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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입장에서 바이러스의 방문은 언제나 달갑지 않다. 조금만 무리했다 싶으면 찾아오는 가벼운 몸살감기에서부터 눈병, 장염, 그리고 목숨을 위협하는 악명 높은 바이러스까지….
그런데 반대로 바이러스 입장에서 보면 인간을 감염시키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간의 몸은 바이러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다양하고도 견고한 방어 전략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이러스가 인간을 감염시키고 세포 속에서 증식해 다른 숙주로 옮겨가기까지의 전 과정은 면역체계와의 술래잡기라 할 수 있다.
일단 체내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고난의 시작이다. 우리 몸은 바이러스가 세포에 접근하는 단계에서부터 표피세포에서 분비하는 산성물질, 병원균 분해효소 등으로 초도방어를 개시한다. 만약 끝내 이를 뚫고 세포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가 있다면 우리 몸은 발열반응과 염증을 일으킨다. 발열반응은 열에 약한 바이러스를 무력화시킨다. 또 염증은 모세혈관을 확장시켜 인터페론 같은 항바이러스성 단백질과 백혈구를 감염된 조직에 대량으로 투입한다. 자연살해세포는 감염된 세포를 파괴해 바이러스도 함께 죽인다. 이런 일사불란한 전투가 바로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왔을 때 일어나는 1차 면역반응이다.
그런데 이런 면역작용이 언제나 완벽하다면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건강 상태나 컨디션에 따라 면역 능력은 약해질 수 있으며, 바이러스 또한 숙주의 면역체계를 뚫을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바이러스 진영이 지금까지 건재하다는 자체가 그들의 전략이 성공적임을 증명한다.
죽어가는 세포를 구한 착한 바이러스?
앞서 말했듯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감염된 세포를 죽이거나 신호를 보내 스스로 사멸하게끔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이러스가 세포내 물질을 빼앗아 자신을 복제하고 다른 세포와 기관으로 까지 감염을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표적인 호흡기 감염 바이러스인 아데노바이러스는 숙주의 면역계가 자살을 명령한 세포를 도리어 살려낸다.
아데노바이러스는 감염초기부터 E1B라는 단백질을 만들어 세포의 사멸을 억제한다. 그리고 감염시킨 세포를 최대한 오래 살려두면서 자신을 복제하기 위한 노예로 사용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바이러스는 E1A라는 다른 단백질을 만들어 조용히 잠자고 있는 근처 세포를 깨워 세포분열을 촉진한다. 세포분열을 촉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포는 세포분열을 준비하고 있을 때만 유전정보를 복제하기 때문이다. 즉, 아데노바이러스는 자신을 복제하기 좋은 상태로 주위 세포를 고정시켜 버리는 것이다.
인유두종바이러스(HPV)는 노예화된 세포를 더 악랄하게 부린다. 이를 위해 이 바이러스는 세포 속에 있는 p53이란 단백질을 노린다. 이 단백질은 세포의 이상증식을 억제하고, 만약 이상증식이 일어나면 스스로 죽도록 유도하는 항암 단백질이다. 이 단백질이 무력화된 세포는 무분별하게 증식하는 상태, 즉 암세포가 된다. 인유두종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암이 바로 자궁경부암이다.
그런데 만약 암에 걸린 숙주가 죽어버린다면 살아있는 세포가 있어야 증식할 수 있는 바이러스에겐 손해가 아닐까. 숙주인 인간이 암으로 사투를 벌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바이러스가 스스로를 복제하고 숙주의 성관계를 통해 또 다른 숙주를 찾을 만큼 충분히 길다는 점을 잊지 말자. 결국 인유두종바이러스는 감염된 세포를 사멸시키는 면역체계를 농락할 뿐 아니라, 증식에서 다른 숙주로의 감염까지 인간을 제 목적에 맞게끔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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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체를 역이용하는 뎅기열바이러스
이전 감염으로 만들어진 항체가 새로 감염된 뎅기열바이러스를 무력화하지 못한다➊.
바이러스가 세포 속에 쉽게 들어가도록 항체가 돕는다➋.
바이러스 입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증상이 악화된다➌.
이 면역계는 이제 제껍니다
1차 면역반응에 이은 2차 면역반응은 침입한 바이러스를 정밀 분석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한다. 분석 후 면역체계는 침입했던 바이러스 종류만을 골라내 인식할 수 있는 항체를 분비한다. 항체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만을 찾아내 강력한 면역세포인 T세포가 죽이도록 유도한다. 목표만 정확히 선별해 파괴하기 때문에 예전에 감염됐던 바이러스가 다시 침입했을 때 일어나는 2차 면역반응은 1차 면역반응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강력하다.
그런데 이런 2차 면역반응을 도리어 역이용하는 바이러스가 있다. 1988년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 40만 명을 감염시켜 8000명을 죽이고, 지금도 여전히 열대지방에서 악명을 떨치는 뎅기열바이러스다. 일반적으로 한 번 감염됐던 바이러스에 또 감염되면 강력한 2차 면역반응 덕분에 바이러스를 쉽게 물리칠 수 있다. 그런데 뎅기열바이러스는 2차 면역반응을 주도하는 항체에 달라붙어 항체를 세포로 들어가기 위한 ‘출입증’으로 이용한다.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만든 항체가 되레 바이러스가 쉽게 세포를 침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숙주의 몸에서 되도록 오래 머무르며 증식하는 것을 선호하는 바이러스는 면역계를 유린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마련했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는 2차 면역반응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T세포를 아예 감염대상으로 삼아 장기적으로 면역능력을 무력화시킨다. 또한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는 아직 원인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백신을 투여하면 감염과 증상이 악화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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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지 그룹의 바이러스(발티모어 분류)
미국 생물학자 데이비드 발티모어가 고안한 분류법이다. 바이러스를 핵산의 종류와 가닥 수, 극성, 복제 방식의 조합으로 7그룹으로 나눴다. 세포 안에서 단백질은 DNA가 전사된 형태인 전령 RNA(mRNA)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바이러스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령RNA를 만들어 세포 안에서 원하는 단백질을 합성한다. DNA에 유전 정보를 저장하는 그룹1, 그룹2 바이러스를 DNA 바이러스라 하며, RNA에 저장하는 그룹 3~6 바이러스를 RNA 바이러스라 부른다. 또 역전사효소를 갖고 있는 그룹6 바이러스를 레트로바이러스, 그룹7 바이러스를 파라레트로바이러스라 한다.
널 아프게 하는 덴 다 이유가 있다
숙주의 면역계를 속이거나 물리치고 세포를 감염시키는 것만으로 바이러스가 승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진정한 승리란, 숙주가 죽거나 재정비한 면역계가 다시 맹렬한 반격을 하기 전까지 다른 숙주에게 성공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데에는 바로 이런 목적이 숨어있다.
B형간염바이러스(HBV)는 사람에게 급성간염과 만성간염을 일으키고, 최악의 경우 간암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B형간염 바이러스는 세포 파괴를 바이러스 배출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 바이러스가 만든 HBX라는 단백질은 간세포를 새롭게 만들라는 신호를 파괴하라는 신호로 뒤바꾼다. 간세포가 파괴되면서 바이러스는 전신으로 퍼져나가 혈액이나 타액을 통해 타인에게 전염되기 좋은 상태가 된다. 바이러스의 행동에는 다 까닭이 있다.
각각의 바이러스가 특정 전략을 고수하는 데도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앞서 소개한 아데노바이러스, 인유두종 바이러스는 자신의 유전정보를 저장하는 데 사람처럼 DNA 이중가닥을 쓰는 공통점이 있다. 그 형태가 같기 때문에 오래 있을 수만 있다면 세포를 이용해 무한정 증식할 수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암을 일으키면서까지 계속해서 숙주 몸속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이유다.
반대로 감기, 독감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들은 짧은 잠복기와 뛰어난 전염능력을 바탕으로 숙주를 빠르게 옮겨 다니는 ‘게릴라 전략’을 쓴다. 빠르게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략을 써야만 하는 이유는 이렇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포함해 이런 바이러스들은 유전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으로 RNA 가닥을 사용한다. RNA 바이러스는 감염된 숙주세포 안에서 자신의 유전정보를 복제할 때 먼저 이중가닥 RNA를 만든다. 그런데 이중가닥 RNA는 정상세포 안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물질이어서 세포는 금세 바이러스의 공격을 알아채고 집중포화를 퍼붓는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기침이나 재채기를 일으키는 것도 지금 숙주를 벗어나 다른 숙주에게로 옮겨가기 위해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환자를 완전히 쓰러뜨려 몸져눕게 하는 대신, 어느 정도 활동이 가능하게 두는 것도 더 많은 사람(숙주)을 만나 쉽게 전파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바이러스와 너무 싸우면 오히려 죽는다
다른 숙주로 옮겨갈 겨를도 없이 숙주가 빠르게 죽어버리는 것은 바이러스에게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바이러스 학자들이 가장 잘 진화된 형태로 꼽는 HIV는 숙주인 사람을 아무런 치료 없이도 보통 10년에서 15년 간 살려둔다.
그런데 그런 바이러스의 의도가 잘 먹히지 않을 때가 있다. 바이러스가 전혀 새로운 숙주와 만났을 때다. 2004년 1월 태국에서 한 소년이 극심한 폐렴 증세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소년의 폐는 완전히 망가져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분석결과 이전까지 인간이 감염된 적이 없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소년은 공식적으로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H5N1의 첫 사망환자가 됐다.
계절독감으로 익숙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이렇게 치명적일 수 있었던 데는 인간의 면역반응에 일부 책임이 있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침입하자 면역계가 과반응을 일으켜 도리어 인체에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사이토카인 폭풍’이라 부른다. 사이토카인 폭풍은 면역능력이 강한 젊은 층일수록 더 세게 일어난다.
만약 집에 좀도둑이 들었다면 작은 손해를 각오하고 인기척을 내 도둑 스스로 도망가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만약 몽둥이를 들고 도둑과 싸우려든다면 도둑은 강도로 돌변한다. 인체가 H5N1에 감염되면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새 대신 낯선 숙주(인간) 몸속에 들어온 바이러스는 과민 반응한 면역계와 죽기 살기로 싸운다. 결과는 50%가 넘는 승률(사망률)로 바이러스의 승리.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비싸다. 숙주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바이러스 역시 함께 죽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악명을 떨치면서도 조류독감의 사망환자 수가 전 세계에서 400명을 넘기지 않은 이유다. 이 질병이 아직 사람 사이에서 감염되는 사례가 나타나지 않은 것도 바이러스가 인체라는 새로운 숙주에 적응하지 못한 이유로 추정할 수 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인류와 적당히 상생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을 것이며, 그 결과 매년 유행하는 계절독감의 한 종류로 변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미 앓고 있는 계절독감 인플루엔자도 본래는 오래 전에 조류로부터 넘어온 것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차츰차츰 적응해 가는 것이 바로 숙주와 바이러스의 공진화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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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바이러스의 인간사육
Part 1. 8월 바이러스 대습격
Bridge. 사람이 일으키는 대유행 전염병, 바이오테러
Part 2. 바이러스가 당신을 당장 죽이지 않는 이유
Part 3. 바이러스는 어디서 왔는가?
Epilogue. 인류는 바이러스로 멸망하지 않는다
글 성백린 blseong@yonsei.ac.kr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MIT에서 생물학 박사를 마쳤다. 현재 연세대 생명시스템대학 생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국제백신연구소 객원선임연구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