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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변종 플루 HXNX

사상 최악의 가상 시나리오


툭! 아, 또 떨어졌나 보네? 처음에 봤을 때는 너무나 꺼림칙했는데(무서워서 며칠 동안 창문으로 넘어 다님)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주 전부터 하늘에서 죽은 비둘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지금껏 지구상에 없었던 변종 인플루엔자 때문이었다.

문제는 비둘기만 이 독감에 걸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야생조류뿐만 아니라 오리나 닭(달걀 구경을 못한 지 세 달이 넘었다) 같은 가금류, 심지어 포유류도 전염이 의심됐다. 그리고 독감에 걸린 또 하나, 바로 TV였다. 어느 채널을 틀어도 인플루엔자 얘기뿐이라 공포는 점점 무뎌지고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가을부터 유행 중인 변종 플루는 확산범위도 넓지만 치사율이 매우 높습니다. 최근에는 변종 플루에 감염된 개도 발견됐습니다.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조류독감인 H5N8과 개독감인 H3N8 바이러스가 유전자재편성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간 숙주인 돼지에서….”

인플루엔자 얘기에서 돼지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돼지는 조류독감뿐만 아니라 사람독감에도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돼지가 걸린 독감이라면 운이 나쁘면 사람도 걸릴 수 있다. (돼지는 조류독감과 사람독감에 모두 걸릴 수 있다. 둘 다 동시에 걸릴 경우, 두 바이러스가 섞인 변종이 생길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2파트에서 확인!)

‘바이러스 전문기자가 이 시국에 웬 두문불출? 변종 플루에 걸린 게 아닌 이상 당장 나왓!’

M선배의 문자였다. 감기 핑계로 쉬는 것도 사흘을 못 가는구나. 사실 휴가를 낸 건 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날마다 변종 플루에 대한 특종감이 쏟아지고 있는데, 나 역시 인쇄기처럼 기사를 줄줄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유일한 가족 고뿔이를 지켜봐야 했다.

고뿔이는 믹스견이다. 무슨 이유인지 며칠 전부터 시름시름 앓았다. 쉭쉭 거리며 거친 숨을 쉬기도 하고, 가끔은 먹이를 삼키지 못하고 피와 함께 뱉어냈다. 너무 무서웠다. 바깥에서 툭툭 떨어지는 새와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고뿔이와 함께 스스로 집 안에 격리됐다.


S구역에 끌려가다
며칠 뒤, 보고 싶지 않은 뉴스가 나왔다.

“최근 의심환자로 분류됐던 40대 A씨가 변종 플루 감염환자로 확진됐습니다. 그런데 A씨가 키우던 애완견도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개뿐만 아니라 고양이와 말, 호랑이, 고래 등이 인플루엔자에 걸린다. 바이러스의 종류에 따라 각 동물을 감염시키는 능력이 다르다. 79쪽에서 확인!) 최초로 개와 사람 간에 전염이 일어난 셈입니다. 이에 따라 보건당국은 호흡곤란과 출혈 등 증세가 있는 애완동물은 반드시 보건소에서 변종 플루 감염 여부를 검사하도록…. 확진 판정을 받은 애완동물은 국가지정 격리소로…”

다른 종에 전염이 됐다는 건 ‘당장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뉴스에서는 굳이 알려주지 않지만 (상상하기도 싫지만) 감염된 개들은 결국은 요단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나는 고뿔이를 절대 보낼 수 없다. 물론 증상이 딱히 심하지 않으니 변종 플루가 아닐 수도 있고.

그리고 몇 주가 더 지났다. 나도 고뿔이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감기는 딱히 낫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욱 심해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쾅쾅쾅, 신고 받고 왔습니다!”
“최근 며칠간 통 밖으로 안 나오는 게 수상했다니까요?”
무슨 일이지? 문을 열자 방역 복장을 한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그리고 한 사람은 고뿔이가 뱉어낸 피를 닦아낸 수건을 비닐에 담고, 다른 사람은 낑낑대는 고뿔이를 집어 들고…,
그나저나 M선배는 여기 웬일이지? 남의 집에서 뭔 짓이냐고 따지려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이곳 S구역이었다.

◆개독감이 사람에게도 옮을까◆
개는 말과 조류에서 유래해 개에 적응하도록 진화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다(각각 H3N8, 3N2). 이들은 개만 특이적으로 감염시킨다. 그래서 사람에게 전염될 확률이 낮다. 그러나 인플루엔자는 변이가 잦아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2016년 3월 미국에서는 고양이가 H3N2에 감염됐고, 고양이 간 전염도 일어났다.

개가 조류독감(H5N1)에 걸린 새를 먹고 감염된 적도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호랑이와 말, 개, 고양이 등으로 전염될 수 있다. 국내에는 아직 없지만 중국과 태국 등에서 사람이 감염되기도 했다. 유전적 변이가 다양해 판데믹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유력한 후보다. 조류독감에 걸린 개는 폐가 부어오르고, 폐와 간, 신장 등에서 출혈이 일어난다.


변종 플루를 잡는 ‘버섯’
“이 기자도 잘한 건 없지. 그러게 왜 이 판국에 병든 개를 숨겼어?”

안다. 지탄받을 행동이었다는 걸.(집단 내 전염을 막으려면 초기에 대응을 해야 하고, 한 집단 내에서 ‘백신 커버리지’ 만큼의 인원이 면역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3파트에서 확인!) 그래도 의심 신고만 받고 남의 집에 쳐들어와도 되냐고요. 심지어 내가 변종 플루 증상을 보인다는 것만으로 기절시켜서 여기로 데려왔다니까요?

“흥! 누구는 뭐 여기에 갇히고 싶어서 제 발로 왔겠어? 한 사람이라도 전염을 막으려면 감염자를 1초라도 빨리 격리시켜야지. 바이러스 전문가라며?”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나는 바이러스 전문‘기자’라고요. 이제 와서 소용도 없지만.

여기뿐 아니라 각 구역에는 변종 플루 확진자가 200명씩 격리돼 있다. 독감이 사람을 골라 감염시키는 게 아니므로 여기에는 어른도 있고 아이도 있고, 교사, 학생, 공무원, 사장, 기자…, 심지어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과학자도 있다. 내 앞에 있는 K박사다. 바깥에서는 나름 깨나 유명했다고 하는데(바이러스만 10년을 취재했지만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다), 워낙 시니컬하고 제멋대로인데다 가끔은 자기 생각 안에 갇혀 있어 ‘이 구역의 미치광이’로 통한다. ‘H를 막아야 하느니 N을 괴롭혀야 하느니’ 종일 중얼대는 걸 들으면 확실히 정상인은 아니다.

“자아, 이건 노벨 생리의학상 감이야. 인류를 살렸으니 평화상 감이기도 하지! 낄낄.”

내 앞에 K박사가 알 수 없는 약병을 하나 들이댔다. 요즘에는 며칠 동안 그림자도 안 보이게 집에 틀어박혀 있더니 괴상한 약물을 만든 모양이었다. 설마 향정신성, 그런 약은 아니겠지?

“내가 개발한 변종 플루 치료제야. 그냥 간단하게 느타리플루! 느타리버섯 볶음을 생각하다가 영감을 얻었으니까. 지금까지 인류가 매년 백신을 만들고도 인플루엔자를 이기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바이러스의 일부인 단백질 H를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야. 자아, 쉽게 H를 버섯이라고 생각해보자고. 바이러스마다 버섯의 머리 부분이 달라. 어떤 건 둥글고 어떤 건 뾰족하고…. 머리 모양에 맞는 치료제만이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어. 문제는 버섯이 어떤 모자를 쓰고 나타날지 모른다는 거야. 그런데 내가 버섯,아니 H를 막는 참신한 방법을 알아냈어! 버섯 머리가 아닌 기둥을 잘라버리는 거지. 왜냐면 H의 기둥은 모양이 거의 똑같거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종류에 따라 표면에 있는 H단백질의 머리 부분이 달라진다. 과학자들은 바이러스 종류가 달라도 유전적 변이가 거의 없는 H단백질의 줄기 부분을 공략해 감염을 막는 ‘범용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4파트에서 확인!)

K박사는 오늘도 엄청나게 재미없는 얘기를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지난 10년을 바이러스 얘기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덕분인지, 오늘따라 박사님의 이야기가 잘 들린다. 그리고 다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갑자기 가슴 속에서 간지럼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아아, 예전에는 이걸 설렘이라고 불렀지!

K박사의 요란한 수다와 함성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친다. 아침마다 이 세상에 뜨고 지는 해는 딱 하나뿐이지만, 이상하게도 어제까지 봤던 해와 다르게 보인다. 저것은 S구역이 아닌, 예전에 고뿔이와 함께 봤던 ‘황금빛 희망’이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Intro. 인플루엔자
Part 1. 변종 플루 HXNX
Part 2. 변신의 귀재, 인플루엔자의 똑똑한 생존전략
Part 3. 전염과 면역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Part 4. ‘키메라 백신’으로 인플루엔자 예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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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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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진행]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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