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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꼭…, 약속 지킬게.”
백혈병을 앓던 딸은 병원에 채 못 미쳐 아빠의 택시 뒷좌석에서 숨을 거둔다. 23살 젊은 나이에 하늘 나라로 떠난 딸을 보며 아빠는 약속한다. 공장에서 억울하게 병을 얻어 고통 속에 죽어갔음을 알리겠노라고….
그날부터 아빠는 길고 긴 싸움을 시작한다. 딸이 일하던 반도체 공장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2월 6일 개봉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다니다 백혈병에 걸려 2007년 사망한 황유미 씨와 그녀의 아버지 황상기 씨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한참이나 미뤄지다가 크라우드 펀딩으로 시민 7500여 명의 후원을 받고 간신히 제작됐다.
아버지는 딸이 백혈병에 걸린 이유가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하던 유해화학물질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백혈병은 골수에 있는 조혈모세포(혈액을 만드는 세포)에 이상이 생겨 백혈구와 적혈구, 혈소판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병으로, 10만 명당 4.8명꼴로 걸리는 희소병이다. 반도체 공장에서 웨이퍼(기판)를 화학물질 용액에 담갔다 빼는 일을 하던 황유미 씨를 비롯해 같은 작업라인에서 일하던 동료 이숙영, 황민웅 씨도 이 병에 걸려 사망했다.
같은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똑같은 희소병에 걸렸다? 아버지 황상기 씨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이숙영 씨는 황유미 씨와 2인 1조로 늘 같이 일하던 사람이다. 우연으로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조사를 했더니 세 사람뿐 아니라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병에 걸려 회사를 그만두고 있었다. 황상기 씨가 앞장서 문제를 제기하자 피해자와 가족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께 외쳤다. 우연이 아니라 산업재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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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방진복은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
반도체 공장은 깨끗하다. 특히 반도체를 생산하는 클린룸은 먼지 하나 용납하지 않는다. 가로와 세로, 높이가 각각 1피트(약 30cm)인 정육면체 속에 지름 0.5μm인 미세먼지가 1개 이하로 있는 수준인 ‘클래스1’을 유지한다. 지구만한 공간에서 한 변이 6.6m인 건물 한 채만 떠다닌다고 생각하면 된다.
반면 반도체 자체는 그리 깨끗하지 않다. 사람에게 해로운 수백 가지 화학물질이 섞였다 흩어지며 반도체를 만든다. 반도체 산업이라고 하면 하얀 방진복부터 떠올리며 청정산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대표적인 화학물질 집중산업이다. 방진복도 반도체에서 사람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들은 방진복이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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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진복이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일까. 1990년대~2000년대 초반 공장에서 일했던 피해자들은 방진복이 방수가 되지 않아 작업 중 화학물질이 튀면 금세 젖었다고 말한다. 종이 마스크 역시 쉽게 젖었고 그나마 더워서 벗고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는 압박에 쫓기면 장갑도 없이 반도체 칩을 맨 손으로 만진 경우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환기가 잘 되지 않아 공장이 늘 화학물질 냄새가 나는 환경이었다는 설명은 공통적이다. 물론 삼성전자에서는 클린룸이 “청정 환경이 유지”되는 공간이며 방진복 역시 “제품과 사람 모두를 보호”한다고 밝히고 있다.
학교에서 간단한 화학실험을 할 때도 실험복과 고글, 안전장갑은 필수다. 그런데 염산이나 트리클로로에틸렌(TCE)처럼 사람 목숨을 위협하는 물질을 다루면서 안전관리가 제대로 안 됐다? 믿기 힘든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작업자들이 어떤 화학물질에 노출되고 있는지 회사에서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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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서울대 산학협력단은 3개 반도체 회사(삼성전자, 하이닉스, 엠코코리아)의 의뢰를 받아 역학조사를 실시한 결과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에서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을 발견했다. 반도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벤젠이 나오는지는 회사도 몰랐다. 산학협력단은 보고서에서 “(회사가) 사용하고 있는 화학물질 중 28.9%만 측정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독성이 높은 물질에 대한 검토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2012년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에서 반도체 생산공정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발암물질인 벤젠, 포름알데히드, 비소, 이온화방사선 등이 검출됐다. 고용노동부는 “극미량이어서 근로자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피해자 측은 “근무하던 당시 가스노출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완벽히 통제된 상태에서 측정한 농도는 의미가 없다”고 반박했다.
희소병은 정말 반도체 공정 때문일까, 아닐까. 삼성전자는 반도체 공정과 암 사이에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2007년, 2008년 산보연에서 조사한 결과를 예로 들며 발암물질이 아예 발견되지 않았거나 농도가 매우 낮다고 강조한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발암율이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오히려 낮다”는 산보연의 설명도 자주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 측은 “통계조사에 오류가 있다”면서 “다른 공장보다 설비가 낡은 1~3라인만 조사하면 다르게 나올 것”이라고 반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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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200여 명, 산재 인정은 4명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특정 질병에 많이 걸린다는 이야기는 1980년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있었다. 컴퓨터 제조회사인 IBM에서 반도체를 만들던 노동자들이 일반인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백혈병과 림프종, 뇌종양, 유방암 등에 걸렸다. 여성들은 평균보다 1.43배나 많이 유산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내셔널반도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도 유방암(5배)과 뇌종양(4배)이 크게 증가했다.
우리나라 반도체 공장에서 주로 발병한 질병도 종류가 비슷하다. 혈액을 만드는 기관에 문제가 생겨서 백혈병이나 림프종, 재생불량성빈혈 같은 희소병이 많이 발생했다. 뇌종양이나 유방암에 걸리거나 유산, 불임, 생리불순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다. 병에 걸린 피해자와 가족들은 의사 등 일부 전문가와 함께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을 만들어 산업재해 신청 등 공동대응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반올림에 접수된 삼성 관련 피해자는 138명으로, 이 중에서 56명이 사망했다(전체 반도체 산업 피해자 제보는 200명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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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 정황을 봤을 때는 언뜻 산업재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산업재해를 인정받는 사람은 드물다. 법에 따라 환자가 직업병을 인정받으려면 직업과 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회사는 영업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물질이나 공정을 쉽게 공개하지 않는다.
잠복기가 있는 것도 문제다. 김현주 이화여대 의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팀이 2012년에 조사한 결과 백혈병과 림프종은 입사 시점부터 평균 8년 7개월이 지난 후 발병했다. 건강이 나빠져 회사를 그만두고도 수 년이 지난 뒤에야 발병한 경우도 많다. 그 사이 공장의 작업 환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다.
그래서 네 명뿐이다. 반올림에 제보한 사람 중 산업재해를 인정받은 사람은 재생불량성빈혈 2명, 유방암 1명(이상 삼성전자), 백혈병 1명(매그나칩 반도체)밖에 없다. 황유미 씨를 비롯한 대다수의 피해자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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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호황기 이면의 비극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하더라도 사실 안전관리만 제대로 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도 수만 명이 매일 반도체 공장에서 건강하게 일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다만 과거에 있었던 일부 비정상적인 상황이 문제다.
1990년대~200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호황기였다. 노동자들은 생산물량을 맞추기 위해 안전수칙을 어기고 일하는 경우가 많아 화학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독성물질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은 기계를 중간에 열고 물질을 투입하는 식이다. 안전교육이 부족해 누출사고도 잦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환경에서는 짧게 일해도 암에 걸릴 수 있다고 말한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발암물질에 오랫동안 노출돼도 암에 걸릴 수 있지만, 짧은 시간에 순간적으로 높은 농도에 노출돼도 암에 걸릴 수 있다”고 말한다. 백 교수는 “공기 중 평균농도를 측정해서는 실제 위험 정도를 알 수 없고, 당시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을 검토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야간 교대근무와 과로도 중요한 발암요인이다. 당시 피해자들은 주야 2교대(하루 12시간 근무)로 일하면서 낮밤이 따로 없는 생활을 했다고 주장한다. 김현주 교수는 “야간 교대근무는 국제암연구소에서 지정한 발암추정물질(2A등급)”이라며 “수면리듬이 파괴되고 멜라토닌처럼 암 발생을 억제하는 호르몬이 줄어들어 유방암 등에 걸릴 위험이 높아졌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달라졌나
황유미 씨가 사망한 지 7년이 흘렀다.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한 황상기 씨는 서울행정법원에 소송했다. 4년에 걸친 법정싸움 끝에 2011년 반도체산업에서 세계 최초로 직업병 인정 판결을 받아냈다. 2009년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반도체 공정에서 벤젠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회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개한 영향이 컸다.
반올림의 문제제기로 반도체 공정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근무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위험하고 낙후된 시설이 개선되고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됐다. 하지만 아직도 산업재해 신청은 이어지고 있고,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공장에서도 희소병이 발생하고 있다. 반도체 부품을 생산하거나 유해물질 처리를 맡은 국내외 하청업체는 안전관리의 삼각지대다.
황유미 씨 사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이 2011년에 판결에 항소를 제기해 현재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아버지의 약속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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