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유전체학이나 비교유전체학은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있다. 그러나 속도가 문제다.
간세포 하나를 떼내 그 안에 어떤 유전자가 존재하는지 알아낸다고 하자. 인간의 모든 세포에는 23쌍의 염색체가 존재한다. 즉 간세포 하나에 10여만개의 단백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전자 설계도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1만일이 몇시간으로 단축
하지만 모든 세포가 10여만개의 단백질 전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간세포는 간의 기능을 가지는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10여만개의 유전자 가운데 일부만 기능을 발휘해 필요한 단백질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이 가운데 1만개의 유전자가 간세포에서 단백질을 만든다고 가정하자. 우선 전체 DNA에서 1만개의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부위를 찾아야 한다. 이 일은 어떻게 이뤄질까. 단백질을 생성하는 DNA의 정보(예를 들어 ATT, CGA 등 3가지 염기의 배열)는 일단 RNA에 전달된다. RNA는 이 유전정보를 가지고 핵 바깥의 리보솜으로 이동해 이곳에서 단백질을 합성한다(그림). 따라서 간세포 안에서 만들어진 모든 RNA를 골라낸 후 여기에 담긴 염기의 서열을 알아내면 궁극적으로 DNA의 유전정보를 알 수 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이 실험을 수행할 경우 1개의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의 구조를 알아내는데 빨라야 하루가 걸린다. 1명이 간세포의 유전자를 모두 조사한다면 1만일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획기적인 시간단축법이 개발됐다. 불과 몇시간 내에 1만개 유전자의 구조를 알아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간세포의 RNA를 얻은 후 이를 특수 처리해 DNA 구조로 바꾼다. RNA는 구조가 다소 불안정하기 때문에 동일한 유전정보를 지닌 보다 안정된 실험재료를 만든 것이다. RNA는 단일나선이기 때문에 이때 만들어진 DNA 역시 이중나선이 아니라 단일나선 형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게놈프로젝트가 끝났다고 가정하고) 10여만개 구멍 안에 제각기의 유전자가 담긴 칩(chip)을 준비한다. 각 DNA는 단일나선 형태로 준비돼 있다. 간세포의 1만개 유전자를 이 칩의 구멍 모두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10여만개 가운데 1만개의 장소에서 칩의 DNA와 간세포의 DNA 간에 결합이 발생할 것이다. 애당초 같은 종류의 DNA였기 때문이다. 이미 10여만개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모두 밝혀졌다고 가정하면, 결합반응을 나타낸 1만개 유전자가 무엇인지 칩에서 확인해보면 간세포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유전자의 정체가 드러난다. DNA의 염기서열만 알면 어떤 아미노산이 만들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간세포에서 생성되는 단백질 1만개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인간의 유전정보를 고밀도로 담은 DNA칩이 개발됐기에 가능해진 일이다.
DNA칩은 말 그대로 인간의 유전정보인 DNA를 컴퓨터의 반도체 칩처럼 우표 크기의 판 위에 심어놓은 장치다. DNA칩은 기존의 분자생물학적 지식과 기계공학, 그리고 전자공학의 기술이 접목해 만들어졌다. 기계자동화와 전자제어기술 등을 이용해 수백개부터 수십만개에 이르는 DNA를 아주 작은 공간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돌연변이 검색에 효과
DNA칩에 우리가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검사대상자의 혈액이나 조직 등에서 추출한 DNA 샘플을 반응시켜 그 결과를 컴퓨터로 처리한다. 샘플에 담긴 DNA를 한꺼번에 칩에 반응시켜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기존 방법으로는 며칠씩 걸리던 검사가 몇시간 안에 끝난다.
SF영화 '가타카'에서는 손가락 피 한방울로 유전정보가 순식간에 판독돼 신분증의 지문처럼 본인 여부를 아는 장면이 등장한다. DNA칩은 이런 영화의 상상력을 현실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이다.
어떤 이는 DNA칩의 등장을 70년대 초반 반도체 칩의 등장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반도체 혁명을 이끌었던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서 최근 가장 발전 속도가 빠른 기업들이 대부분 생명공학회사다. 이들 중 많은 회사가 DNA칩의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DNA칩의 응용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개발한 사람도 사용하는 연구자도 DNA칩이 어디까지 활용될지 확실히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반도체칩이 이룩한 20세기 후반의 정보혁명을 이어받아 21세기 생명공학의 시대를 DNA칩이 열어갈 것이라는 예견까지 나오고 있다.
DNA칩에는 현미경 슬라이드 글래스와 같은 딱딱한 유리기판 위에 수많은 DNA 조각이 붙어 있다. 1994년 미국의 어피메트릭사가 처음 만든 이후 최근까지 다양한 종류의 DNA칩이 유수한 회사들에 의해 속속 개발되고 있다.
어피메트릭사는 암세포의 발생을 억제하는 유전자인 p53과 에이즈 유전자의 DNA를 부착한 주로 진단용의 DNA칩과 해석장치를 판매하고 있다. 인사이트사는 이미 알려진 1만 종류의 사람 유전자를 이용해 DNA칩을 만들었으며, 이 칩으로 고객이 의뢰한 샘플을 해석해주는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DNA칩 제작장치를 판매해 고객이 스스로 칩을 만들 수 있도록 상품화한 회사도 있다.
여기서는 어피메트릭사의 연구성과 사례를 살펴보자. 에이즈의 원인이 되는 HIV 바이러스는 스스로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만드는데, 그 양상이 동일하지 않아 현재 60가지 이상의 돌연변이체가 발견됐다. 따라서 환자에게 일률적으로 동일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없다. 그런데 어피메트릭사의 HIV용 DNA칩은 환자들의 서로 다른 돌연변이를 어렵지 않게 검사해 각자에게 적절한 약물이나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게 해준다. 칩에서 나타난 반응 결과들을 비교해보면 환자들 간의 미세한 차이점을 알아낼 수 있기 대문이다. 칩을 이용한 검사는 기존의 최신 검사보다 10배 이상 더 빠르다.
한편 암 억제유전자인 p53의 돌연변이는 전체 암 유발에 절반 이상의 책임이 있다. 그런데 p53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무려 1천가지 이상이다. HIV 돌연변이와 마찬가지로 DNA칩은 p53 유전자의 독특한 돌연변이들을 검사해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다.
범인 용의자 확인에 사용
미국 국립보건원의 인체게놈연구소는 DNA칩에 붙인 인간게놈정보를 이용해 침팬지나 고릴라 같은 유인원의 게놈을 분석하고 있다. 기존에 밝혀진 인간 유전자를 칩에 붙인 후 유인원의 게놈을 반응시키면 양자 간의 같은 종류와 다른 종류가 짧은 시간 안에 분석될 수 있다. 이 연구는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를 유전자 수준에서 분석할 수 있게 해주고, 진화과정과 고등 인식기능의 발달 과정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경우 앞으로 2년 후에는 모든 경찰차에서 DNA칩을 용의자 확인에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DNA칩은 이처럼 질병의 검사와 치료 차원 외에도, 사람의 신원이나 친자확인에도 사용될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이라 해도 각자 조금씩 다른 DNA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