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utterstock, 박주현
“가이아 정거장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 거기에는 항상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
-에밀리 테쉬 ‘어떤 절박한 영광(Some Desperate Glory)’ 중
영국의 작가 에밀리 테쉬의 소설 ‘어떤 절박한 영광’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우주정거장, 가이아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키르(Kyr)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소설로 테쉬는 2024년 ‘SF 계의 노벨 문학상’ 휴고상을 수상했다. 휴고상의 수상자는 전 세계 SF 팬들이 모인 세계 최대의 SF 행사 ‘월드콘(세계 SF 컨벤션)’에서 투표를 통해 결정된다. 휴고상 수상작과 월드콘을 보면 그해 SF 트렌드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발표자로서 월드콘에 다녀온 박인찬 숙명여대 영문학부 교수가 ‘포스트휴머니즘’과 ‘다양성’을 키워드로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해왔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SF 행사인 월드콘(Worldcon)이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8월 8일부터 닷새 동안 열렸다. 월드콘은 ‘World Science Fiction Convention(세계 SF 컨벤션)’의 줄임말로 세계 과학소설 협회가 매년 개최하는 행사다. 월드콘이 SF 애호가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팬덤 중심의 행사라는 점 때문이다. 컨벤션이라는 명칭에 맞게 학술 발표뿐 아니라 SF 전문 출판사들이 참여하는 도서 전시, 판매, 팬 사인회, 좌담회, 공연, 연주회 등의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특히 월드콘 후반부에는 SF계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휴고상을 선정하는 투표와 시상식이 열린다.
대회 첫날 등록을 위해 행사장에 들렀을 때, 건물 입구는 길게 줄을 선 사람들로 붐볐다. 안으로 들어가자 체육관만 한 크기의 실내는 떠들썩한 공연장을 방불케 했다.
포스트휴머니즘 |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 논의 활발
필자처럼 SF를 전공하는 연구자에게 월드콘은 한 번은 꼭 참여해 보고 싶은 대회다. 특히나 필자에게는 전체 행사 중에서도 ‘아카데믹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싶은 구체적인 목적이 있었다. 바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에 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고, 그 사례로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의 SF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에 힘입어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가 돼 가고 있다. 이제 인간은 인공지능(AI)과 대화하며 위안을 얻고, 기계의 도움을 받아 신체를 증강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과도한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기후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그 결과 지구는 생명 다양성이 무너진 여섯 번째 대멸종을 향해 가는 중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이런 변화에 놓인 ‘포스트휴먼’ 즉 현재 살아가는 후기 인류의 복합적인 모습을 다루는 분야다. SF는 포스트휴머니즘의 다양한 모습을 다루는 데 완벽한 장르다. 과학기술이 인간과 지구를 어떻게 바꿔 놓는지에 대해 사유한다는 면에서 SF와 포스트휴머니즘은 결이 같다.
필자는 운 좋게도 이번 SF 월드콘에서 ‘포스트휴먼의 곤경을 넘어: 최근 한국 SF에 나타난 비판적 비-인간주의’라는 제목의 발표를 할 기회를 얻었다. 이 발표는 제프 밴더미어의 뉴위어드 SF ‘소멸의 땅’과 중국 현대 SF를 비교하는 다른 발표자와 함께 ‘포스트휴먼의 미래’라는 세션에 배치됐다.
세션의 취지는 최근 SF 작품들을 통해 현재의 인간 이후 나타날 미래상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필자는 과학기술 발전의 가속화와 기후변화 사이에 처한 인간의 위기를 ‘포스트휴먼의 곤경’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대립이 포스트휴머니즘 담론 내에서도 트랜스휴머니즘과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사이의 메우기 힘든 간극을 통해 드러난다고 봤다.
필자는 포스트휴먼의 곤경에 대한 대안으로 기존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되 인간을 아예 배제하는 비인간주의와는 거리를 두는 ‘비판적 비-인간주의’의 관점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것이 잘 나타나는 사례로서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과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 같은 한국 작가들의 SF소설을 제시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연상케 하는 김초엽의 소설은 기후재앙에서 살아남은 비인간(식물)과 인간의 생존 서사를 통해 공존의 미래를 상상한다.
근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한 천선란의 소설은 장애인, 동물, 로봇 같은 비주류 존재들의 최대한 느리게 뛰는 삶을 통해 성과와 경쟁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1 휴고상 트로피(위)와 글래스고 2024 월드콘 참가자의 복장(아래)에서 SF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2 2024년 휴고상 수상자들. 해마다 여성 수상자 비율이 높아지는 SF 트렌드의 중심축 변화가 보인다.
한국 여성 SF | 참신한 시각으로 세계의 이목 끌었다
청중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세션을 맡은 좌장의 노련한 진행 덕에 충분히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발표보다도 청중과 나눈 질의응답이 더 기억에 남는다. 청중은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이 한국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나아가 젊은 여성 작가들의 활동에 힘입어 SF가 붐을 일으키는 데 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이에 필자는 “지금의 한국 SF는 문학적 성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만, 그 이상의 사회문화정치적 현상으로도 봐야 한다”고 응답했다. 한국 SF에는 사회적 변화를 갈망하는 소수자들의 시각이 담겨있다. 이들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사회의 일방적인 가속화를 비판하면서, 가부장적인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배제된 인간과의 연대로 향해 있다.
필자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젊은 작가들로부터 기존 SF와는 차별화된 한국 SF의 영토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끝으로, 김초엽과 천선란의 작품들이 조만간 영국과 미국의 주요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니 관심을 가져 달라는 말로 발표를 마쳤다.
성별, 인종, 문화의 다양성 | 2025 월드콘을 기대하며
이번 월드콘에서는 특히나 SF를 교육과 연관해서 고민하는 세션들이 눈에 띄었다. 가령,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과학기술 연구소 교수들이 중심이 된 ‘윤리 교육을 위한 SF’ 세션은 강연장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놀라웠던 점은 SF 팬들과 연구자들이 빅 테크가 주도하는 AI 기술을 일방적으로 추종하기보다 그것에 내재한 백인 중심주의, 젠더 편향, 양극화 현상 등의 문제를 거리낌 없이 비판한다는 것이었다. SF를 기술 개발이 빚어낼 다양한 문제점을 성찰하는 장으로서 접근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간 조명받지 못했던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작가들에 관한 논의가 크게 늘었다는 것도 눈에 띄었다. 필자가 한국 SF에 관한 발표를 구상한 것도 비슷한 취지에서였다.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 SF를 선도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과 아프로퓨처리즘, 또는 디아스포라 같은 주제들이 여러 세션에서 등장하는 것 역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올해 월드콘은 SF 트렌드의 중심축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변화는 올해 휴고상 수상자들에서도 목격된다. 장편, 중편, 단편 등 주요 부문의 수상자들이 모두 여성이었던 것이다. SF는 더 이상 남성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게 입증된 것이다. 최근의 한국 SF를 이끌다시피 하는 작가들이 주로 여성이라는 사실은 희귀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80년 넘게 이어져 온 월드콘이 세계 최대의 SF 컨벤션을 표방하면서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서구의 몇몇 국가에서 주로 개최됐다는 점은 미래의 월드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언젠가 서울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의 도시에서 개최된 월드콘에 참가할 날을 그려본다.
박인찬
숙명여대 영문학부 교수(현대영미소설, SF, 미국 문학과 문화 전공). 현재 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장 및 HK+사업단장을 맡고 있다. chan9320@sookmyung.ac.kr
용어 설명
트랜스휴머니즘 : ‘대중적’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도 불리며, 과학기술에 의한 신체 강화 또는 초월을 맹신하는 태도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 인간의 신체성 또는 물질성을 재확인하며,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배제된 인간 및 비인간 존재와의 상호의존과 연결을 추구하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