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낭림산맥, 강남산맥, 차령산맥...’. 학창시절 줄기차게 외웠던 산맥 이름이다. 지금도 교과서에 그대로 나온다. 누구나 어릴 때 산맥과 강 이름을 외우면서 처음으로 우리 국토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새 산맥지도에 따르면 우리에게 익숙한 차령, 노령산맥은 존재하지 않고 교과서에 없었던 백두산부터 지리산을 잇는 백두대간이 나타났다.
백두대간은 한반도 주 산맥
학생들이 지리를 배우면서 외워야 하는 산맥의 이름들은 누가, 언제 붙인 것일까.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한반도 산맥체계는 1900년대 초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조사한 지질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현재의 산맥체계는 일제가 한반도의 지하자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고토 분지로는 망아지 네 마리와 여섯 사람을 동원해 14개월 동안 한반도의 지질구조를 조사했다. 그리고 1903년 ‘조선산악론’이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전해 내려오는 백두대간을 동강내고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을 한반도의 등뼈줄기로 삼아 모두 14개의 산맥이름을 붙였다. 이는 백두산 정기를 한겨레의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려 한 문화말살정책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광복 60년이 된 지금까지도 ‘창지개명’(創地改名)된 산맥이름과 땅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100년 전의 기술로는 기껏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 고작 망아지 네 마리와 여섯 사람이 한반도 전역을 샅샅이 조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또 고토 분지로는 땅 밑의 지질구조에 관심을 갖고 우리나라의 산맥체계를 스케치했기 때문에 땅 위의 산줄기 체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산맥체계는 지난 100년간 뚜렷한 과학적 검증도 거치지 못한 채 고토 분지로의 이론 틀 안에 갇혀 있었다.
그렇다면 고토 분지로 이전에 우리 선조들은 큰 산줄기에 이름을 붙여 불렀던 적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를 보면, 선조들은 한반도 전역의 큰 산과 고개를 15개의 산줄기, 즉 1대간(大幹), 1정간(正幹), 13정맥(正脈)으로 구분했다.
백두산에서 두류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이른바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낭림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의 일부분씩을 이은 산줄기가 백두대간이다. 그리고 두류산에서 함경북도 내륙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장백정간’(長白正幹)이라 불렀다. 또 청천강 이북에 ‘청북정맥’이 있고, 그 이남에 ‘청남정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옛 사람들이 산줄기를 표시했던 방법이다.
백두산을 한반도의 중심이자 출발점으로 인식한 산경표의 존재가 1980년대 초부터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산 인식체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다. 아울러 현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산맥체계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학계와 전문가 그리고 일반 국민 사이에 끊이지 않았다.
논쟁의 핵심은 ‘기준을 땅밑 지질로 삼느냐 아니면 땅위 지형으로 삼느냐’하는 산맥의 개념 문제와 ‘특정 산맥이 존재하느냐 아니냐’하는 실체 문제였다. 이처럼 20년이 넘도록 지속돼 온 한반도 산맥체계에 대한 논쟁, 즉 ‘현행교과서의 산맥체계’와 ‘산경표의 백두대간 체계’사이의 과학적 증거 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필자를 비롯한 국토연구원은 1995년부터 모아 온 자료들을 정리하고 지난 1년간 연구 끝에 새 산맥지도를 내놓게 됐다.
이 연구를 시작하면서 맨 먼저 산맥에 대한 정의를 훑어보았다. 이제껏 학계에서는 땅위의 지형지물과 상관없이 땅 속 지질의 연속성, 즉 지질적으로 연속된 지형이 이어진 부분을 산맥으로 정의해 왔다. 과연 그럴까? 각종 해외 문헌을 조사해 본 결과, 산맥의 정의는 전혀 달랐다.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산맥이란 대체로 ‘산지에서 일정한 규모를 가진 산봉우리가 선상으로 길게 연속되어 있는 지형’이라 정의돼 있었다.
인공위성으로 그린 새 산맥지도
이 연구에서는 망아지 대신 인공위성을 사용했고 곡괭이 대신 컴퓨터를 활용했다. 우리는 한반도의 땅위 지형과 땅밑 지질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와 수치를 컴퓨터 안에 차곡차곡 쌓아 방대한 국토데이터베이스(DB)를 만들었다. DB에 입력된 자료는 표고자료, 산과 고개, 위성영상, 지질도 등 네 가지다.
그 중 가장 많이 쓰인 표고자료는 한반도를 가로 세로 30m짜리 정사각형의 바둑판처럼 나눠 2억 5000만 개의 정사각형을 만든 다음, 각 정사각형 중앙지점의 위치좌표와 높이를 측정해 만든 자료이다. 높이에 따라 적절한 색깔을 주면 한반도의 지형지세 모습과 똑같은 3차원의 입체모형이 컴퓨터 안에 그대로 구현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반도 모형을 바탕으로 그 위에 해발 200m가 넘는 산봉우리와 고개 5103개의 이름, 위치좌표와 높이 그리고 행정구역을 표시할 수 있도록 DB를 만들었다. 또 교과서에 실린 산맥의 실태를 검증하고 문제점을 규명하기 위해 땅밑 지질도를 겹쳐 넣고, 실제와 비슷한 모습의 산맥모형을 작성하기 위해 인공위성 ‘랜드샛(Landsat) TM’이 찍은 영상도 겹쳐 넣었다.
그렇게 정리된 DB를 바탕으로 지리정보기술(GIS : Geographic Information System)과 공간분석기법을 활용해서 교과서 산맥지도와 비교하니 많은 산맥들이 지질구조와는 상관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어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정밀한 분석 작업을 거쳐 한반도 산맥을 그린 것이 이번에 발표된 새 산맥지도이다.
한반도에는 모두 48개의 크고 작은 산맥이 있고, 가장 높고 긴 1차 주산맥 1개, 거기서 뻗어나간 2차 산맥 20개, 2차 산맥에서 뻗어나간 3차 산맥 24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산맥들과 연결돼 있지 않은 독립산맥도 3개 있었다.
이번에 밝혀진 사실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새 산맥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백두산(2744m)에서 시작해 두류산(2309m), 금강산(1638m), 태백산(1567m)을 지나 지리산 천왕봉(1915m)까지 1494km의 산줄기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강남산맥이나 차령산맥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제까지 압록강이 흐르는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다고 알려졌던 강남산맥의 경우, 그 지역의 실제 지형은 여러 작은 산줄기들이 남북방향으로 펼쳐져 있어 하나의 큰 산맥을 이룰 수 없는 지역이다. 또 차령산맥은 남한강과 그 지류들에 의해 중간에서 완전히 단절돼 있다. 묘향, 노령, 적유령 산맥도 사실상 구릉 형태로 실제 산맥으로 보기 어려웠다. 이 밖에도 여러 산맥이 없거나 방향, 위치 등이 사뭇 달랐다.
한편 이번에 새로 발견한 산맥도 있다. 예컨대 전라북도 장수군 영취봉에서 시작해 전라남북도 일대를 휘감아 돌아 내장산, 무등산, 제암산, 백운산을 지나 광양시 망덕산에서 끝나는 462km의 긴 산맥은 새로 찾은 대표적인 산맥이다. 서울 주변의 독립산맥은 한탄강 주변 마차산에서 시작해 도봉산, 삼각산, 인왕산 등을 거쳐 서울 안산에서 끝난다. 평균 높이는 796m며, 길이는 72.9km다.
그런데 새 산맥지도를 작성한 다음 필자는 며칠 간 고민에 빠졌다. 새 산맥지도가 이미 알려진 세 가지 산맥지도, 즉 교과서 산맥지도, 산경표의 백두대간 체계, 북한의 산맥지도 등과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새 산맥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던 사흘째 문득 새 산맥지도가 필자의 방에 걸려 있는 대동여지도의 산줄기와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척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대동여지도의 역사적 가치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치밀함과 정확성을 재발견하고 다시 한번 놀랄 따름이다.
오래전부터 필자는 ‘수산자’(水山子)라는 호를 쓰고 있는데, 새 산맥지도의 작성으로 이제 동국지도를 만든 농포자(農圃子) 정상기 선생과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古山子) 김정호 선생의 뒷줄 말석에 앉을 수 있는 자(子)자 돌림의 좌석표를 얻은 기분이다.
한편 새 산맥지도를 작성하기 위한 연구과정에서 뜻있는 산악인, 지리교사, 일반인 등과 함께 ‘우리산맥바로세우기 럼’(www.k-whitehead.com)을 창립해 백두산, 태백산, 지리산 등 주요 산맥 분기점을 10차례 현장답사하고, 5차례의 세미나와 워크숍을 개최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였다.
이제 한반도 산맥은 새로 정립됐다. 남은 일은 새로 찾은 산맥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산맥 이름은 국민정서를 비롯해 역사와 문화, 지역주민의 이해 등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 앞으로 그런 일에 ‘우리산맥바로세우기 포럼’이 앞장설 계획이다. 마침 새 산맥지도가 발표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교육인적자원부가 관련 기관이나 학계와 더불어 합리적 절차를 거쳐 교과서에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제부터 새 산맥지도를 정착시키는데 당국과 학계 그리고 국민 모두 관심을 가질 때다.
편집자주 | 최근 국토연구원이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하는 새 산맥지도를 발표하면서 대한지리학회와 산맥 논쟁이 치열하다. 과학동아는 새 산맥지도를 발표한 국토연구원 김영표 박사의 글과 대한지리학회 회원인 부산대 손일 교수의 반론글을 함께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