표용지 | 정전기 발생 확 줄여

지난 4월 9일 제18대 총선 투표가 있었다. 1인 2표를 행사해야 했기 때문에 흰색과 녹색의 두 가지 투표용지가 사용됐다. 기표용구로 ‘점 복’(卜)자를 찍고 투표용지를 접어 투표함에 넣으면 투표가 끝난다.

2002년 국내에 전자개표시스템이 도입되면서 투표용지에 몇 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따라붙었다. 투표부터 개표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기 때문에 일반 종이와 달리 강도가 높아야 한다. 투표용지를 접었다 펴기 때문에 복원력도 좋아야 한다. 또 개표기에 넣었을 때 용지 걸림이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자판독에서 오류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최창활 무림SP 품질보증팀 제품개발파트장은 “전자 판독 오류를 방지할 수 있도록 일반 종이보다 평평하고, 정전기가 발생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투표용지는 전자개표기에 맞도록 제작된 특수지인 셈이다.

지난 2004년 4. 15 총선 당시에도 무림SP가 투표용지를 공급했다. 중앙선관위에 전자개표기를 공급하는 한틀시스템에서 무림SP에 투표용지 개발을 의뢰했고, 제지연구소는 투표용지를 수차례 전자개표기에 넣어 테스트를 마쳤다. 덕분에 당시 전자개표에 오류가 없었다. 안상철 무림SP 홍보팀장은 “개표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자칫 사태가 커질 수 있다”며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당락이 투표용지에서 시작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불로부터 종이를 지키는 수호천사는 종이 표면에 코팅된 할로겐족 화합물이다.


난연지 | 할로겐족 원소와 환상의 짝꿍

종이만큼 불 앞에서 약한 존재도 없다. 그런데 불을 이겨내는 용감무쌍한 종이가 있다. 난연지에 불을 붙이면 타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꺼진다. 종이에는 그을린 자국만 남는다. 이런 성질 때문에 난연지는 가정이나 사무실 벽지로 많이 이용된다. 난연지가 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종이 표면에 브롬, 염소 같은 할로겐족 화합물을 코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브롬화합물 중 브로모바이페닐(bromobiphenyl)을 종이 표면에 바르면 연소가 지연된다. 일단 불이 붙어야 종이가 타는데, 브롬 같은 할로겐족이 매우 안정된 원소이다 보니 종이가 산소와 결합해 타들어갈 수 있는 착화 과정을 지연시켜 불이 쉽게 붙지 않는다.

무진지 | 먼지 없앤 비밀은 접착제 PVA

종이에는 대개 지분(paper dust)이 있다. 이는 종이 제조 공정과 관련 있다. 나무에서 펄프를 얻어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펄프를 물에 푸는 해리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이 상태로 종이를 만들기에는 셀룰로오스(섬유)의 길이가 너무 길어 엉키기 쉽다. 그래서 섬유를 두드리고 자르는 고해(鼓解) 과정이 필수다. 먹을 때 목에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방망이로 북어를 두드리는 이치와 같다.

바로 이때 지분이 생길 수 있다. 섬유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개중 짧은 섬유가 고해 과정에서 잘려 미세한 섬유가 된다. 또 종이를 만들 때 펄프 외에 돌을 아주 작게 갈아 넣는데, 여기에 미세한 입자가 존재할 수 있다. 종이가 마르면 이 미세 입자들이 종이에 붙어 있지 못하고 모두 지분이 되는 셈이다.

반도체 공장의 클린룸에서는 단 한 점의 먼지도 불량품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지분이 없는 무진지를 써야 한다. 지분을 없애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폴리비닐알코올(PVA) 같은 화학약품에 종이를 담갔다 빼는 것이다. 폴리비닐알코올이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종이에서 지분이 쉽게 떨어진다.

무형광지 | 인체에 무해한 ‘웰빙 종이’

2004년 정부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종이타월과 키친타월의 중금속 성분을 관리 대상 유해물질로 규정한 것을 비롯해 재생펄프와 인쇄잉크의 사용에 따른 환경호르몬도 관리대상에 포함시켰다. 식품 포장재가 인체에 안전한지 정부가 관리감독 하겠다는 속내였다. ‘웰빙 바람’을 타고 사람들도 인체에 무해한 식품 포장재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부터 치킨, 일회용 도시락까지 식품 포장용 종이에도 웰빙이 대세였다.

당시 무림SP는 무림그랜드보드(MGB)라는 ‘웰빙 종이’를 선보였다. MGB는 한국생활환경시험연구원이 테스트한 결과 100% 무염소 펄프, 무형광 제품임이 인정됐다.

하이포염소산소다 같은 염소계 물질로 종이를 표백하면 종이에 소량의 염소가 남아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종이를 하얗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첨가하는 형광염료 역시 암을 유발한다는 주장이 있다.

최창활 무림SP 품질보증팀 제품개발파트장은 “일반 종이를 형광등에 비추면 파랗게 보인다”며 “이는 종이에 형광처리가 됐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MGB는 형광처리를 하지 않은 무형광지다. 이 때문에 무엇이든 물고 빠는 습성이 있는 유아용 책에도 MGB가 적격이다. 최 파트장은 “MGB는 교촌치킨, 베스킨라빈스 같은 음식용 포장지로 사용된다”며 “앞으로도 꾸준히 수요가 늘 것”으로 기대했다.
 

LG디스플레이가 개발 중인 휘어지는 디스플레이. 종이처럼 자유자재로 구부릴 수 있다.


종이 닮은 디스플레이 전자종이

디스플레이가 종이를 닮아가고 있다. 일명 ‘전자종이’로 불리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다. 2002년 개봉한 SF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경찰에 쫓기는 주인공 톰 크루즈가 지하철에 탔는데, 승객들의 신문에 속보가 나오면서 바로 톰 크루즈의 얼굴이 뜬다. 마치 종이처럼 가볍고 휘어지면서 한 장으로 수만 장의 서류를 볼 수 있는 ‘전자종이’로 신문을 만든 것이다. 이후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전자종이’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고편’이 됐다.

지난해 5월 LG디스플레이(옛 LG필립스LCD)가 A4 크기의 컬러 전자종이를 개발하면서 영화 속 시대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두께는 0.3mm 정도로 종이보다 두껍지만 다른 디스플레이보다는 훨씬 얇다. 유리 기판 대신 금속박과 플라스틱 기판을 사용해 자유자재로 구부릴 수 있고 잘 깨지지도 않는다. 또 어느 지점에서 구부려도 정면에서 보는 것처럼 형상이 일그러지지 않는다. 기능은 디스플레이지만 외형은 종이에 가까운 셈이다.

기본적인 작동원리는 LCD와 동일하다. 전기장 안에서 하전된 입자가 양극이나 음극으로 이동하는 전기영동 현상을 이용해 투명전극 사이에 잉크 미립자층을 쌓고 원하는 영역을 대전시켜 잉크 미립자가 디스플레이 표면에서 이동하도록 했다. 전압을 제거해도 잉크 미립자의 위치 변화가 없어 표시된 이미지가 유지되기 때문에 마치 종이에 잉크로 인쇄한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다만 LCD는 디스플레이 패널 뒤쪽에서 빛이 나와 환하게 보이는 반면 전자종이는 주변 밝기에 따라 반사된 가시광선을 통해 형상을 인지하기 때문에 약간 어둡게 보인다. 책을 읽을 때 주위에 빛이 없으면 읽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눈의 피로도는 LCD에 비해 오히려 덜하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 1월 이 전자종이보다 4배 이상 해상도를 높인 전자종이를 선보였다. 언제 어디서든 말아서 휴대할 수 있는 신문 같은 디스플레이, 이젠 꿈이 아니다.

무한변신  종이의 도전

금붕어는 종이어항에 산다

종이는 물이나 잉크, 기름을 잘 흡수한다. 이는 종이의 구성 성분인 셀룰로오스의 화학구조 때문이다. 셀룰로오스의 수산화기(OH)들이 서로 수소결합을 하고 있어 내수성이 약하다. 하지만 일본의 한 업체는 ‘종이는 물에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2006년 종이어항을 선보였다. 종이가 전혀 물에 젖지 않도록 방수처리를 한 것. 시간이 오래 지나도 방수성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 습자지처럼 투명한 종이로 어항을 만든다면 유리어항이 곧‘왕좌’를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

무한 재사용 종이

인쇄된 종이를 프린터에 넣고 다시 인쇄하면 이전 내용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새로운 내용이 인쇄된다? 종이를 재활용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종이에 묻은 잉크를 제거하는 일이다. 잉크를 빼기 위해서는 종이를 화학약품에 담갔다가 자르고 건조하는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 결국 종이를 다시 만드는 셈. 이 때문에 펄프에서 잉크 입자를 선택적으로 공격해 종이에서 잉크만 빼내는 효소가 개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2006년 표면에 특수한 물질을 코팅한 종이와 특수한 프린터를 사용해, 잉크를 제거할 필요 없이 무한히 재사용할 수 있는 종이를 개발했다. 종이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펄프로 만들었으므로 종이는 종이.

종이실로 상자를 꿰맨다면

스테이플로 종이상자를 접합하면 작업하기 간편하고 튼튼하지만 재활용할 때 상자와 스테이플을 분리해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스테이플 대신 종이실을 쓰면 종이상자를 생산하는 속도가 다소 느리지만 지력증강제를 넣었기 때문에 강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종이실은 재활용 종이를 새끼줄 꼬듯 실로 꼰 것.

삼겹살은 종이 포일로 굽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삼겹살은 불판 바닥에 알루미늄 포일을 깔고 구워야 제 맛이다. 포일의 열전도율이 좋아 고기가 잘 익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름이 쉽게 튀고 고기가 종종 탄다고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을 터. 그렇다면 앞으로 알루미늄 포일 대신 종이 포일을 깔고 삼겹살을 구워보자. 국내 업체가 미국 식품의 약국에서 승인한 친환경 코팅제를 종이에 입힌 종이 포일을 지난해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발암물질을 갖고 있다는 오명에 시달리는 알루미늄 포일보다 웰빙이라는 장점까지 ‘맛있게’ 느껴진다.

3톤짜리 실어도 거뜬한 종이 팔레트

종이에 3톤짜리 물건을 실을 수 있다? 종이의 일종인 미세골 골판지를 우물 정(井)자로 끼워 맞추면 나무상자보다 튼튼한 ‘슈퍼상자’가 탄생한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불러야 할 듯. 3톤이나 되는 무거운 물건을 실어도 종이상자가 끄떡없는 이유는 바로 골판지가 십자로 교체되는 구조 때문이다.

종이의 무한도전

환경보호와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나무를 잘라 펄프를 제조해 종이를 만드는 전통적인 방법에 비상이 걸렸다. 나무 대신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없을까. 일각에서는 대나무 등으로 종이를 만드는 방법이 개발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충남대 임산공학과 서영범 교수가 김, 우뭇가사리 같은 홍조류로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홍조류에는 홍조섬유가 밀집돼 있어 목재에 비해 저온(80~100℃)에서 섬유를 쉽게 추출할 수 있고, 홍조섬유 자체가 흰색이어서 따로 표백할 필요도 없다.

2008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신준섭 교수
  • 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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