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어슐러 K. 르 귄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SF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한국에서 SF가 떠오르고 있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드디어 해외에서도 한국 SF 문학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중국성운상 번역작품 부분 금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관심을 끌었고, 이후 정세랑, 천선란 작가의 작품들이 주목을 받았다. 이들 작품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SF의 언어로 해부해 참신하다는 평을 받는다. 한국 SF가 더욱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떤 문을 열어야 할까?
SF 작가, SF 평론가, SF 해외 판권 에이전트 등 4인과 이야기를 나눠봤다.
김미래 기자
모두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한국 SF 장르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 건데요. 한국 SF의 트렌드와 해외 SF 트렌드의 차이가 있을까요?
박진희 실장
최근 해외 도서 시장에서 로맨스와 판타지를 결합한 ‘로맨타지’ 장르가 큰 인기를 끌고 있어요. 문학 분야에서도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이 크게 두드러지기 때문에 북토커(책과 관련된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나 인플루언서들의 활동을 필두로 로맨타지 장르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아직까지 영미권의 로맨타지 카테고리에 들어맞는 작품이 많이 소개되진 않았어요. 최근 번역 출간된 레베카 야로스의 ‘엠피리언 시리즈’가 대표적인 작품이죠.
김성일 작가
현재 영미권 SF는 젠더와 인종 등 소수자 이슈를 매우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아카디 마틴의 ‘어 메모리 콜드 엠파이어’는 제국에 파견된 소국의 외교관이 겪는 파워의 밸런스 차이와 문화 충돌을 다룹니다. 이 소설처럼 반제국주의적 시각을 반영한 SF 작품들이 더 많아지고 있죠.
한국에서는 ‘판타지’라는 장르가 주로 웹소설로 옮겨간 반면, SF 장르는 종이책으로 출간돼 문학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영미권과는 다른 독특한 현상이에요. 해외에서는 SF와 판타지가 구분되지 않아요. 마케팅적인 차이가 있을 뿐 내용적으로는 거의 하나로 취급되죠. 그런데 한국은 좀 다릅니다. SF와 판타지는 거의 완전 별개예요. 한국의 SF는 로맨스나 판타지 쪽이 아닌 독자적인 장르로 성장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이서연
11월 8일 서울 충정로 동아사이언스 사옥 지하 스튜디오에서 SF 작가, SF 평론가, SF 에이전시 관계자와 함께 ‘한국 SF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박해울 작가
한국 SF는 그때그때 주목받는 과학적 이슈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 같아요. 요즘 나오는 한국 SF를 보면 챗GPT, 인공지능(AI), 로봇 산업 같은 주제가 자주 다뤄지는데, 최근 과학기술의 트렌드를 반영한 소재들이죠. 2000년대 초반에는 생물 복제가 뉴스에 많이 등장하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그때 창작된 SF들 중에는 복제 관련 소재를 쓴 것들이 많아요.
심완선 평론가
저 역시 한국 SF가 과학계 이슈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와 이슈를 많이 다루고 있다고 느낍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SF와 판타지가 비현실적인 요소를 통해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는 장르인데, 최근 작품들은 현실과는 별개의 세계를 창조하기보다는, 그저 현실을 담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비현실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아요. 물론 이런 접근이 틀렸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SF 장르에 익숙한 사람으로선 ‘더 할 수 있는데, 더 갈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김성일 작가
동감해요. 요즘 주로 핫한 과학적 이슈를 사용해 SF를 쓰는데, 사실 대부분의 주제는 30년 전에 이미 SF 소설에서 다뤄졌던 것들이에요. 지금 와서 그 소재를 가져온다고 해도, 결국 30년 늦은 셈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다룬다면 늦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슈가 주목받는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소설에 옮겨 담기보다는, 과거에 SF에서 했던 것들을 참고하고, 그 위에서 발전시키거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진정 새로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미래 기자
의미 있는 지적이네요. 다음 주제인 글로벌 시장 진출 전략으로 넘어가 보죠. 한국 SF가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요?
박진희 실장
한국 SF를 해외에 수출할 때 고민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한국 SF는 SF 장르 문학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번역 문학이라는 점이에요. 특히 영미권 시장에선 한국 SF를 SF로 보기보다는 SF 요소나 환상성이 가미된, 그러면서도 사실주의 문학의 요소도 혼재하는, 일종의 사변소설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아요. 때문에 장르 구획을 거스르는 ‘genre-defying’이라는 수사를 많이 사용합니다.
계속 수출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에서, 앞으로는 작품별로 접근을 달리할 계획입니다. 꼭 ‘이건 SF니까 SF 카테고리에 넣어야 한다’는 식이 아니라, 작품이 SF 장르에 얼마나 맞춰져 있는지, 판타지적인 요소는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김성일 작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 소설이 외국 시장에서 딱 맞는 카테고리로 매칭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SF가 독자적으로 발전했고, 특히 2019년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형성된 고유한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죠.
저도 최근 첫 소설이 영어로 번역돼서 미국에서 다른 판타지 소설들과 함께 출간됐는데, 한국에서는 큰 반응이 없었던 반면, 미국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느낀 점은, 한국에서 잘 된다고 해외에서 잘 된다는 보장은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또 한국 문학으로 해외에 나가는 것이냐, 특정 장르 문학으로 나가는 것이냐에 따라 접근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위쳐’ 같은 작품은 폴란드 문학으로 인식되지 않고, 그냥 판타지 소설로 읽히잖아요. 마찬가지로, 한국 SF가 충분히 인기를 얻고 외국 시장과 잘 맞는다면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작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국 SF가 영미권 SF와 닮아지거나, 반대로 영미권 독자들이 한국 SF의 문법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해요. 개인적으로는 영어권 작품들이 한국에 더 많이 번역돼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장르에 익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박해울 작가
저는 글을 쓰는 입장으로서 해외까지 고려할 여유가 없어요. 다만, 항상 마음 속에서는 해외 시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저는 해외 장르소설을 무척 좋아해서 신작을 잘 찾아보는 편이고, 해외에서는 이런 느낌의 작품이 인기가 좋구나 하고 감각을 익혀두려고 합니다.
심완선 평론가
번역 지원 등이 늘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죠. ‘저주토끼’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관련 인터뷰나 기사가 쏟아졌을 때 실감했어요. ‘한국 장르문학 작품성이 많이 성장했다’는 보도가 많더라고요. 조금 의아했어요. ‘저주토끼’의 수록작은 대체로 나온 지 한참 된 작품이거든요. 심지어 하나는 1999년 수상작이에요. 오랫동안 존재하던 소설을 두고 이제서야 새로워하는 듯했어요. 이건 기존 번역 사업이 주로 순수문학에 치중됐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여전히 언론과 출판계에서는 장르 문학을 문학 바깥의 일로 취급하는 시선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심지어 해외에서는 호러 상이나 미스터리 상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그저 ‘한국 소설’이라는 틀로만 소개되죠. 여전히 장르 문학을 낯설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런 장르에 대한 결벽증이나 경계심은 내려놓고, SF가 일반 문학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장르의 가능성을 존중했으면 좋겠어요.
국내 SF 소설 판매량 추이
2019년 국내 SF 소설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291%나 상승한 이후, SF 소설 판매량은 꾸준히 높게 유지되고 있다. 이는 김초엽, 배명훈, 정세랑과 같은 젊은 작가들이 등장하며, 한국적 정서를 담은 SF 작품들을 흥행시켰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김미래 기자
말씀해주신 것처럼 SF 장르가 더 성장하기 위해선 SF 작품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할 텐데요. 더 많은 새로운 독자들이 유입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박진희 실장
저는 작가들을 대변하는 에이전트로서, 작가들이 어떻게 활동하고 집필하는지를 지켜보는 입장인데요. SF 작가들이 한국에서 ‘이제 SF를 안심하고 쓸 수 있어’라는 믿음을 가지고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좋은 작품은 작가로부터 나오니까요.
예를 들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한국콘텐츠진흥원 같은 유관 기관들에서 레지던시 사업처럼 일정 기간 작가가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창작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 더 확대되었으면 합니다. 더 많은 작가들이 지속적으로 창작할 수 있어야 더 좋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김성일 작가
근본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자가 많아지는 것 말고는, 출판사 입장에서든 사업적인 면에서든 방법이 없으니까요. 작가 입장에서도 결국 독자가 많아지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만약 정책적으로 이런 부분을 돕는다면 글쎄요. 정책이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는 사업 승인, 예산 배정까지 집행 과정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누가 정책 지원금을 받게 될지를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불투명할 때도 많거든요. 이런 역할을 오히려 출판사나 에이전시에서 더 자율적으로 맡을 수 있게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보문고, 사라 J.마스 페이지
1 영미권에서 가장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는 ‘로맨타지’ 소설 ‘불꽃과 그림자의 집’ 책 표지. 주인공이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신화 속 존재들과 얽히며 자신의 운명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영국, 미국, 호주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교보문고, 사라 J.마스 페이지
2 이 책을 쓴 저자 사라 J. 마스의 모습. 그녀는 제2의 J.K롤링으로 불린다.
박해울 작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마음이 좀 복잡해요. 창작자 입장에서, 주변에 동료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도 그렇고 다른 창작자들도 “이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정말 자주 해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투잡을 하겠다”는 분들이 많고, 저도 비슷한 상황이에요.
그런데 작가라는 사람들은 참 재밌는 게, 생활비가 조금이라도 보장되면 다시 쓰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안 쓰려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때문에 지원 사업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지원 사업의 수혜를 받는 인원 수가 너무 적어요. 이런 부분이 좀 개선되면 좋겠어요.
SF의 부흥을 위해서는 SF 작가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프로 작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쉽게 ‘SF 한 번 써볼까?’ 하고 쉽게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고, 그런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장도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서, SF를 같이 쓰자고 권하기에도 조금 난감한 부분이 있어요.
심완선 평론가
작가로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평론가로서도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 전업 평론가가 많지는 않고 저 역시 이 일을 얼마나 오래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럼에도 만족도는 엄청 높아요. 너무 좋아서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큽니다.
결국 책이 잘 팔려야 해요. 사람들이 더 많이 읽어야 하고요. 물론 노동시간 감축과 최저임금 인상 같은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지만, 그와 별개로 독자 개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도 중요해요. 듀나 작가님이 말씀하신 게 인상적이었는데요, “장르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관습과 언어를 이해하고 최신작을 과대평가하지 않기 위해 고전을 읽으라, 또한 현재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최신작도 많이 읽으라”는 거예요. 결국 많이 읽어야 한다는 얘기지만, 고전과 최신작을 균형 있게 읽는 게 필요하다는 거죠.
정책적 지원이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노력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합니다.
flicker
세계 최대의 SF 행사 ‘월드콘’에서 참가자들이 코스프레 의상을 겨루는 ‘가면 무도회’. 월드콘에서는 SF와 판타지를 주제로 한 그림, 조각품 전시부터 한 해 최고의 SF 작가에게 수여하는 휴고상 시상식, 라이브 연극 공연까지 SF와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국립극장
“딴생각을 하면 안 됐는데 문득 하늘이 푸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날이 맑은 날 초원을 뛰고 있다는 상상을 했거든요. 스크린으로 보이는 가짜 말고 진짜요.”
-천선란 ‘천 개의 파랑’ 중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