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에 나타난 인플루엔자가 해가 바뀐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조류 인플루엔자는 이번 겨울, 한층 더 기세를 올려 전국적으로 양계산업을 위협하고 있다. 결국 정부에서는 계란 수입이라는 유래 없던 결정을 내렸다.
사람 인플루엔자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2월부터 전국에 A형 독감이 유행하며 한 때는 외래환자 1000명당 독감 의심환자가 86.2명까지 달했고(질병관리본부 2016년 12월 18~24일 기준), 몇몇 학교는 휴교를 했다. 겨울방학이 되면서 확산세가 한풀 꺾였지만 전문가들은 B형 독감의 유행을 예상하며 예방백신 접종을 권고했다. 당분간 인플루엔자의 위협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인류는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해 인플루엔자의 위협에서 잘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왜 해마다 인플루엔자에 고전하고 있는 것일까. 인플루엔자와의 수천 년에 걸친 전쟁이 어디까지 왔으며, 결국은 인류가 인플루엔자를 이길 수 있을지 짚어본다.
기존 백신과 치료제로는 한계가 있어
인류는 인플루엔자 전염을 막기 위해 해마다 백신을 생산하고 있다. 백신은 병원체 성분(항원)을 체내에 주입해 우리 몸이 그 항원에 대해 특이적인 면역 반응을 유도하고, 또 나중에 비슷한 병원체가 들어왔을 때 즉각적으로 방어하도록 하는 물질이다.
바이러스나 세균을 배양한 뒤 죽이거나 독성을 약화시키거나, 병원체의 일부 성분만 추출하거나 유전공학 기술을 기반으로 인공적으로 생산해 사용한다. 병원체의 특정 항원 유전자를 세포에 넣어 항원물질을 만들게 한 뒤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유전자 백신(DNA 백신, RNA 백신, 바이러스 벡터 백신 등) 기술도 개발됐다.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인플루엔자 백신은 바이러스를 유정란에서 배양한 뒤 포르말린과 계면활성제 등을 처리해 완전히 죽이고(사백신) 조각조각 분리한(분할백신) 백신이다. 최근에는 세포에서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배양하는 기술이 개발, 적용돼 유정란의 불안정한 공급이나 계란의 알레르기 유발 등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인플루엔자 백신은 바이러스 표면에 있는 헤마글루티닌(HA 단백질)을 방해하는 원리다. 이 단백질은 바이러스가 숙주세포를 감염시킬 때 ‘문을 여는’ 기능을 한다. 조금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점잖게 문을 열기보다는, 꼬챙이처럼 세포막을 찔러 찢고 들어간다. 그런데 백신을 맞으면 HA 단백질에 결합하는 항체가 만들어지고, 바이러스가 침입했을 때 HA 단백질에 결합해 기능을 방해한다. 결국 바이러스는 세포를 감염시키지 못하고 굴복한다.
백신을 투여 받지 않았거나, 백신을 맞고도 연령이나 신체조건, 기저질환 등 다양한 이유로 충분한 면역반응이 유도되지 않았을 경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 또는 백신과 다른 바이러스가 나타날 경우에도 효과가 떨어진다. 이때에는 치료제를 사용하며, 가장 널리 쓰이는 치료제로 타미플루와 리렌자, 라피뱁 같은 약물이 있다.
이 치료제들은 바이러스의 표면에 있는 뉴라미니데이스(NA 단백질)의 기능을 방해한다. 새로 만들어진 바이러스 입자가 감염 세포로부터 자유롭게 떨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 주변 세포가 추가로 감염되는 일을 막는다. 하지만 다른 모든 항바이러스제가 그렇듯 현존 치료제에 대해 내성을 갖는 바이러스가 생길 수 있다.
이미 2007~2008년 겨울, 전 세계 41개국에서 타미플루 내성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나타났다. 국내에서도 2009년 11월, 타미플루 내성 바이러스가 처음으로 보고됐다. 특히 5일 이상 연속적으로 타미플루를 복용한 국내 환자 67명 중 11명의 환자에서 내성 바이러스가 발견돼, 타미플루 과용에 의한 내성 바이러스 출현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타미플루 내성 바이러스를 리렌자 또는 라피뱁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이 치료제들에도 내성을 가진 바이러스가 나타날 여지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영원히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이길 수 없는 걸까.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타날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하는 걸까. 과학자들은 기존보다 효율적인 백신을 만들어 앞으로 나타날 무적 인플루엔자에 대항할 방법을 찾고 있다. 과연 인플루엔자로부터 인류를 구해낼 차세대 백신은 무엇일까.
◆바이러스 유전정보은행◆
미국 세인트 주드 병원과 피터 도허티 감염면역 연구소, 중국 국립 인플루엔자센터, 일본 국립 감염병연구소, 영국 프랜시스크릭연구소,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처럼 WHO에서 지정한 연구기관에서는 인플루엔자의 다양한 백신주와 정보를 뱅크화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조류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의 유전정보를 뱅크화하기 시작했다.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200여 가지의 아형(H와 N이 다른 것을 말한다)으로 존재할 수 있고 변이가 빠르기 때문에 다양한 분리주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렇게 수집한 데이터를 활용해 바이러스의 특성을 분석하면 앞으로 유행할 인플루엔자를 예방하는 백신을 만드는 데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모든 인플루엔자 다 잡는 ‘범용 백신’
국내외 과학자들은 모든 아형의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예방하는 ‘범용 백신’을 연구하고 있다. 이론상으로 이 백신 하나면 항원 소변이나 항원 대변이로 탄생한 신종 인플루엔자도 막아낼 수 있다.
아직까지 그 어떤 질병에서도 범용 백신이 개발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다. 미국 시카고주립대와 에모리대 공동연구팀은 2009~2010년 유행했던 신종플루에 걸렸다가 회복한 사람의 혈청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다양한 아형의 인플루엔자에 결합할 수 있는 항체가 있었던 것이다. HA 단백질을 인식하는 항체 였는데, 특히 HA 단백질의 줄기 부분에 결합했다(doi:10.1084/jem.20101352).
또 다른 과학자들은 HA 단백질의 줄기 부분이 위쪽의 머리 부분에 비해 아미노산 서열의 변이가 비교적 적다는 사실에 기반해 가설을 세웠다. ‘HA 단백질의 줄기 부분에 결합하는 항체가 다양한 아형의 HA에 반응할 수 있다면, 이 부분을 이용해 반응성이 넓은 범용 백신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인 가설이었으나 해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순차적으로 유전자를 없애거나 돌연변이를 일으켜 머리 부분을 떼어냈더니, 줄기 부분의 단백질 3차원 구조가 본래의 구조와 달라졌다. 따라서 이 백신에 의해 유도된 항체는 정작 바이러스의 HA 단백질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머리와 줄기가 붙어 있는 온전한 형태의 HA 단백질을 주사하면 머리 부분의 면역원성(항원으로 인식되는 성질)이 훨씬 강해 정작 줄기 부분에 대한 항체를 충분하게 얻을 수 없었다.
과학자들은 고민 끝에 이 문제를 해결할 몇 가지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첫 번째는 HA 단백질의 머리 부분을 없애고도 줄기 부분이 제 모양을 잃지 않도록 지지하는 연결고리를 달아주는 방법이다. 줄기 부분에 인위적으로 염기서열을 넣어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공처럼 뭉치는 성질을 가진 생체 단백질 ‘페리틴’에 붙이면, 커다란 공에 돌기가 여러 개 달린 듯한 나노 입자가 된다. 크기가 크고 줄기 부분이 여러 개 붙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줄기 부분에 대한 면역 반응을 선택적으로 유도할 수 있었고, 면역원성도 한층 더 강화했다(doi:10.1038/nature1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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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 백신 후보① ‘페리틴에 줄기 붙인 나노입자’
HA 단백질의 머리 부분을 없애고 줄기 부분이 제 모양을 잃지 않도록
인위적으로 지지한 뒤, 공처럼 뭉치는 성질을 가진 생체 단백질 페리틴에 붙였다.
하나일 때보다 크기가 크고 줄기 부분도 여러 개 붙어 있어, 면역반응이
잘 일어나고 면역원성도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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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국립보건원(NIH)의 제프리 보잉턴 박사가 그린 인플루엔자 범용 백신의 원리.
H1N1과 H5N1 아형 바이러스의 HA 단백질에서 유전적 차이점을 빨간부분 으로 표시했다.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의 HA 단백질은 머리 부분에서는유전적 변이가 잦지만(빨간부분이 많다),
줄기 부분에서는 변이가 적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줄기 부분에 붙는 항체를
유도하는 범용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아형이 다양한 A형 인플루엔자를 한 번에 예방하기 위해서다.
또 다른 아이디어는 HA 단백질 전체를 사용하는데, 줄기 부분은 하나로 고정하고 머리 부분을 다른 종류의 HA 단백질로 바꾼 ‘키메라 HA’를 만들어 순차적으로 주사하는 방법이다. 사람의 면역계는 한번 기억한 항원에 대해서는 처음 만나는 항원에 비해 더 강력한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각기 다른 키메라 HA를 연달아 투여하면 각 머리 부분에 대해서는 매번 제한적인 1차 면역반응이 일어나지만, 동일한 서열의 줄기 부분에 대해서는 투여할 때마다 면역반응이 점점 강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doi:10.1128/JVI.00641-13).
HA 단백질에서 머리 부분을 없애고 다른 종류의 HA 단백질의 머리 부분을 붙인 ‘키메라 HA’.
그림에서는 H1 아형 바이러스의 HA 단백질에서 머리 부분을 H5 또는 H6 바이러스의 것으로 바꿨다.
각기 다른 키메라 HA를 연달아 백신으로 맞으면,
염기서열이 동일한 줄기 부분에 대해서 면역반응이 점점 강해진다.
현재 이런 범용 백신 후보물질들은 실험을 통해 다양한 아형의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막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연구개발 단계다. 아무리 실험에서 만능 백신으로서의 효능과 안전성이 우수하다 하더라도 3상에 걸친 임상을 통과하려면 10년 이상 걸린다. 현재 미국의 백시네이트와 캐나다의 메디카고, 이스라엘의 바이온드백스 같은 제약회사들은 인플루엔자 범용 백신을 개발해 임상 1상 또는 2상을 진행하고 있다. 추가적인 연구를 거치면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는 조류 인플루엔자는 물론, 이외의 신종 인플루엔자를 예방하는 새로운 백신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에서도 동물실험 수준의 연구 성과는 많지만 아직까지 대규모 임상시험 단계에 진입한 것은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신규 백신 개발을 위한 노력과 투자가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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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왜 조류 인플루엔자백신을 맞지 않을까?◆
사람이 백신을 맞고 인플루엔자를 예방하듯이, 새에게도 백신을 맞게 하면 조류 인플루엔자 대유행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저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H7N9)와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H5N6, H5N8)를 막을 수 있는 백신이 개발돼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 백신을 사용하지 않는다.
닭이나 오리 같은 가금류에게 한 마리씩 백신을 맞히는 것보다 살처분하는 쪽이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윤리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 얘기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이유가 있다. 조류 인플루엔자 백신을 널리 사용하게 되면 추후 이 백신에 대한 내성을 가진 ‘슈퍼 조류 인플루엔자’가 나타날 위험이 있다. 지금도 전파율과 치사율이 높은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가 백신에 대한 내성을 갖게 되면 훨씬 강력하고, 심지어 사람에게까지 전염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훨씬 심각한 대유행이 닥치는 것을 막기 위해 굳이 조류 인플루엔자 백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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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아무리 좋은 범용백신을 만들어 낸다 하더라 도, ‘범용’이라는 단어에는 ‘지금은’, ‘한동안은’ 이라 는 의미가 녹아 있다. 범용 백신으로 방어할 수 있는 바이러스가 도태되고 사람들이 한시름 놓는 사이, 그 백신에 저항성을 가진 또 다른 변종 인플루엔자바이 러스가 나타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중국 춘추시대 지략가 손 무는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고 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고대 지략가조차 ‘백전백승’이라는 장밋빛 전술을 논하지 않았듯이, 끊임없이 진화하는 인플루엔자를 상대로 ‘백전백승’을 단언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끊 임없이 인플루엔자바이 러스를 연구한다면, 변 종 인플루엔자와 맞서 도 위태롭지 않을 수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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