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 마리 정자의 치열한 경쟁은 들어봤겠지만, 난자도 경쟁한다고? 자궁 안에 있는 임신 20주 된 여아의 태아를 찾아가보자. 이 여아는 이미 세포 분열을 통해 난소 안에 600만~700만 개의 생식 세포를 지니고 있다. 이때를 전후해 난자를 싼 주머니인 ‘난포’를 만드는데, 80%인 500만 개 이상의 난포는 성장하지 못하고 퇴화해 버린다. 태어날 때 가지고 있는 난자(난포)의 수는 100만~200만 개다. 사춘기에 도달하면 난포는 다시 30만~50만 개로 줄어든다. 그중에서 초경을 시작한 뒤 폐경을 맞을 때까지 35~40년 동안 여성이 배란하는 난자의 수는 400~500개다. 생명으로 태어나는 건 이중 한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니 난자의 생존 경쟁 또한 만만치 않다.
난자도 생존경쟁 한다
가장 비정한 경쟁은 지금부터다. 배란이 되려면 난포가 충분히 성숙한 뒤 여기에서 난자가 나와야 한다. 준비가 끝난 여러 개의 난포가 월경 85일 전부터 같은 출발선 위에 서서 경쟁을 시작한다. 난포는 난포자극호르몬(FSH)의 도움을 받아 성숙한다.
이때 가장 성장이 빠른 우성난포는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술수’를 쓴다. 다량의 여성호르몬을 만들어 자신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FSH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준비가 부족한 다른 난포가 퇴화하도록 만들고 자신만 성장한다. 동일 선상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가장 준비를 잘 한 난자 하나만 경쟁자를 물리치고 배란된다.
배란된 난자는 여성의 몸 안에서 24시간 정도 생존이 가능하므로 24시간 이내에 정자와 만나야 수정될 수 있다. 정자가 여성의 몸 안에서 생존하는 시간은 72시간이다. 경쟁에서 이겨 배란이 됐다고 해도 운이 좋아야만 정자를 만날 수 있다. 보통 월경 주기 한 번에 난자 하나만 배란이 일어나는 게 정상이지만, 난자 두 개가 동시에 배란될 수도 있다. 난자 두 개가 동시에 수정되면 이란성 쌍둥이가 태어난다. 난자
가 두 개 이상 배란되는 데는 유전의 영향이 크다. 자신이 이란성 쌍둥이인 경우에는 58분의 1 확률로, 남편이 이란성 쌍둥이인 경우는 116분의 1로 유전된다. 이란성 쌍둥이 중 특이한 경우는 아버지가 다른 경우다. 한 월경 주기에 서로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어 아버지가 서로 다른 쌍둥이를 낳았다는 보고가 있다.
여성의 나이가 30세가 넘으면 난소는 노화하기 시작한다. 임신할 능력이 가장 높은 나이는 24세 전후이며, 37세에 이르면 난소 안의 난자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한다. 배란된 난자가 없어지면 폐경에 이르는데, 폐경이 오는 나이는 대부분 모친이 폐경을 겪는 나이와 거의 같다. 난소의 노화가 시작되면 난자의 질도 떨어진다. 고령에 임신하면 유산될 위험이나 염색체 이상과 같은 문제가 생길 확률이 커진다.
[정자 테스트를 위해 현미경으로 찍은 정자의 모습]
자궁의 엄한 테스트 받는 정자
난자의 짝인 정자는 어떻게 수정을 준비할까. 사춘기가 되
면 고환의 생식세포에서 정자가 만들어진다. 그 과정은 64~80일이 걸린다. 만들어진 정자는 부고환에 보관돼 있다가 성교 시에 방출된다. 정자의 생성은 온도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고환은 몸 밖에 노출돼 있다. 좁은 곳에 너무 오래 앉아서 고환에 압박을 가하거나 사우나 또는 뜨거운 욕조 안에서 장시간 열기에 노출하면 정자의 생성에 장애가 생긴다.
정자가 난자를 수정시키기 위해서는 한 번에 사정된 정액의 양이 2ml 이상이어야 한다. 정자의 수는 ml당 2000만 개 이상, 액화 후 운동성이 50% 이상,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30% 이상이 정상적인 모양이어야 한다. 최근에는 정자를 염색한 뒤 엄격한 잣대로 관찰했을 때 최소한 5%가 정상적인 형태면 임신이 가능하다고 밝혀졌다.
정액이 사정되면 1~2억 개의 정자가 여성 질 내로 방출된다. 한 개의 난자를 수정시키는 데 왜 1~2억 개나 되는 정자가 필요할까.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자궁이 수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궁에 들어간 정자는 나팔관에서 배란된 난자를 만나기 위해 15~20cm를 여행해야 한다. 과거에는 정자가 섬모운동으로 몇 시간 안에 난자에 도착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궁이 정자를 끌어들이기 때문에 상당히 빨리 난자 근처에 도착한다. 그 동안 정자는 질 내에서 분비되는 산성물질에 죽기도 하고, 자궁경부에서는 대식세포에 의해 잡아먹히거나 방향을 잃기도 한다. 일부는 자궁경부에 잡혀서 나중에 난자를 찾아가도록 저장된다. 아무 정자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편안한 환경은 절대 아니다.
흔히 1등으로 도착한 정자가 난자와 결합한다고 알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장 먼저 도착한 정자 수백 마리는 먼저 난자를 싸고 있는 난구세포를 없애야 한다. 선두 그룹은 난구세포를 없애는 데 온 힘을 쏟아 버린 나머지 탈진해 버린다. 그 다음으로 난자를 둘러싸고 있는 투명대에 도달하는 건 뒤를 따라오던 그룹의 정자 무리다. 앞서 나간 정자는 괜히 남 좋은 일만 시켜준 셈이다.
투명대를 통과한 정자는 난자의 세포막과 결합하고, 정자의 머리만 난자의 세포질로 들어간다. 정자를 받아들인 난자는 투명대를 두껍게 만들어 다른 정자가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동시에 투명대에 있는 결합 부위를 비활성화시킨다. 단 하나의 정자만 허용하는 것이다. 만약 두 개 이상의 정자가 난자에 들어가면 수정란 발달이 멈추고 퇴화해 버린다.
[수정란이 난관을 통과하지 못하면 자궁 외 임신이 된다. 사진은 자궁 외 임신이 된 배아. 5주쯤 됐으며, 크기는 1cm정도이다.]
수정란 됐다고 안심은 금물
정자가 자궁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운동성이 가장 중요하다. 사정된 정자 중에서 운동성이 없거나 형태가 비정상적인 정자는 처음부터 자궁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탈락한다.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정자가 수정능력도 떨어질 수 있다는 가설이 있지만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최근 히알루론산이라는 물질과 결합한 정자가 안정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연구도 나왔다. 히알루론산과 결합한 정자는 난자의 투명대에 결합한 정자와 비슷한 성질을 보여주는데, 그런 정자일수록 유전자가 완전하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아기 시술에서 정자 하나를 선택할 때 유전자의 완전성을 검증하는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지만, 아직 임상에서는 쓰이고 있지 않다.
수정란은 나팔관 안에서 세포
분열을 시작해 배아로 발달하면서 자궁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달 착륙선이 내려앉듯 자궁내막에 착상한다. 그러나 고난의 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착상이 끝난 뒤에도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태아는 자연선택 과정에 따라 유산된다.
수정란에서 배아가 형성된 이후에도 70% 정도는 자궁 안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이중 50% 정도는 임신이 됐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한 채 다음 월경 때 사라져 버린다. 최근 임신호르몬 검사를 통해 정밀하게 검사해 보면 자궁내막에 착상한 배아 중 31%는 임신으로 진행되지 못한 채 유산되고 만다. 유산되는 배아는 대부분 염색체 결함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 선택 과정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오랜 진화 과정은 건강한 난자와 정자가 수정될 수 있도록 엄마의 몸을 정성들여 만들었다. 난자가 배란되고 정자가 난자를 만나기 위해 험난한 길을 거치고 수정란이 착상돼 배아로 발달하는 그 모든 과정마다 엄격한 자연 선택이 작용해 탈락자를 떨궈낸다. 이 과정이 100%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엄마의 자궁이 건강한 생명을 위해 수시로 모진 선택을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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