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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배트맨의 검은 배트슈트, 최소 두께 가진 최강 그래핀으로

 

물질을 이루는 원자들 간의 결합력이 강할수록 총알이 관통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그래핀(graphene)’이라는 ‘21세기 나노 소재’는 특별하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들이 강력한 공유결합을 통해 육각형 벌집 모양으로 연결돼 있다. 두께는 0.3nm(나노미터·1nm는 10억 분의 1 m) 정도. 2차원 평면 구조다. 그래핀을 규칙적으로 쌓아올려 3차원 구조로 만들면 연필심에도 사용하는 흑연(graphite)이 된다.

 

놀라운 점은 그래핀의 강도가,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물질로 알려진 다이아몬드의 강도를 뛰어 넘는다는 사실이다. 연필로 쓴 글씨가 실은 지상에서 최고로 단단한 물질인 그래핀이 흩어져 있는 것이었다니. 게다가 겨우 종이에 한번 쓱 문지르는 것만으로 그래핀이 한층씩 벗겨져 떨어지다니.

 

그래핀 자체는 지상 최강의 단단한 물질인데, 그래핀으로 이뤄진 흑연은 왜 그렇지 않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핀과 그래핀 사이에는 단단한 화학결합이 없기 때문이다.

 

 

방탄의 핵심은 에너지 분산


현재 사용되는 AR-15나 K-2 소총의 총알은 초속 1000m로 날아간다. 이는 공기 중에서 음파가 전달되는 속도의 3배에 가까운 초음속이다. 무게가 5g 정도인 총알의 운동에너지는 약 2000줄(J)로 1500m 상공에서 떨어진 야구공의 운동에너지와 비슷하다. 한편 권총 총알의 운동에너지는 약 500줄 정도로 상대적으로 적은 운동에너지를 가진다.

 

일반적인 재료는 이 정도 크기의 운동에너지를 가진 총알을 견디지 못하고 뚫린다. 총알을 막는 확실하고 쉬운 방법은 배트슈트를 두껍게 만드는 것이다. 방탄복은 단단하고 두꺼울수록 방탄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우리가 배트맨을 ‘까만 텔레토비’로 바꾸려는 것은 아니니 이 방법은 제외하자.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하면 전달된 운동에너지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두께가 제한된 재료로 총알의 관통을 막으려면, 재료에 전달되는 총알의 운동에너지를 넓은 면적으로 분산시켜 흡수하는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물질 내에서 운동에너지가 전파되는 속도는 그 물질 고유의 ‘소리속도(해당 물질에서 음파가 전달되는 속도)’에 따라 정해진다. 공기의 소리속도는 초속 약 340m다. 그런데 그래핀의 소리속도는 무려 초속 2만 2000m에 이른다. 공기의 65배, 강철의 4배, 다이아몬드와 비교해도 2배에 가까운 소리속도다. 총알의 속도와 비교하면 그래핀은 22배나 빠른 운동에너지 전달속도를 지녔다. 그래핀보다 소리속도가 빠른 물질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배트맨의 또 다른 강력한 무기 ‘배트모빌’. 표면은 세라믹과 케블라 섬유로, 차체는 티타늄-탄소나노튜브 복합재료로 만들 수 있다.

 

 

때문에 그래핀에 총알이 부딪치면, 수십 만 분의 1초라는 찰나에 해당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총알의 운동에너지가 탄착점에서 10cm 이상 떨어진 주변부까지 순간적으로 전달된다. 즉 반지름이 약 0.3cm 정도인 총알 단면적에 집중돼야 할 운동에너지가 그래핀을 매개로 반지름 10cm 이상의 넓은 면적으로 분산되는 것이다. 단순 계산하면 단위 면적에 전달되는 에너지의 양은 분산시키기 전과 비교해 0.1% 이하로 떨어진다.

 

이는 완전 비탄성 충돌 조건을 만들기 때문에 그래핀에 부딪친 총알은 속도를 잃고 바닥에 떨어진다. 그래핀 방탄복을 입은 사람은 총을 맞아도 큰 주먹으로 펀치를 맞은 정도로만 느껴질 것이다.

 

 

원단은 그래핀-고분자물질 복합필름


그럼 이제부터 그래핀으로 배트슈트를 디자인해 보자. 그래핀을 얻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는 ‘기계적 박리 법’이다. 간단히 말하면 흑연 결정을 성장시킨 뒤에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그래핀을 한 장씩 떼어내는 방식이다. 이때 흑연 결정의 크기가 그래핀의 넓이를 결정한다. 실제로 2010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는 대학원생 시절 흑연에 셀로판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내는 간단한 방법으로 그래핀을 얻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화학기상증착법(CVD)’이 있다. 이는 고온에서 화학반응을 이용해 금속 표면에 그래핀을 성장시키는 공정을 말한다. 나중에 금속을 화학적으로 녹여 그래핀을 떼어내야 한다. 배트슈트를 제작할 때는 간단하고 빠른 기계적 박리법을 쓰기로 하자.

 

그래핀을 떼어 내면 그래핀 표면에 부드러운 고분자 물질 막을 코팅하고 층층이 쌓는다. 그래핀과 고분자 물질을 번갈아 100겹 정도 쌓으면 그래핀-고분자물질 복합필름이 만들어진다. 복합필름의 두께는 집에서 쓰는 알루미늄 호일의 40분의 1 수준으로 굉장히 얇다. 또 유연한 고분자물질을 사이에 끼웠기 때문에 그래핀 층끼리 마찰 없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다. 가장 바깥 쪽 표면에는 그래핀이 벗겨지지 않도록 얇은 폴리우레탄 층을 코팅한다. 우리는 이 복합필름을 배트슈트의 기본 재료로 이용할 것이다.

 

배트슈트는 몸체 각 부분의 용도에 따라 다르게 제작하는 게 좋다. 가령 가슴 부위처럼 방탄 능력이 중요한 부위는 복합필름을 여러 장 겹쳐 제작한다. 필름을 10cm 이상 넓게 잘라 겹친 뒤, 케블라 섬유로 재봉질을해서 만들 수 있다.

 

반면 관절 부위처럼 유연성을 많이 요하는 부분은 복합필름을 머리카락 두께 정도로 얇게 잘라 실을 만들고 이것으로 직물을 짠다. 배트슈트의 두께는 5mm정도면 총알을 막아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배트슈트 제작비는 미정이다. 넓은 면적을 가진 흑연 결정을 성장시켜 그래핀을 분리하는 기술이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인은 얼마가 됐든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열전달 빠르고 빛 흡수율 높아


그래핀의 열전달 능력도 배트슈트에는 유용하다. 그래핀은 열전달 능력이 뛰어난 구리를 능가할 만큼 열전달 속도가 빠르다. 재밌는 점은, 동일한 그래핀 층 내에서는 열전도율이 높지만 위아래로 쌓인 그래핀 사이의 열전도율은 그래핀 층 내부 열전도율의 100분의 1도 채 안 된다. 그래핀이 표면을 따라서만 열에너지를 선택적으로 전달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대칭적인 열전도율 때문에 그래핀-고분자물질 복합필름으로 만든 배트슈트에 뜨거운 물체가 닿으면 열이 배트슈트 가장 바깥쪽에 있는 그래핀 층에만 퍼질 뿐, 내부로는 열이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격투 중에 폭탄이 터져 순간적으로 화염에 휩싸여도 배트슈트만 입고 있으면 끄떡없는 셈이다.

 

광학적인 특성도 주목할 만하다. 그래핀 한 층에 빛을 쪼이면 이중 2.3%의 빛이 흡수된다. 그래핀 한 층의 두께가 고작 0.3nm라는 점을 고려하면 흡수율이 굉장히 크다. 따라서 그래핀을 여러 층으로 겹치면 자연적으로 검은 색을 띠게 된다. ‘어둠의 기사(The Dark Knight)’라는 별칭에 걸맞은 배트슈트가 완성된다.

 

배트맨의 멋들어진 배트모빌도 그래핀으로 만들 수 있을까. 배트모빌은 배트슈트처럼 가볍고 총알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직접 착용하는 것은 아닌 만큼 유연성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차체 표면은 경도가 높은 다이아몬드 층을 화학기상증착법으로 입히고 내부는 현재 사용하는 3세대 장갑차량처럼 세라믹과 케블라 섬유를 소재로 한 경량 복합장갑으로 만들면 날아오는 탄두를 막아낼 수 있다. 배트모빌 차체는 티타늄과 탄소나노튜브(CNT·carbon nanotube)를 혼합한 복합재료를 추천한다. 일정 방향으로 정렬시킨 탄소나노튜브 때문에 강도가 월등히 높고 가벼운 티타늄 합금이 만들어 진다.

 

그래핀은 지구상의 물질 중에서 총알의 운동에너지를 가장 빠르게 분산시킬 수 있는 재료다. 밀도도 강철의 30%로 작아(2.27g/cm3) 가벼운 방탄 슈트를 제작하기에 적합하다.

 

 

 

방탄 효과는 강철의 10배


배트슈트는 단순히 SF(공상과학)영화에만 존재하는 기술이 아니다. 최근 각종 나노소재를 적용한 복합재료가 개발되면서, 기존의 상식에서 벗어난 물질이 탄생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혁신적인 나노복합소재를 개발하려면 나노소재 특유의 강점을 이끌어내는 제조 공정이 필요하다. 더불어 나노복합재료의 방탄 특성을 정확히 분석할 새로운 실험방법도 절실히 요구된다.

 

이런 노력 중의 하나로 필자는 레이저를 이용해 실제 총알보다 수천 배 작은 총알을 초음속으로 가속한 뒤, 이를 나노복합재료에 충돌시키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1조 분의 1초 동안 미시적으로 일어나는 초음속 충돌 현상을 분석해 나노복합재료의 특성을 조사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래핀이 강철보다 10배 이상 방탄 효과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 ‘사이언스’ 2014년 11월 28일자에 발표했다.

 

가볍고 강한 방탄재료는 우주에서도 쓰일 수 있다. 지구 저궤도에서 활동하는 우주인의 우주복을 방탄 소재로 만들면 극초음속으로 날아다니는 우주쓰레기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첨단 방탄 재료가 지상의 모든 운송 수단에 사용될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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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재황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 기계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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