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영국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실제로 그가 남긴 말처럼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그는 1944년 전 연인에게 친자소송을 당했다. 채플린은 부정했지만 재판부는 혈액형을 이용한 과학적 검사를 명령했다. 채플린의 혈액형은 O형, 전 연인은 A형, 아이의 혈액형은 B형이었다. 친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증거에도 배심원은 채플린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판결했다. DNA 검사가 없던 시절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치부하기엔 많은 생각을 남기는 사건이었다. 과학적 증거는 실제 재판에서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질까.
오늘날 DNA 검사는 개인의 특성을 ‘거의’ 정확히 구별해낼 수 있다. 하지만 과학에 100%는 없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한 단체가 있다. 지금까지의 재판의 허점을 인정하고 무고한 사람을 법과학 증거로 석방하는 미국의 ‘결백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다.
유죄를 입증하듯
무죄를 입증하다
‘3826년’. 결백 프로젝트가 무죄를 입증한 사람들의 옥살이 기간이다. 한 사람의 생애를 100년이라 치면 38번은 넘게 살 수 있는 기간이다. 결백 프로젝트는 1992년 설립 이후 199명의 억울한 사람들을 감옥에서 꺼냈다.
결백 프로젝트는 두 변호사로부터 시작됐다. 뉴욕의 비영리 법률 구조단체인 ‘법률 구조 협회(The Legal Aid Society)’ 직원이던 배리 쉑과 피터 뉴펄드는 4년동안 억울함을 외치는 강간 사건 용의자 메리얼 코우클리를 만났다. 그는 알리바이가 있었지만, 목격자들의 진술은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당시에도 DNA 분석 결과가 재판의 증거로 받아들여졌는데, 분석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은 시절이라 정확한 검사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두 변호사는 사건과 맞지 않는 잘못된 목격자 진술에 의존한 점과, 피해자의 옷에서 발견된 정액의 혈액형이 코우클리의 혈액형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워 재판을 승리로 이끌었다. 혈액형이라는 과학적 증거로 억울한 누명을 벗긴 두 사람의 첫 경험이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생리학적 증거, 그 중에서도 특히 DNA에 주목했다. 2년 뒤인 1989년에는 처음으로 DNA 증거를 이용해 억울하게 강간범이라는 누명을 쓴 게리 닷슨의 무죄를 입증했다. 그리곤 결백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쉑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새로운 DNA 기술이 사람들의 유죄를 증명할 뿐만 아니라 무죄 또한 증명할 수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며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를 밝혔다.
부실한 과학적 증거
잘못된 유죄 판결 수두룩
결백 프로젝트가 무죄를 밝힌 두 사람, 키스 앨런 하워드와 이안 슈바이처는 억울하게 각각 33년, 25년을 복역했다.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감옥에 가게 된 결정적 증거가 바로 치흔, 즉 물린 자국이라는 것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치흔은 중요한 과학적 증거로 취급됐다. 치흔 외에도 머리카락, 출처를 알 수 없는 혈흔, 총탄 흔적 등 엄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증거들이 법정에 과학적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결백 프로젝트에서 무죄를 입증한 사건 중, ‘당시의 과학적 증거’에 의해 유죄 판결을 잘못 받은 케이스가 52%에 달한다.
2009년 미국 국립연구회는 ‘미국 법과학 강화: 앞으로의 방향(Strengthening Forensic Science in the United States: A Path Forward)’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임시근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오늘날 모든 과학수사의 시작은 미국 국립연구회가 2009년 발표한 이 보고서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DNA, 지문, 총기 검사, 치흔, 족적, 필체 감정 등의 총 13가지의 증거의 신뢰도를 분석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증거물과 개인 혹은 출처를 연관짓는 데 높은 확실성을 가진 증거는 DNA 분석이 유일했다.
이후 재판에서는 DNA 분석을 제외한 모든 증거는 간접 증거(일정한 추론을 거쳐 사실 증명에 이용되는 증거)로 받아들여지며, 상황에 따라 특수한 경우에만 직접 증거(별도의 추론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실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증거)로 인정된다. 처음으로 법과학과 재판 사이에 기준이 생긴 것이다. 결백 프로젝트 창립자 중 한 명인 뉴펄드는 한 인터뷰에서 “과학과 법은 모순된 원칙과 패러다임을 가진 두 개의 다른 세계에 존재해왔다”며 “이 보고서가 무고한 사람을 해방시키고 생명을 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판 결백 프로젝트 가능하려면
국내에는 결백 프로젝트와 같은 역할을 하는 단체가 없다. 뜻이 있는 사람이 없어서도, 기술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큰 이유는 증거를 보관하는 프로세스와 공간의 부재다. 한국의 경우 형의 시효가 끝날 때까지 재판확정기록을 보존하는 규칙은 있지만, 재판확정기록이 아닌 일반 증거물을 보관하는 구체적인 기준은 없다. 수사 과정에서 손상되는 증거물도 많다.
임 교수는 “결백 프로젝트가 국내에 도입되려면 증거물 보관시설을 따로 만드는 등의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유제설 순천향대 법과학대학원 교수 역시 재심이 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증거가 잘 보관돼 있어야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재판 당시와 다른 정황을 의미하는 증거의 힘이 매우 강력하지 않다면 수사와 재판의 오류를 인정해야 하는 재심까지 이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억울한 피해자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피해보상 문제도 있다. 유 교수는 “한국도 증거 중심의 수사, 형사사법정보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면 비슷한 역할을 하는 조직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과학의 목표인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 법과학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되돌아보면 2009년 DNA가 유일한 법과학의 직접 증거로 채택된 것도 십수년 밖에 되지 않았다. DNA에 대한 꾸준한 연구로 분석 신뢰도를 높이고, DNA 분석이 용의자 식별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꾸준히 사법기관에 설득해 가능한 일이었다.
유 교수는 “현장 법과학 전문가를 양성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쌓아 증거 중심의 사법제도를 강화하고, 사법기관에 법과학을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시켜 오류를 최소화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