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이라고 하면 ‘독한 감기’를 줄인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사실은 감기와 독감은 전혀 다르다. 감기는 라이노바이러스와 코로나바이러스, 아데노바이러스같은 여러 바이러스가 코나 목에 침투했을 때 걸리는 질환이다. 콧물과 목 아픔에 시달리다가도 며칠내에 자연적으로 낫는다. 하지만 독감은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상기도부터 폐까지 침투해서 걸린다. 언뜻 감기와 비슷한 증상이 좀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것 같지만 극심한 고열과 근육통으로 훨씬 더 고통스럽다. 심한 경우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RNA 8개 조각으로 이뤄진 바이러스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매 겨울마다 우리나라와 미국 등 북반구 국가에서 계절성 독감을 일으킨다. 겨울에 유행하는 이유는 5℃ 이하의 낮은 온도와 습도30% 이하의 건조한 환경에서 오래 생존하고 잘 증식하기 때문이다. 매년 찾아오는 인플루엔자를 달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사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새든 돼지든 사람이든 감염을 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생물의 몸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스스로 번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숙주의 세포 안에 들어간 바이러스는 번식하기 위해 그 안에 있는 세포 소기관과 효소를 마치 제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용한다. 유전정보를 복제하고, 유전물질을 둘러싸는 단백질 껍질을 만들어 ‘완전한 바이러스 개체’로 조립한 뒤 세포 밖으로 내보낸다. 새로 태어난 바이러스들은 재채기를 할 때 침방울이나 콧물을 타고 바깥으로 나와 다른 숙주를 찾아 또다시 먹이 사냥에 나선다.
그래서 바이러스가 갖고 있는 유전정보는 비교적 단순하다. 생물은 유전물질인 DNA를 그대로 베낀 사본(RNA)을 만들어 거기에 담긴 유전정보대로 단백질을 만들지만, 바이러스는 DNA나 RNA 둘 중 한 가지만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헤르페스나 B형간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DNA를,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나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RNA를 갖고 있다. 인플루엔자는 총 8개의 RNA 조각을 갖고 있는데, 각 조각은 바이러스가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데 필요한 단백질 정보만을 담고 있다.
독감과 마찬가지로 천연두나 홍역도 바이러스가 옮기는 병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천연두나 홍역에 걸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감염을 예방하는 백신을 개발한 덕분이다. 그렇다면 매 가을마다 맞는 독감 백신은 왜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정복하지 못했을까.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백신을 맞고도 독감에 걸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문가들이 예상하지 못한 변종이 나타나 세계를 판데믹의 공포에 빠뜨리기도 한다.
인플루엔자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현대의학의 머리 위에서 노는 뛰어난 생존 전략가’라고 혀를 내두른다.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매년 널리 퍼지면서 수많은 사람을 꾸준히 감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신마저 피해가는 인플루엔자만의 비법도 있다.
▲인플루엔자바이러스= 오르토믹소바이러스(Orthomyxoviridae) 과에 속하는 RNA바이러스다. 사람이나 조류, 돼지, 개 등 동물의 호흡기 조직에 침투해 독감을 일으킨다. 매 겨울마다 유행하는 계절성 독감과 수십 년 주기로 대유행 독감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다. 공처럼 둥근 모양으로 지름은 약 80~120nm다. 핵단백질에 따라 A, B, C로 나누는데 대개 A형 중 H1N1과 H3N2, 그리고 B형이 계절성 독감을 일으킨다. 종류와 분리된 지역, 분리주 번호, 발견된 연도의 순서로 이름을 붙인다. 예를 들어 2014년 홍콩에서 유행했던 A형 인플루엔자(H3N2) 이름은 ‘A/HongKong/4801/2014’다. 또는 표면에 붙은 단백질의 종류에 따라 H N 으로 번호를 매긴다.
RNA 바이러스, 사람 세포를 공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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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2 바이러스가 세포 안으로 들어가면 엔도좀으로 둘러싸인다.
③ 바이러스의 외피와 엔도좀이 융합하면서 유전물질이 세포 안으로 퍼진다.
④ RNA가 핵으로 들어온다.
⑤ RNA가 복제되고, 유전정보를 토대로 바이러스를 이루는 단백질 구조를 만든다.
⑥ 복제된 RNA와 새로 만들어진 단백질이 바이러스 입자로 조립된다.
⑦ 완성된 바이러스는 세포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매년 다른 독감이 찾아오는 비결 항원 소변이
지난해 유행했던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토대로 만든 백신으로는 올 겨울에 유행하는 독감을 예방할 수 없다. 해마다 유행하는 바이러스의 유전 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RNA바이러스는 유전 정보를 복제할 때 오류가 나타나도 폴리머레이스 효소가 이것을 원래대로 수정하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DNA바이러스에 비해 변이가 잦다. 비슷한 시기에 퍼지는 인플루엔자바이러스끼리도 유전적으로 차이가 날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매년 그 해 겨울에 유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플루엔자바이러스 주를 선정한다. 이에 따라 제약회사들은 해당 독감을 예방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한다.
생존전략 1 변이 잦은 RNA
유전물질인 DNA와 RNA는 뉴클레오티드가 길게 붙어 있는 핵산이다. 각 뉴클레오티드는 네 가지 염기 중 하나씩을 갖고 있는데, 이 염기서열 순서가 유전정보다. 각 염기는 서로 상보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 그래서 본 사슬과 상보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뉴클레오티드를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유전물질을 복제한다.
이때 상보적이지 않은 염기가 잘못 달라붙으면 생물이나 DNA바이러스는 폴리머레이스라는 효소가 나서서 원래대로 뜯어 고친다. 하지만 RNA바이러스에 있는 이 효소에는 잘못 붙은 염기를 교정하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RNA가 복제될 때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그 모습대로 새로운 RNA가 탄생한다.
결국 어미 바이러스와 새끼 바이러스가 유전적으로 서로 다르고, 숙주를 여러 번 거칠수록 더 많이 달라진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의 유전정보를 해독한다고 해도 100% 방어할 수 있는 백신을 만들기가 어려운 이유다. 또 매년 다른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유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에이즈와 에볼라도 RNA바이러스가 옮긴다. 하지만 인플루엔자는 이들보다 잠복기가 짧고, 접촉과 호흡기 전염으로 비교적 쉽게 전해지는 탓에 훨씬 빠르고 넓은범위로 확산한다.
조류와 사람의 호흡기 세포는 각각 다른 시알산 수용체를 갖고 있다. 인플루엔자바이러스마다 각각 조류와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 능력이 다르다. 그래서 다른 종 사이에 독감이 전염될 가능성이 낮다. 그런데 돼지는 두 종류의 수용체를 모두 갖고 있어서 조류와 사람으로부터 독감이 옮을 수 있다. 조류와 사람에서 온 바이러스의 RNA가 돼지의 호흡기 세포 안에서 뒤섞이면서(유전자재편성), 신종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탄생할 수 있다. 사람독감처럼 전파율이 높은 신종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출현할 경우에는 전 세계적인 대유행인 판데믹이 일어날 수 있다.
유전자재편성
돼지는 조류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붙을 수 있는 수용체와 사람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붙을 수 있는 수용체를 모두 가지고 있다. 돼지 세포 속에서 두 종류의 바이러스 RNA가 뒤섞인다.
생존전략 2 여러 동물을 감염시킨다
천연두바이러스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이유 중 하나는 사람만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백신을 맞고 면역력을 갖게 돼 더 이상 숙주를 찾지 못한 탓이다.
이와 달리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종류에 따라 사람이나 조류, 돼지, 고양이, 개 등 다양한 숙주를 감염시킨다. 조류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는 사람에게 전염될 가능성이 낮다. 종에 따라 호흡기 세포 표면에 붙어 있는 바이러스 수용체가 달라서다. 사람의 호흡기 세포는 ‘α-2,6-시알산 수용체’를, 조류의 호흡기 세포는 ‘α-2,3-시알산 수용체’를 갖고 있다.
그런데 돼지의 호흡기 세포에는 두 가지 수용체가 모두 있다. 두 가지 독감에 모두 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때 호흡기세포 안에서는 조류와 사람으로부터 전염된 바이러스의 RNA조각들이 한꺼번에 뒤섞였다가 여덟 조각으로 나눠져 새로운 바이러스로 만들어지는 유전자재편성이 일어난다. 이론상 이런 ‘변종’ 바이러스가 256개나 생길 수 있다.
변종 바이러스는 조류와 사람에게 모두 전염될 수 있다. 이전에 나타났던 바이러스와 유전적으로 달라 기존 백신과 치료 제로 방어하기가 어려워 계절성 독감에 비해 치사율이 높다. 결국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면서 전 인구의 25~50%까지 감염시키는 판데믹을 일으킬 수 있다.
에볼라바이러스는 사람에게 감염됐을 경우, 치사율이 최대 90%가 될 만큼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의 치사율은 한 자릿수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바이러스성 질환에 비해 널리 퍼져있는 반면, 치사율이 낮다. 바이러스 입장에서 숙주가 빨리 죽으면 그만큼 자손을 번식해 다른 숙주에게 퍼뜨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숙주와 공존하면서 세포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도록 적응했다.
① 1918~1919년 스페인독감
주로 젊은 청년층이 많이 감염된 역사상 최악의 독감이다. 미국에서 처음 나타나 1차 세계대전 때 군인들이 대서양을 건너면서 유럽까지 퍼졌다. 2000만~5000만 명이 사망했으며, 사망률이 2~3%로 매우 높았다. 이때 처음 나타난 H1 바이러스의 먼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매년 겨울마다 유행하고 있다.
② 1957~1968년 아시아독감
이전에는 H1 바이러스 독감만 있었는데, 유전자재편성으로 H2가 등장했다. 중국 남부에서 처음 나타나 영국까지 퍼졌다. 100만~400만 명이 사망했다.
③ 1968~1969년 홍콩독감
사람에서 유래하는 H2 인플루엔자와 조류에서 유래하는 H3 인플루엔자 사이에 유전자재편성이 일어나 새로운 H3 바이러스가 나타났다. 이때 나타난 H3바이러스는 지금도 계절성 독감으로 자주 나타난다.
④ 2009~2010년 신종플루
H1N1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의 변종으로, 조류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의 일부와 돼지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뒤섞인 형태다. 멕시코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국제 항공편을 통해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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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인플루엔자
Part 1. 변종 플루 HXNX
Part 2. 변신의 귀재, 인플루엔자의 똑똑한 생존전략
Part 3. 전염과 면역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Part 4. ‘키메라 백신’으로 인플루엔자 예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