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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전'의 한국행 비밀을 벗겨라

산화 막는 질소포장, 폭발에도 끄떡없는 크레이트 가방

인기를 끌고 있는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이 열리기까지 그림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운반됐을까. 가상 인물인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 큐레이터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화가의 의무는 자연에 몰두하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감정을 작품 속에 쏟아 붓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된다. 만일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면 그런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그건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행위일 뿐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작업을 해나가면 언젠가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된다.
-1882년 7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태양과 빛, 영혼의 화가라고 불리는 반 고흐는 생전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물감 살 돈도, 생활비도 없어 동생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의 예술혼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죽어서 묻혀버린 화가들은 그 뒷세대에 자신의 작품으로 말을 건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고흐는 살아있을 때보다 죽은 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그의 열정 가득한 그림은 전세계를 유랑하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을 얻은 셈이다.

2007년 11월 24일부터는 한국에서 전시회가 있다.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과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서 66점, 네덜란드 트리튼재단에서 1점을 모아 한국으로 운반해야 한다. 그림 대부분이 유화로 해외 나들이가 처음인 ‘붓꽃’(아이리스)도 포함돼있다.
 

세계적인 명화를 운반할 때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보험에 가입할 뿐 아니라 포장단계부터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중성지와 질소로 명화 지키기

작품마다 최고 1000억 원 보험에 가입해뒀기 때문에 전체 보험금만 1조4000억 원에 이른다.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그림 67점을 다섯 대의 비행기에 나눠 운반하기로 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충고를 따른 셈이다. 운송항공편이 준비되자 한국 전시를 위해 구성된 프로젝트팀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고흐의 작품들을 포장하고 운반할 채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물을 지을 때도 기초가 튼튼해야 하듯 그림을 운송하는 도중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포장을 잘 해야 한다. 먼저 미술품 복원사가 확대경을 쓰고 작품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피며 컨디션리포트를 작성했다. 작품의 상태를 미리 기록해둬야 한국에 운반한 뒤 훼손된 곳이 없는지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작품의 표면을 중성종이로 감쌌다. 중성종이는 작품에 잘 밀착될 뿐만 아니라 그림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쓰는 종이는 대부분 산성을 띤다. 종이에 물이나 잉크가 번지는 것을 막는 데 쓰는 송진 추출물과 표백제인 황산알루미늄(Al₂(SO₄)₃)이 산성 물질이기 때문이다. 종이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가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하면 사슬모양의 분자 고리가 끊기며 색깔이 누렇게 변하고 부스러진다. 이때 종이의 산성성분은 산화반응을 촉진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 당연히 그림을 보호하는 기능도 떨어진다. 반면 일반 종이에 탄산칼슘이나 마그네슘 같은 염기성 물질을 첨가해 중화시킨 중성종이는 그림이 변질되는 산화반응을 줄일 수 있다.

이제 잘 포장한 작품을 크레이트(crate)라는 미술품 전용 상자에 담아 운송할 차례다. 고가의 미술품을 운반할 때는 비행기가 폭발해도 견딜 수 있는 ‘초강력’ 크레이트를 사용한다. 현재 유네스코는 예술품을 운반할 때 크레이트의 벽면을 펄프섬유나 유리섬유를 압축해 만든 널빤지, 스티로폼, 골판지까지 삼중으로 설계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모두 건물의 내장재로 쓰이는 튼튼하고 충격을 잘 흡수하는 재료다. 이번에 사용할 크레이트는 완벽하게 방수 처리된 철제가방으로 운송도중 벌어지는 상황을 기록하는 블랙박스가 들어 있다. 한 개 가격이 무려 1만 유로(한화 1350만 원)에 이른다.

크레이트 내부는 온도 20℃, 습도 55% 내외의 환경으로 전시장과 비슷하다. 난방기와 냉방기, 가습기가 합쳐진 항온항습기를 크레이터에 설치해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조절하는 것.

유화는 특히 습도 조절에 신경을 써야 한다. 캔버스와 그림 표면의 물감이 수축했다 팽창하는 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습도 변화가 심하면 캔버스에서 물감이 떨어져나갈 위험이 크다. 크레이트 안이 지나치게 습하면 운반하는 도중 곰팡이가 생기고 너무 건조하면 캔버스가 수축해 그림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크레이트 안에 질소를 ‘빵빵하게’ 주입했다. 공기 중의 산소를 제거해 산화반응을 막기 위해서다. 질소는 불에 타지 않는 기체여서 화재의 위험도 덜 수 있다. 더욱이 질소는 전체 공기 부피의 78%를 차지하므로 그대로 배출해도 해롭지 않다. 실제로 미국은 독립선언서 원본을 질소를 충전한 상자에 넣어 지하 깊은 곳에 안전히 보관 중이다. 다른 원소와 화학반응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 헬륨, 아르곤 같은 비활성기체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가격이 질소보다 비싸 경제성이 떨어진다.

전시회를 위해 한국의 기후조건도 미리 공부했다. 서울은 겨울철 평균기온이 1~2℃, 평균습도 60%로 춥고 건조하다. 미술품을 운반하기에 썩 좋은 조건이 아니다. 게다가 전시실 내부를 따뜻하게 하려고 난방에 신경 쓰다보면 자칫 건조해질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전시담당자와 연락하며 전시실의 상황을 파악하는 일은 필수다.
 

미술품 전용 상자인 크레이트에는 질소를 주입한다. 그림의 산화반응을 막기 위해서다.


약한 조명도 오래 쬐면 독!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특수화물편을 이용해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운송작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무진동 차량에 실려 서울시립미술관에 도착한 작품들은 곧바로 포장을 뜯지 않고 24시간 동안 밀봉상태를 유지하며 ‘현지기후 적응훈련’을 시작한다.

전시회 전날, 작품들을 전시관으로 옮겼다. 그림을 싼 종이에 작품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 섞여있을 수 있어 포장종이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뒀다. 전시관의 조명도 중요한데, 종이나 염료는 파장이 짧은 자외선을 오래 받으면 산화반응을 일으킨다. 따라서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에는 반드시 자외선차단 필름을 붙이고 형광등에도 자외선 흡수 필터를 부착해야 한다.

오래된 그림이나 사진은 조도를 촛불 다섯 개 정도의 밝기인 50럭스(lux)로, 기름 성분의 안료 덕분에 광선의 영향을 덜 받는 유화는 150lux 내외로 유지한다. 약한 빛이라도 오래 쬐면 그림이 받는 빛의 양이 누적되므로 전시하는 작품을 계속 교체해야 한다.

11월 24일 드디어 ‘불멸의 화가 고흐전’이 시작됐다. 고흐의 작품을 느끼고 호흡하는 관객들을 보니 지난날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다. 전시를 마치고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날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지만 일단 한국에 왔으니 한국을 맘껏 즐기고 싶다. 내일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볼까. 인사동에 가서 전통음식도 맛보고 젊음이 넘치는 신촌거리도 구경해야겠다.
 

크레이트 속 들여다보기^중성종이로 그림의 산화반응을 막고, 항온항습기로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골판지, 널빤지 등으로 외부 충격을 흡수한다.
 

2008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신방실 기자
  • 도움

    김겸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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