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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에 그릇과 수저만 있다고 배부른가

교실에서 보내는 편지


부족한 교구로도 간단한 시범실험을 통해 학생들의 탐구의욕을 높일 수 있다. 사진은 과산화수소에 주방용세제와 식용색소를 넣고 요도드화칼륨을 가하는 실험
 

교구설비 기준대로 갖출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좁은 실험실에서 많은 학생들이 수업하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시설기준들이 많다.

J형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신학기가 시작된 이후 실험실 정리하랴, 일년 계획 세우랴, 필요한 기구며 시약 신청하랴,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셨겠지요 언제나 생활 속의 평범한 소재에서, 어렵게만 느껴지는 화학을 누구에게나 친숙한 과학으로 만드는 형. 거의 모든 수업을 실험실에서 진행하시는 그 열정과 치밀한 모습때문에 저 뿐 아니라 형을 아는 모든 이가 형을 존경하게 되나 봅니다.

'금년에는 나도 형처럼 해보자' 하고 다짐하기를 수년. 하지만 한번도 형의 흉내조차 내어보지 못했답니다. 올해는 신년벽두부터 입시를 위한 화학이 아니라 생활 속의 과학으로서 화학을 가르쳐 보기로 단단히 마음 먹고 실험실 정리부터 시작했습니다.

우선 기구를 정리하고 시약을 살펴보았지요. 조금 부족한 느낌은 들었지만 이만하면 충분하겠구나 생각되더군요 그동안 화학과 예산으로 기구며 시약을 사기만 했지 제대로 사용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다음으로 어떻게 가르쳐야 교과서 내용과 실험을 학생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일까? 실생활과 어떻게 연관을 지을까? 등등 수업형태에 대해 생각했답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우선 생활 주변의 과학현상을 쉽게 쓴 책을 읽게 하자' '매 수업 시간마다 빈손으로 들어가지 말자. 하다못해 시약병 하나, 플라스크 하나라도 들고 들어 가자' 그리고 '가능한대로 간단한 시범실험이나 화학적 현상을 이용한 쇼를 보여주자'고 다짐했답니다.

첫 수업시간에 눈금실린더에 과산화수소 주방용 세제 식용색소를 함께 넣고 요오드화칼륨을 가하는 실험을 하게 됐답니다.

이 시간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저 또한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되었지요. 지금까지 그렇게 눈빛을 반짝이며 화학수업에 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간 어떻게 해야 살아있는 과학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몰라 방황하던 제게 희망과 용기가 생겼으며 교사라는 자부심이 충만해지더군요.
다음으로 과학도서를 폭넓게 읽게 할 생각으로 우선 학교 도서관에 들렀지요. 문고판 과학도서를 제외하고는 읽을거리가 별로 없어 대형서점을 뛰어 다니며 과학도서 목록을 작성하고, 예산도 50만원으로 잡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과학도서 신청이 결재 과정에서 거절 당했어요 우리 학교가 교구확보율이 낮아 지난 장학지도 때 지적 받았다며 학교교구 설비기준을 높이기 위해 기구 구입 외의 예산사용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랍니다.

제가 살펴본 바로는 지금 우리가 보유한 기구로도 충분히 실험할 수 있어 보유율이 40%라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더군요 그래서 '학교교구설비 기준'(1992. 2, 서울특별시교육청)을 찾아 살펴보았지요. 제시하고 있는 기준대로 모두 갖출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좁은 실험실에서 많은 학생들이 수업하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고, 십분 활용키가 힘든 기준이 많더군요.

우리 학교의 경우 기준대로 모두 갖추기 위해서는 총 1억 5천만원이 필요하며 부족분만을 구입하는데도 1억2천만원이 필요하더군요. 과학과 1년 예산이 8백만원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교구만 사는데도 15년이 걸리니 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얘긴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교구 확충 계획의 순수한 취지는 높이 사야 되겠지만 보다 현실성 있는 운용이 무엇보다도 아쉬워지더군요.

'밥상에 그릇과 수저만 놓는다고 배가 부른가? 외형적 수치 높이기 보다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혼자 중얼거리며 관리자 앞을 물러나면서, 보이기 위한 수업이 아니라 함께 생각하는 수업, 살아 있는 지식을 전해 주는 수업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어려운가 다시금 절실히 느꼈답니다.

하지만 지금 내 자신이 하고 있는 재미없는 수업을 남의 탓만으로 돌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불합리한 제도 열악한 교육 환경 부족한 교재 등등이 지금의 학교 교육을 비정상적으로 만든 것은 인정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나태함 생활에의 안주 무기력함이 또한 우리 교육이 비정상적으로 되는 것을 방임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지요. 교사들이 진지하게 교재를 연구하는 모습이 익숙한 정경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할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첫 수업시간의 그 초롱초롱하던 눈빛, 항상 가까이서 지켜봐 주시는 형이 다시 제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이제 실험준비실에 가봐야 되겠습니다. 다음 수업시간이 다 되었군요.

다시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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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여상인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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