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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과학으로 밝힌 오심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범인 검거다. 하지만 과학수사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과학수사의 진짜 목표는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수사가 구해 낸 무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자.

 

 

2018년 5월 31일 늦은 밤, 강원도의 한 4차선 도로. 동승자를 태운 A씨의 차와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B씨의 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두 대 중 한 대가 중앙선을 넘은 것이다. 이 사고로 A씨가 운전하던 차에 탑승하고 있던 동승자가 사망했다. A씨와 B씨는 모두 음주운전 상태였다. 검찰은 A씨의 과실로 판단해 운전자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A씨가 몰던 차의 잔해가 중앙선을 더 많이 넘었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A씨가 이미 6개월가량 형을 살고 있던 시점에 새로운 증거가 제시됐다. 두 차량의 움직임이 찍힌 블랙박스 영상을 감식한 결과였다. 황민구 법영상분석연구소 소장은 해당 블랙박스 영상을 감식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영상 화질 개선, 윤곽선 검출 시험을 통해 식별되는 피사체의 패턴을 분석했다. 그 결과 중앙선, A씨가 몰던 차량의 전조등, B씨가 몰던 차량의 전조등을 식별해 냈고, 사고 직전 B씨 차량의 운전석 쪽 전조등이 A씨 차량에 가려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B씨의 차량이 중앙선을 먼저 침범했다는 뜻이다. 

 

황 소장은 “이번 분석으로 억울하게 징역을 살고 있던 A씨가 무죄를 입증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도로 위 수많은 차량들의 블랙박스 영상은 폐쇄회로(CC) TV가 없는 상황에서 중요한 영상 증거 자료가 될 수 있다. 물론 범행 사건이 카메라에 찍혔다는 사실만으론 법정에서 증거로 쓰일 수 없다. 같은 영상을 보고 개인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정에서는 법영상분석가가 직접 분석한 영상에 한해 증거로 취급한다. 

 

 

개요

 

1989년 케일럽, 1991년 패트릭, 1993년 사라, 1999년 로라. 호주의 한 가정에서 4명의 영아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질식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사건의 용의자로 아이들의 엄마인 캐서린 폴비그를 체포했다. 폴비그는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상황이 그녀를 범인으로 몰아갔다. 아이를 원망하는 듯한 그녀의 일기장이 발견됐고, 유명 의료인이 법정에서 2명 이상의 아이가 돌연사할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고 증언했다. 결국 물증도 자백도 없었지만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폴비그의 유죄를 선언했다.
2003년부터 그녀는 옥살이를 시작했다. 

 

그런 그녀가 약 20년 만인 2023년 6월 5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DNA 분석 결과 덕분이었다. 폴비그를 담당했던 변호사는 그녀가 기소된 이후에도 한 가족에서 여러 명의 영아가 돌연사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여러 의료 증거들을 모아 호주 법정에 2018년 재수사를 의뢰했다. 이 과정에서 호주국립대 소속 유전학 연구팀은 첨단 DNA 분석 기술을 통해 사망한 자녀들과 폴비그의 30억 개 염기서열을 모두 확인했다. 2003년에는 할 수 없었던 기술이다. 

 

그 결과, 연구팀은 폴비그와 사망한 자녀들에게서 칼슘 조절 단백질인 칼모듈린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발견했다. 지금껏 발견된 적 없는 희귀한 돌연변이였다. 세포 내 칼슘 농도를 조절하는 칼모듈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부정맥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유전병이 아이의 죽음과 얼마나 관련 있는지 반문했고, 1차 재수사에서 폴비그의 무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5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폴비그의 사면 청원에 서명했고 이 중에 노벨상 수상자도 2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약 30명의 과학자들은 폴비그 사건을 주제로 칼모듈린 돌연변이가 어떻게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지 메커니즘을 밝힌 논문을 2021년 11월 ‘EP 유로페이스’에 발표했다. doi: 10.1093/europace/euaa272 칼모듈린이 작동하지 않으면 칼슘의 이동 과정에 문제가 생기고 이는 근육의 수축과 이완에 영향을 미친다. 심장 역시 근육이기 때문에, 심장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부정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호주 정부는 2차 재조사를 명령했고, 폴비그는 약 20년 만에 자식 4명을 죽인 비정한 엄마라는 누명을 벗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개요

 

2004년 8월 무더운 여름날, 경남 거제시의 한 수풀에서 40대 다방 여종업원이 온몸이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여성의 손톱 아래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혈흔에서 유전자를 추출 분석해 남성의 것인 Y염색체를 발견했고 11개의 유전자 자리를 확인했다. 유전자 자리는 염색체 위에 유전자가 위치하는 자리로, Y염색체는 20개 이상의 유전자 자리를 확인하면 높은 정확도로 부계 혈통을 파악할 수 있다. 경찰은 피해자 주변 인물과 범행 추정 시각 운행 중이던 택시 기사들의 침을 채취해, 혈흔 속 Y염색체 유전자 자리와 비교했다. 그 결과 한 남자의 Y염색체의 유전자 자리가 일치함을 확인했다. 재판부는 1심에서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부산고등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Y염색체는 부계만을 확인할 수 있을뿐더러, 11개의 유전자 자리가 일치할 확률은 꽤 높았기 때문이다. 외국인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2만 6653명 가운데 피고인과 Y염색체 유전자 자리 7개가 겹치는 인물은 4명이나 됐고, 8개가 겹치는 인물도 한 명이 있었다. 재판부는 혈흔에서 검출된 것과 동일한 Y염색체 유전자 자리를 가지는 한국 남성은 피고인만이 아닐 수 있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했다. 임시근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법적 증거를 갖기 위해선 개인을 특정할 수 있을 정도의 식별력이 필요하다”며 “Y염색체는 동일 부계일 가능성만 알 수 있어 유죄의 증거가 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DNA 프로파일링은 법과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증거의 DNA와 용의자의 DNA를 1대 1로 대응해 범인을 특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DNA 분석은 다시 핵 DNA, 미토콘드리아 DNA, Y염색체 DNA 분석으로 나뉜다. 핵 DNA는 개인의 유전형질, 신체 정보 등을 모두 검사할 수 있어 직접 증거(별도의 추론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실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되지만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 혈통을, Y염색체 DNA는 부계 혈통만을 알 수 있다는 한계 때문에 간접 증거로 쓰인다. 

 

 

개요

 

1997년 4월 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한 대학생이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수차례 흉기에 찔려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용의자로는 미국인 아서 패터슨(당시 만 17세)과 에드워드 리(당시 만 18세)가 지목됐다. 특히 패터슨의 몸에는 많은 양의 피가 묻어 있었고, 패터슨은 사용한 칼 등의 증거 인멸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은 범인으로 에드워드 리를 지목했다. 피해자의 오른쪽 목을 찌르려면 그보다 키와 덩치가 커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 1, 2심에서는 리의 살인 혐의가 인정되는 듯했으나, 대법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결국 무죄 판결을 내렸다. 

 

실마리는 2005년 국내에 처음 도입된 ‘혈흔 형태 분석’ 결과로 찾을 수 있었다. 현장의 벽면 1.4m 높이 부근에는 많은 양의 혈액이 한 번에 분출된, 선상 분출 혈흔이 발견됐다. 실제로 피해자의 사인은 목동맥 절단으로, 초기 공격에서 많은 양의 피가 분출됐을 것이다. 당시 사건을 맡은 혈흔 전문 분석가 이현탁 경위는 이런 상황이라면 가해자의 몸에도 엄청난 양의 혈흔이 묻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재판부를 설득한 결정적 증거는 흉기에 묻었다가 떨어져 나온 혈흔인 ‘휘두름 이탈 혈흔’이었다. 당시 현장의 소변기 오른쪽 벽면 1.1m 지점에는 휘두름 이탈 혈흔이 있었다. 이를 통해 가해자의 키를 유추할 수 있다. 

 

혈흔 분석 전문가인 이상윤 연세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휘두름 이탈 혈흔으로 용의자의 키를 유추했고, 그 결과 리보다는 패터슨이 가해자의 키에 더 가까웠다”고 설명했다. 이외의 다른 혈흔 형태를 종합해 패터슨은 소년법상 최고형인 징역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교수는 “혈흔 형태 분석으로 범죄 현장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혈액의 유체역학적 특성 때문에 특정 대상의 표면과 충돌하며 혈흔 형태를 생성한다. 가해자가 어떤 물체를 사용해 얼마만큼의 힘으로 공격했는지에 따라 혈흔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다. 혈흔의 모양이 타원형이고 궤도가 선형이라면 혈관에서 피가 포물선 형태로 분출되는 선상 분출 혈흔이다. 그 밖에도 흉기를 휘두르다 저지당했을 때 생기는 정지 이탈 혈흔, 피가 떨어지는 상태로 걷거나 뛰어서 나타나는 낙하 연결 혈흔 등이 있다.

 

혈흔 형태 분석은 피고인의 진술과 사건 현장의 모순을 밝혀 자백을 이끌어 내거나, 자살과 타살 등을 구별하는 데도 쓰인다. 다만, 서로 다른 행동으로 동일한 형태의 혈흔을 남길 수 있어 재판에서 직접 증거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혈흔 형태 분석을 수사에 활용하는 사례는 갈수록 늘고 있다. 이 교수는 “오래전 이태원 살인 사건처럼 증거가 부족한 수사에서 혈흔 형태 분석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요

 

2021년 2월 경북 구미의 한 빌라, 3살 여자 아기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살인 혐의로 20대 엄마 A씨를 검거했다. 그러나 DNA 검사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A씨는 숨진 아기의 친엄마가 아니었다. A씨의 어머니, 즉 피해자의 외할머니인 B씨가 친모로 확인됐다. 경찰은 B씨가 내연을 통해 가진 아이를 몰래 출산하고 A씨의 아기와 바꿔치기 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수사를 시작했다. 1심과 2심에선 B씨에게 징역 8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대법원은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B씨가 아기를 ‘바꿔치기 했다’는 검사 측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2023년 2월 2일 재판부는 B씨의 혐의 중 아이의 사체를 은닉하려 한 ‘사체은닉 미수 혐의’만 유죄를 인정하고, 아이를 바꿔치기 한 혐의인 ‘미성년자 약취’는 무죄로 판결했다.

 

아이의 사진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아이가 바뀐 흔적은 없었다. 황 소장은 “검찰 쪽에서 제공한 아이의 생후 생활 사진을 동일인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분석했다. 시간 순서에 따라 시기적으로 가까운 두 사진을 동일인인지 비교했을 때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만약 아기를 바꿔치기 했다면 제2의 인물이 등장한 뒤에는 그 인물이 계속 등장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재판부에서 유일하게 인정한 법과학 증거는 B씨와 숨진 아기가 모녀지간이었다는 사실이다. B씨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A씨가 ‘키메라 증후군’이 있어 숨진 아기와 DNA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키메라 증후군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유전자를 갖는 현상이다. 임신부와 태아가 서로의 세포를 흡수하는 경우, 수혈이나 골수이식 등으로 세포 흡수가 발생하는 경우, 뱃속의 쌍둥이 중 한 명이 자궁 안에서 사망해 살아남은 태아가 사망한 태아의 세포를 흡수하는 경우 발생한다. 임 교수는 “A씨가 키메라 증후군이어도, B씨와 숨진 아기의 DNA가 일치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 사례는 과학수사 기술을, 또 그 기술이 무고하다고 내린 결론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낳는다. DNA 분석이 정확하다고 해서 100%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임 교수는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은 너무 많다. 다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은 DNA 법과학 분석 결과”라며,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수사한다면 언젠가 이 미제도 풀리지 않겠느냐”고 씁쓸한 대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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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김미래 기자 기자
  • 디자인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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