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에서의 절대속도는 진공 속을 달리는 빛의 속도, 즉 초속 30만km이다. 그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는 존재할 수 없다. 물체의 속도를 올리려면 힘을 가해 가속도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질량이 무한대로 커지고 가속하기 위해 필요한 힘도 무한대로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의 속도에 가깝게 물체를 가속시킬 수는 있다. 바로 가속기 기술이다. 가속기는 원하는 속도로 물체를 가속하기 위해 전기력이나 자기력을 사용한다.
60kg 플래시가 마하 10으로 달린다면
자기력을 사용하는 가속 장치로는 ‘레일건(rail gun)’을 예로 들 수 있다. 최근 미국 등 강대국들은 레일건을 차세대 무기로 개발해 실전 배치를 눈앞에 두고 있다. 레일건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전류가 흐르는 두 도선이 있을 때, 서로 밀어내는 힘을 이용한다. 이것으로 공기 속에서도 마하 10 정도의 초고속으로 물체를 가속해 수백 km 떨어진 곳까지 날려 보낼 수 있다. 미국에서는 레일건으로 적의 군함 혹은 탱크를 파괴하거나 탄도미사일을 격추하는 연구까지 하고 있다.
마하
유체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의 속력을 나타내는 단위.
마하 1은 공기 중 소리의 속도, 즉 1초에 340m를 이동하는 속도를 의미한다.
만약 몸무게가 60kg인 플래시가 레일건을 타고 마하 10의 속도로 날아간다면 플래시의 운동에너지는 얼마나 될까. 달리는 물체의 운동에너지는 (질량/2)×(속도)2이므로, 계산하면 3억4700만 줄(J)이 된다. 이는 시속 100km의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10t(톤) 대형 트럭 89대가 가진 에너지와 맞먹는다.
영화에서는 그가 빠른 속도로 적을 요리조리 따돌리는 모습만 강조돼 있지만, 그 자체가 가지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트럭 89대가 동시에 어딘가에 갑자기 충돌한다고 상상해 보라. 무엇이든 박살낼 수 있다.
한편 가속기는 전기력을 사용해 물체를 가속한다. 전하를 띤 입자에 전기장을 가하면 힘을 받아 가속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가속기를 사용하면 하전 입자들을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할 수도 있다. 다만 하전 입자를 초고속으로 가속하면 하전 입자들의 질량이 크게 증가한다. 예를 들어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 최대의 가속기인 거대강입자가속기(LHC·Large Hadron Collider)에서는 양성자를 빛의 속도의 99.999996%로 가속할 수 있고, 이 경우 질량은 정지해 있을 때보다 약 7460배 증가한다.
LHC 내부를 돌고 있는 양성자들의 에너지를 계산해보면 약 3억 줄(J)이다. 너무 작아서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양성자들이 가진 에너지가 시속 100km로 달리는 10t 트럭 77대가 가지는 운동에너지를 가진 셈이다. 속도는 히어로의 힘과 직결된다.
금속 슈트’ 입히면 급정지 가능
영화를 보면 플래시는 건물 벽을 수직으로 기어오르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다가 급정지한다. 플래시를 입자들의 덩어리라고 본다면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고에너지 입자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보내고 싶을 때에도 자기장이나 전기장을 이용한다. 아무리 빛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던 입자라 하더라도, 자석으로 자기장을 가하면 로렌츠힘(Lorentz force)을 받아 달리는 방향과 수직한 방향으로 방향을 꺾을 수 있다.
단, 이때 입자들은 전하를 띠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플래시가 입고 있는 슈트 겉면을 금속으로 제작하거나 플래시를 금속으로 만든 구에 태워 고전압을 걸고 전하를 띠게 하는 게 먼저다.
여기서 혹자는 사람을 태운 금속 구를 고전압으로 대전시키면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사람을 비롯해 금속 구와 접촉한 모든 곳이 같은 전위로 대전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전류가 흐르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 벼락이 차에 떨어져도 그 안에 탄 사람은 안전한 것과 흡사한 원리다(하지만 집에서 실험하는 것을 추천하지는 않는다. 작은 실수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어쨌든 플래시의 질량이 양성자의 질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긴 하지만, 매우 거대한 가속기가 있고 플래시를 대전시킬 수만 있다면 가속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대형 가속기를 획기적으로 작게 만드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보통 양성자와 같이 작은 하전 입자도 고에너지로 가속하기 위해서는 규모가 큰 가속기가 필요하다. LHC의 경우 둘레가 27km나 된다. 전파의 전기장을 사용해 하전 입자를 가속하는 기존의 가속 방법으로는 가속기의 크기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이대로라면 플래시가 대형 가속기 주변에서만 출동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강력한 레이저와 플라스마를 사용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원리는 이렇다. 원자핵과 전자들이 섞여 있는 플라스마 속에 강력한 레이저 펄스를 쏘면, 플라스마 내의 전자들이 밀려나면서 파동이 생성된다.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생기는 것과 유사하다. 이 플라스마 파동은 매우 강력한 전기장을 동반한다. 그리고 초강력 전기장을 가진 플라스마 파동은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 이 전기장에 하전 입자들을 실어 보내면 고에너지 가속 입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하전 입자를 매우 짧은 거리에서 고에너지로 가속할 수 있다. 이론상으로는 가속기의 크기를 현재의 1000분의 1로 줄이는 게 가능하다. 전자의 경우에 특히 효율적이어서, 전자를 기존의 가속기보다 약 1000배 큰 힘으로 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연구가 더 진행되면 테이블 위에 올릴 수 있는 크기의 차세대 가속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노벨상 5개 중 1개꼴로 가속기에서 나와
지금까지 가속기를 이용해 초현실적인 히어로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가속기는 지금도 ‘영웅’ 같은 일을 과학계에서 해내고 있다. 양성자나 전자, 원자핵 등을 서로 충돌시켜 우리 우주의 기원을 연구하거나 물질의 속살을 파헤친다. 또 X선과 같이 파장이 매우 짧은 빛을 발생시켜 기존의 현미경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극미의 세계도 열었다.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 5개 중 1개는 가속기를 이용한 연구’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가속기가 책상 위에 올릴 수 있을 만큼 작아져 누구나 쉽게 가속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아는 지식의 경계는 훨씬 더 넓어질 것이다. 가속되는 입자의 에너지를 더 높이고 발생한 입자의 빔 품질을 향상시키는 등 상용화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쉽게 나노 과학을 연구하고, 단백질의 구조를 분석하며, 신소재를 개발할 수 있는 그 날이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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