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로 인류가 멸망하는 일은 없습니다. 바이러스의 목적은 숙주를 죽이는 게 아니에요.”
정 교수는 19세기 중반 호주에서 있었던 토끼사냥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외래종으로서 호주에 데려온 토끼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정부는 토끼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풀었다. 초기 치사율이 무려 99%였다. 정부의 바람대로 토끼는 정말로 빠르게 죽어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간이 지나자 치사율이 절반으로 그만 뚝 떨어졌다. 토끼 중에 이 바이러스에 강한 종자만이 살아남았고, 그 사이 바이러스도 토끼에게 익숙해지면서 독성을 떨어뜨렸다. 만약 서로에 대한 적응이 없었다면 호주에서는 토끼도 사라지고 바이러스 또한 사라졌을 것이다. 이 사건은 숙주와 바이러스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게 만든 중요한 사례가 됐다.
“바이러스는 보통 잘못된 숙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야 비로소 치명적입니다. 조류 인플루엔자는 닭과 사람에게는 치명적이지만 본래 숙주인 철새 안에서는 해가 없어요.”
정 교수는 바이러스 입장에서 숙주를 3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아주 오랫동안 공존해왔기 때문에 거의 해를 끼치지 않는 오리지널 숙주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형태는 철새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철새는 인플루엔자에게 안락한 고향인 것이다. 둘째로 바이러스가 감염시킬 수 있고, 병을 앓는 숙주가 있다. 정 교수는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를 만났고, 아직 그 시간이 오래지 않았을 때 이렇다”고 말했다. 마지막은 바이러스가 아예 감염시킬 수 없는 숙주다. 바이러스는 저마다의 생활구역이 있으며, 종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이를 종간장벽이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더 아픈 건 오래 살기 때문
“예전보다 대상포진 환자 수가 늘었다죠. 인류가 오래살기 때문이라곤 생각 안 해보셨어요?”
전보다 바이러스성 질환이 늘어나지 않았냐는 질문에, 정 교수는 이렇게 반문했다.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고통 받는 환자 수가 예전부터 늘어난 까닭은 수명이 길어지면서 면역계가 약해진 책임이 크다는 뜻이다. 대상포진을 일으키는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평소에 아무렇지 않다가 면역계가 정상보다 약해졌을때 질환을 일으킨다.
그래도 좀 더 의학기술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인류가 바이러스를 정복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1979년 인류가 천연두바이러스를 박멸한 것처럼 말이다.
“인플루엔자가 숙주를 한 번 옮길 때 일으키는 유전자 돌연변이를 HIV는 단 하루에 끝냅니다. 이런 영리한 바이러스들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정 교수의 말은 인류가 아무리 시간이 지난들 바이러스로부터 해방되는 날은 없을 것처럼 들렸다. 정 교수가 덧붙였다.
“바이러스는 숙주와 그냥 그렇게 함께 지내는 친구(親舊)입니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 왔듯이요.”
정재웅
2004년 한인 최초 하버드대 종신교수
2006년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외래교수
2007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케크의과대 교수
2007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분자생물학 및 면역학과 학과장
2012년 제22회 호암상 의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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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바이러스의 인간사육
Part 1. 8월 바이러스 대습격
Bridge. 사람이 일으키는 대유행 전염병, 바이오테러
Part 2. 바이러스가 당신을 당장 죽이지 않는 이유
Part 3. 바이러스는 어디서 왔는가?
Epilogue. 인류는 바이러스로 멸망하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istockphoto,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