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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1. 나는 살아있는 것을 연구한다




#2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 한평생 나를 옭아맨 운명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 나폴레옹이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한다. 왕당파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혁명기에 빼앗겼던 특권을 되찾았다. 그런 시절이었다. 농촌이든 도시든 평민은 모두 찢어지게 가난하고 비참했다. 난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배추흰나비와 큰 멋쟁이나비가 배추꽃에 이끌리듯 꽃과 곤충, 쐐기풀에 끌렸다. 하지만 그런 건 입을 채우는 데 아무런 도움
이 안 됐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 지식욕을 꺾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내가 돌무더기 속에서 매혹적인 곤충을 발견해도, 어머니는 문 앞의 오물 더미에 버리며 깊은 한숨을 쉬셨다. 곤충을 들여다 볼 시간이 있으면 오리를 키우거나 쟁기로 밭고랑을 파야 마땅하다면서.


#3 아, 여기였구나. 바로 앞이었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박물관에 혹시 곤충학자들이 찾아와서 기념식을 하진 않나요? 파브르가 죽은 지 100년째 되는 해라 행사가 있을 것 같은데…. 곤충학자? 못 봤는데. 문인들이라면야 유명한 사람이 많이 찾아왔지. ……, 뭘 자꾸 이상하다고 그래. 곤충학자들이 언제 그 선생 살아있을 때 좋아했는 줄 알어? 곤충학을 문학과 막 뒤섞어놨다며 싫어했다고. 정통 학자도 아니었잖아.


#4 열아홉에 중학교 자연사 선생님이 됐다. 첫 연봉은 700프랑이었다. 이집트완두콩과 약간의 포도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돈이었다. 부모님의 말이 맞는 점도 있었다. 지식욕이 없었더라면 이 먹고 살기 팍팍한 선생질을 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서른둘에 딸이 셋으로 늘었을 때도 연봉은 1600프랑에 불과했다. 이웃의 부잣집 마부가 받는 것보다도 적은 돈이었다. 그래도 나를 비참한 현실에서 해방시켜주는 건 과
학이었다. 곤충학 책을 읽으면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야외 관찰을 할 시간은 목요일 오후와 일요일뿐이었다. 교수가 돼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침 내게 교수 자리를 제안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돈이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곤충이나 식물을 연구하는 박물학자는, 나를 빼면 모두가 귀족 출신이다. 교수도 마찬가지고.


현대 곤충학자들은 파브르를 기념하지 않는다


#5 거봐, 파브르 박물관에 곤충학자가 없다니, 그게 말이 돼? 노인의 말은 틀렸다. 곤충학자 한 무리가 모인 틈새에 살며시 끼여 이야기를 엿듣는 중이다. 말끔한 인상의 A, 푸근함이 느껴지는 B, 젊은 C는 곤충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셋 다 안경을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보다 파브르도 놀랄 말을 여지없이 뱉어내는 투가 비슷하긴 하지만.


“현대 곤충학자들이 파브르의 연구를 기억할 이유가 없긴 하지.” A가 선공에 나섰다. B와 C가 바싹 다가 붙었다. “파브르가 살았던 때는 곤충연구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거든. 어떤 곤충이든 가리지 않고 연구를 했어. 근데 파브르가 죽고 시간이 지날수록 분야가 세분화됐지. 요샌 특정 분류군만 집중적으로 연구한다고. 난 딱정벌레 중에서도 잎벌레 전문가예요. 내가 나비 연구하면 학계에서 웃어. 근데 파브르는 어떤 줄 알
아? 분류군이 곤충 전체예요.”


B가 말을 얹었다. “요새 누가 기초연구를 합니까. 전부 응용 위주지. 분류학자가 멸종위기라는 말까지 돌잖아요. 유전학이 거기에 쐐기를 박았지. 요즘 학자들은 곤충을 직접 보지 않고 DNA를 분석하니 파브르의 연구를 돌아볼 일이 더 없어졌어.” “출신도 중요해.” A가 다시 주도권을 찾아왔다. “파브르는 학계 바깥의 아웃사이더였어. 귀족도 아니고 시골에서 혼자 연구하는 가난한 농부였잖아. 난 파브르를 보면 월리스가 떠올라. 다윈과 독립적으로 진화론을 생각해냈지만, 사람들은 진화론 하면 다윈만 기억하잖아. 당시 학계에서 월리스는 별 힘이 없었거든. 귀족도 아니었고.”


“진화론 하니까 생각나는데” 커피를 들이킨 B가 말을 잘랐다. “학자들만 파브르를 무시한 게 아니라 파브르도 다른 학자들을 무시했어. 고집과 오만이 있었지.”





#6 나는 평생 끈질기게 곤충을 관찰하고 실험했다. 남이 연구한 건 잘 믿지 않았다. 철저히 내 눈으로 본 것만 믿었다. 노래기벌이 비단벌레를 죽이지 않고 마취시킨다는 것도 내가 밝혀낸 사실이다. 노래기벌한테 독침을 쏘인 비단벌레를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정상적으로 배설을 했고, 휘발유를 뿌리거나 전기를 통하게 하면 더듬이와 근육을 움찔거렸다. 이걸 죽었다고 생각했다니, 이전 학자들은 제대로 관찰하지 않
았음에 틀림없다. 노래기벌의 애벌레는 죽은 비단벌레 시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오직 살아있는 비단벌레의 내장만 먹는다. 나는 이 사실을 밝혀 프랑스 학사원으로부터 몽티용 상을 받았다. 찰스 다윈도 ‘종의 기원’에서 내 이름을 언급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관찰자’라고 추켜세웠을 정도다.


찰스 다윈의 이름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해야겠다.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진화론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사실과 너무나 다르다. 곤충은 사람과 결코 같을 수 없다. 사람은 양심이나 의무, 노동의 신성함을 배울 수 있는 이성이 있다. 곤충은 그런 게 없이 오직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진화론은 인간만이 가지는 존엄성을 부정하는 난폭하고 경솔한 학설이다.
이런 잠꼬대 같은 소리가 한둘이 아니다. 학문에 풋내기인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들이 있다. 동물이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주변 환경에 맞춰 색깔이나 형태를 바꾼다는 ‘의태설’이 대표적으로 유치한 놀음이다. 어쩌다 눈에 띈 외견상의 일치를 사팔뜨기 눈으로 보고 적당히 꿰어맞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파브르를 기억해야 할까?



#7 잠깐, 그럼 이제 파브르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요? 마음이 급한 나머지 대화에 불쑥 끼어들고 말았다. 아차…, 곤충학자들의 눈에 황당해하는 빛이 역력하다. 그래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는 인내심을 보니 역시 파브르의 후예답다. B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죠. 파브르는 당연히 기억해야죠. 어느 누가 파브르만큼 살아있는 곤충을 꼼꼼하고 세밀하고 정확하게 관찰했나요. 파브르 이전에는 곤충 시체를 수집하고 해부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수년에 걸쳐 곤충의 생애 전반을 끈기 있게 지켜본 파브르의 고집스런 태도는 저도 본받고 싶습니다.”


“한 마디로 곤충생태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죠.” 그때까지 아무 말 없던 C가 끼어들었다. “게다가 쉽고 아름다운 글을 남겼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 그 이전의 어떤 학자가 곤충의 생활사를 대중서로 썼나요. 곤충의 삶이 흥미롭고 재밌다는 사실을 일반 사람들은 몰랐을 겁니다. 파브르가 없었다면.”





#8 산누에나방과 솔나방 연구 8년, 쇠똥구리 연구 40년. 내 연구는 대개 이런 식이다. 쇠똥구리가 똥을 굴릴 때 다른 개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잘못된 학설을 뒤집기 위해 별별 실험을 다 해봤다. 똥을 나무꼬챙이에 꽂아서 쇠똥구리가 버둥거리게 만든 모습을 누군가 봤으면 미쳤다고 했을 거다. 그래도 그건 낫다. 사거리에서 벌이 든 통을 들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옆집 처녀가 봤다면, 아마 내게 마귀가 씌였다고 생각했을 거다. 송충이의 독성을 실험하기 위해 불쌍한 내 피부를 혹사시킨 정도는 이야깃거리도 안 된다.


내 삶의 후반부를 고스란히 바친 곤충기 10권에 이 내용들을 모두 담았다. 난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뭔가를 기록했다. 워커홀릭, 아마 후대에는 내게 이런 별명이 붙을지도 모르겠다. 주머니에는 늘 몽당연필이 있었으니까. 내 이런 노력을 아무도 안 알아줘도 좋다. 곤충들은 똑똑히 알고 있을 테니까.


“사람들은 내 문장에 무게가 없다고 한다. 학자나 지식인들의 문장처럼 고귀하거나 엄숙한 문구가 없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쉬운 글은 진리를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거기 있는 너희 모두, 독침을 가진 너희들, 그리고 갑옷 같은 딱지날개로 몸단장을 한 너희도 이리 오너라. 모두 와서 나를 보호하고, 내 편이 되나 참고 견디면서 그대들을 관찰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양심적으로 너희 행동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말
해 주렴. 그대들의 증언은 만장일치일 것이다(‘파브르 곤충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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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21세기 파브르 곤충기
PART1. 나는 살아있는 것을 연구한다
PART2. 파브르가 사랑한 곤충, 그리고 우리 곤충
PART3. 나는 한국의 파브르입니다.

2015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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