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월 7일부터 3일간 발표된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세 개 부문에서 각각 세 명의 공동수상자를 배출했다. 생리의학상은 세포가 산소 수준의 변화를 감지하고 적응하는 메커니즘을 밝힌 의·과학자들에게, 물리학상은 물리 우주론의 토대를 마련했거나 주계열성을 도는 행성을 처음으로 발견한 물리학자와 천문학자에게, 화학상은 리튬이온전지를 개발하고 발전시킨 공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생리의학상
이번에도 ‘암’과 ‘세포’ 법칙 안 벗어나
올해 생리의학상은 세포가 산소의 변화를 어떻게 감지하고 대응하는지 그 과정을 밝혀낸 세 명의 의·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카롤린스카의대 노벨위원회는 “이 발견으로 빈혈과 암 등 수많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최근 생리의학상의 키워드는 ‘암’과 ‘세포’로 요약할 수 있다. 작년에도 차세대 항암제인 면역관문억제제를 개발한 과학자들이 노벨위원회의 선택을 받았다. 흔히 ‘노벨상은 같은 분야에서 연달아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이렇게 같은 분야에서 계속 수상자가 나오는 이유는 뭘까.
사실 과학자들은 암을 하나의 연구 분야로 보지 않는다. 이현숙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암이라는 질병은 하나의 학문 분야로 정의할 수 없고 수많은 생명 현상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며 “이 때문에 그간 생리의학상 수상 분야를 질병별로 분류하면 암과 관련한 연구가 월등히 많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해 수상 분야는 정확히는 암이 아닌 세포생물학에 해당한다. 세포생물학은 세포의 근원적 기능을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그리고 세포에 대한 이런 이해는 질병 치료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는 노벨위원회가 수상자 선정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준으로 꼽는 ‘최초 발견(discovery)’과 ‘인류에게 최대의 혜택(the greatest benefit to humankind)’을 모두 만족한다.
실제로 2001년 이후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연구를 8개 분야(세포생물학, 면역학, 신경생리학, 유전 조절 분야, 줄기세포, 뇌연구, 병원체 발견, 치료제 개발)로 분류하면, 생리의학상을 받은 21개 주제(2002년, 2009년에는 각각 2개 주제) 중 7개가 세포생물학에 속한다. 8개 분야 중 가장 많다.
이 교수는 “생리의학상의 경우 질병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최초로 연구한 과학자에게 돌아간다”며 “생물의 기본 단위인 세포의 특성을 밝히는 것이 곧 질병의 기본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과 맞닿아 있어 세포생물학 분야에서 노벨상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리학상
블랙홀이 호명 안 된 이유
올해 물리학상은 우주 진화와 외계행성의 비밀을 푼 과학자들을 선택했다. 제임스 피블스 미국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우주가 빅뱅 이후 어떻게 형성됐고 진화했는지 연구하는 ‘물리 우주론’을 정립했고, 스위스 제네바대의 미셀 마요르 교수와 그의 제자인 디디에 쿠엘로 교수는 1995년 최초로 우리은하에서 태양과 유사한 항성 주위를 도는 행성을 발견했다.
물리학을 크게 5개 하위 분야(입자·장·원자핵, 응집물질, 광학, 천체물리학, 원자분자·통계·장비)로 나누면 올해 수상 분야는 천체물리학에 속한다. 천체물리학은 최근 수상 횟수가 급증한 분야다. 1901년 제1회 노벨상부터 100년간 천체물리학은 10회 수상에 그쳤지만, 2001년부터 올해까지 19년간 무려 다섯 차례나 천체물리학에서 수상자가 나왔다. 이는 천체 관측 장비가 발전한 덕분이기도 하다.
과학 연구에서는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이론이 학계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실험 결과가 나와야 한다. 물리학상은 이론과 실험이 짝을 이뤄 완성됐을 때 수상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더욱 정밀하고 정확한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장비발’도 중요하다.
가령 2013년 물리학상 수상자인 피터 힉스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는 1964년 이론적으로 힉스 입자의 존재를 예측했고 이는 이후 표준모형과 함께 물리학계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2012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에서 힉스 입자가 실제로 검출된 뒤에야 비로소 노벨상을 손에 쥘 수 있었다. LHC는 둘레만 27k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원형 가속기로 건설에만 약 100억 달러(약 10조7000억 원)가 투입됐다.
2017년 물리학상도 마찬가지다. 당시 중력파를 최초로 관측한 공로로 킵 손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명예교수 등 레이저간섭계중력파관측소(LIGO·라이고) 프로젝트를 이끈 세 명이 수상했는데, 사실 중력파의 존재는 100년 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이론적으로 예측한 현상이었다.
수상자들은 초정밀 레이저 간섭계를 고안해서 불가능해 보였던 중력파 관측에 실제로 성공했고, 결국 노벨상의 주인공이 됐다. 미국 루이지애나주 리빙스턴과 워싱턴주 핸포드를 ‘ㄴ’자 모양으로 잇는 라이고 검출기는 팔 하나의 길이가 4km에 이르는 거대한 측정 장치다.
올해 과학계 최대 이슈로 꼽히는 블랙홀의 그림자 관측은 이런 흐름에서 물리학상 수상이 조심스럽게 점쳐졌다. 결과 발표 5개월만인 9월 ‘실리콘밸리 노벨상’으로 불리는 ‘브레이크스루상(Breakthrough Prize)’을 받으며 이런 기대감은 한껏 고조됐다.
하지만 관측결과 발표 시기상 애초에 올해 수상은 어려웠다. 노벨상은 수상 후보자 추천 의뢰→추천서 접수→전문가 심사 요청→최종 후보자 추천→심사위원 투표(과반 찬성)를 거쳐 수상자가 결정되는데, 여기에 1년 이상 걸린다. 블랙홀의 그림자 관측 결과가 발표된 4월은 이미 올해 노벨상의 후보 추천이 마감되고 최종 후보자가 추려지는 시기였다. 힉스 입자 발견과 중력파 관측도 연구결과를 발표한 이듬해에 노벨상을 받았다.
화학상
‘오래 살아야 받는다’ 고령화 트렌드
올해 화학상은 리튬이온전지를 개발하고 발전시킨 존 구디너프 미국 텍사스대 교수, 스탠리 휘팅엄 미국 빙엄턴대 교수, 요시노 아키라 일본 메이조대 교수 등 공학자 세 명에게 돌아갔다.
사실 리튬이온전지 수상은 ‘이제서야’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린다. 구디너프 교수가 리튬이온이 삽입된 코발트산화물이 4V의 전압을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 게 1980년이고, 이를 바탕으로 요시노 교수가 최초의 상업적인 리튬이온전지를 개발한 것이 1985년이기 때문이다. 핵심 논문이 발표된 지 무려 40년 가까이 흘러 마침내 노벨상이 결정됐다.
통계적으로는 노벨상 수상은 핵심 논문이 발표되고 14.5년 후에 이뤄진다. 보통 물리학상이 다른 분야보다 기간이 좀 더 길다. 물리학상은 이론이 실험과 관측을 통해 입증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반면 화학상과 생리의학상은 과학적 입증이 이미 논문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물리학상보다는 그 기간이 짧은 편이다.
이런 통계에 비춰봐도 이번 수상은 늦은 감이 있다. 특히 휴대전화부터 노트북, 전기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리튬이온전지가 인류의 삶에 미친 파급력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덕분에(?) 올해 97세인 구디너프 교수는 역대 최고령 노벨상 수상자가 됐다. 지난해 초정밀 레이저 활용 기술을 개발해 물리학상을 받은 아서 애슈킨 미국 벨연구소 전 연구원이 96세에 수상하면서 최고령 수상자였는데, 1년 만에 기록을 갈아치웠다.
수상자의 고령화는 노벨상의 대표적인 트렌드다. 분야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최근 11년간(2008~2018년) 노벨상 세 개 분야 수상자의 평균 연령은 68.5세다. 역대 수상자의 평균 나이가 1901~1925년 49.6세, 1951~1972년 54.2세인 점을 고려하면 해가 지날수록 수상자의 연령이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우선 인류의 고령화 자체가 한 가지 원인일 수 있다. 노벨상이 생존해 있는 사람에게만 수여되는 만큼 ‘오래 살아야 노벨상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는 기정사실처럼 굳어지고 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구스타프 캘스트란드 스웨덴 노벨박물관 시니어 큐레이터는 2016년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100년 전에는 전 세계에 물리학자가 약 1000명뿐이었다면 지금은 100만 명에 이른다”며 “노벨상 후보자의 수가 늘어난 만큼 노벨상을 받기까지 대기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과학자들이 핵심 성과를 내는 연령대는 비슷하지만, 그만큼 훌륭한 연구 결과를 쏟아내는 과학자들이 늘어 경쟁이 치열해졌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