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몰랐을 정도였죠. 그런데 지금은 아이의 조그만 ‘앵’ 소리에도 잠이 깨답니다. 옆의 남편은 쿨쿨 자고 있는데 말이죠.”(3살 딸을 둔 30세 여성)
“아이 둘을 키우다보니 매 순간마다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분배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처녀 때는 엄두도 못 냈을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는 저 자신을 보면 놀랍기도 해요.”(7살, 2살 딸을 둔 39세 여성)
결혼 뒤에도 직장을 다니고 있는 위의 두 여성은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자신들이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은 아이를 갖고 낳아 키워보기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미래에 엄마가 될 아가씨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실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이를 갖고 키우는 경험이 이들에게 어떤 변화를 준 것일까.
호르몬 분비 급격히 변해
자연다큐멘터리에서 바다거북이 해변에 알을 낳고 나중에 알에서 깨어난 새끼거북들이 바다를 찾아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 장면은 감동스럽다. 깜깜한 밤에 모래사장으로 올라와 구덩이를 파고 몇 시간에 걸쳐 알을 낳은 어미는 정성스레 모래를 덮은 뒤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다로 돌아간다.
햇볕을 받아 따뜻한 모래 안에서 알은 변신을 하고 마침내 새끼거북이 부화한다. 어렵게 구덩이를 빠져나온 뒤 바다를 향해 꼬물꼬물 기어간다. 그러나 바닷새가 새끼거북을 그냥 둘 리 없다. 결국 새끼거북 대다수는 잡아먹히고 소수만이 바닷물에 몸을 담근다. 물론 바다에서도 수많은 천적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미국 리치몬드대 심리학과 크레이그 킨슬리 교수에게는 바다거북 다큐멘터리가 전혀 감동스럽지 않다. 결국 어미가 한 일이란 알을 많이 낳은 게 전부일 뿐 무력한 새끼들 대부분이 천적에게 잡아먹히는 걸 방치했기 때문이다. 킨슬리 교수는 “파충류에서 포유류가 나오면서 생식 전략도 ‘알을 낳고 자리 뜨기’에서 ‘새끼 지키기’로 바뀌었다”며 “이 과정에서 호르몬의 영향으로 뇌가 변하면서 새끼의 생존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행동이 나왔다”고 말했다. 앞의 두 여성이 이야기한 엄마가 된 뒤 나타난 변화는 이런 포유류 진화의 결과인 셈이다.
포유류 암컷이 임신하면 난소와 태반에서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분비가 크게 늘어난다. 1984년 로버트 브리지스(현 터프츠수의대 교수)는 동물실험에서 임신 후반기에 두 호르몬이 많이 나와야 나중에 모성행동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모성행동이란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고 키울 때 보이는 다양한 행동이다.
생쥐의 경우 출산 직후 탯줄을 먹고 새끼 몸을 핥아 닦아주고 새끼를 품어 젖을 물리고 집을 벗어난 새끼를 물어와 제자리에 갖고 오는 행동이 모두 모성행동이다. 새끼에게 다가오는 대상에게 공격성을 보이는 것도 모성행동이다. 한마디로 모성행동이 제대로 이뤄져야 새끼가 무사히 살 수 있다. 사람도 사실상 애를 키우는 모든 과정이 모성행동이다. 앞서 예에서 잠자던 엄마가 아기의 작은 울음소리에 깨어나는 것도 모성행동이다.
모성행동과 관련한 또 다른 중요한 호르몬은 옥시토신이다. 아기를 지긋이 응시하고 어르고 애정을 담아 쓰다듬는 행동은 엄마의 옥시토신 농도가 높아진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젖이 나오게 하는 호르몬인 프로락틴도 모성행동을 자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뇌에서 분비하는 몇몇 화합물도 모성행동을 유도한다는 사실이 1980년대에 발견됐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이 만들어내는 모르핀인 엔돌핀은 새끼를 낳기 직전 많이 만들어지는데 일차적으로는 출산의 고통을 더는 역할을 하지만 아울러 모성 행동을 유발하는 데도 관여한다.
그렇다면 이들 호르몬과 화합물은 뇌의 어떤 영역에 영향을 줘 모성행동을 일으키는 것일까. 미국 보스턴대 마이클 뉴먼 교수팀은 뇌하수체 앞쪽 부분인 내측 시삭전야(mPOA)가 모성 행동에 핵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영역이 손상되거나 이곳에 모르핀 같은 약물을 주사할 경우 생쥐가 모성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이 밖에 뇌의 정보중계기지인 시상과 정서조절에 관여하는 대상회피질도 모성행동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성과 관련한 유명한 실험 가운데 하나가 벗어놓은 아이들의 옷 냄새를 맡고 자기 아이의 옷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아빠들은 자기 자녀의 옷을 구별하지 못하지만 엄마는 대부분 자기 아이의 냄새를 식별할 수 있다. 엄마는 어떻게 이런 놀라운 후각 능력을 지니게 된 걸까.
캐나다 캘거리대 사무엘 바이스 교수팀은 지난 2003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생쥐가 임신을 하면 전뇌 뇌실하영역에서 신경세포가 새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신경세포는 후각구로 이동해 후각신경계를 이룬다. 연구자들은 어미가 새끼 냄새를 구분할 수 있는데는 이 신경생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신경생성은 사람 뇌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므로 비슷한 현상이 산모에게도 일어나 나중에 자녀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억력 좋아지고 대담해져
출산과 육아는 엄마의 정서와 감각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킨슬리 교수팀과 미국 랜돌프-메이콘대 심리학과 켈리 램버트 교수팀은 지난 1999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출산을 2회 이상 한 생쥐가 같은 나이 때인 처녀 생쥐에 비해 학습과 기억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실험결과를 소개했다. 연구자들은 통로가 8개인 방사형 미로 가운데 한 곳에 먹이를 둔 뒤 생쥐가 먹이를 찾게 하는 실험을 했다. 출산을 경험한 쥐는 다음날부터 바로 먹이가 있는 장소를 찾은 반면 처녀 생쥐는 일주일의 시행착오 끝에 먹이가 있는 장소를 기억했다.
이런 학습과 기억 능력 향상은 뇌의 해마와 밀접히 관련 돼 있다. 연구자들은 “임신 중 많이 분비되는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해마의 수상돌기가시를 빽빽하게 만든다”며 “수상돌기가시가 많아지면 신경세포의 연결부위인 시냅스 면적이 늘어나므로 학습과 기억을 향상 시킨다”고 설명했다. 연구자들은 “포유류 암컷이 처녀에서 어미가 되면 새끼를 키우기 위해 많은 새로운 일들을 해야 한다”며 “먹이와 물이 있는 장소를 기억해야 하고 새끼를 위해 이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하므로 인지능력이 향상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출산과 육아 경험이 뇌 구조를 바꾸는 현상은 사람에서도 일어난다. 김필영 미국 예일대 의대 박사팀은 지난 2010년 학술지 ‘행동신경과학’에 발표한 논문에서 출산 전과 출산 뒤 2~4주, 3~4개월 뒤 엄마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측정해 부피를 비교한 결과 몇몇 영역의 회백질부피가 늘어났다고 보고했다. 회백질은 뇌에서 신경세포가 밀집된 영역이다. 회백질 부피가 늘어난 곳은 전전두피질과 두정엽, 중뇌다. 중뇌에서는 시상하부, 흑질, 편도체가 늘어났는데 모두 엄마의 자녀에 대한 긍정적인 정서반응에 관여하는 영역이다. 두정엽 부피 증가는 엄마가 아기의 후각, 촉각, 시각, 청각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전두피질에서 부피가 늘어난 영역은 동물에서 새끼를 곁에 두고 몸을 핥아주는 행동에 관여하는 곳으로 사람에서도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육아 경험이 없는 여성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건 이런 뇌의 변화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편 새끼가 생기면 행동이 과감해지기도 한다. 1.2m 높이에 만든 플러스 미로 실험이 이를 잘 보여준다. 수학 기호 플러스(+) 모양의 이 미로는 한쪽은 벽이 없이 노출된 길이고 한쪽은 터널처럼 된 구조다. 처녀 쥐들은 시간 대부분을 떨어질 위험성이 있는 노출된 길보다는 터널 길 속에서 보낸다. 반면 출산 경험이 있는 쥐들은 수시로 노출된 길에 머물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어미 쥐들이 이처럼 겁이 줄어든 건 새끼를 키우려면 수시로 먹이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외출이 잦으면 그만큼 천적에게 잡힐 가능성도 커지지만 새끼를 굶기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런 행동 변화에는 두려움을 느끼는 편도체의 변화가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에서도 이런 현상이 보이는데, 엄마들은 자녀를 지키기 위해 평소라면 피할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나서곤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엄마가 되면 처녀 때와는 달리 주위를 덜 의식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모유 수유를 하는 경우다. 처녀 때는 사람들 앞에서 젖가슴을 내놓는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던 여성이 젖을 보채는 아이에 반응해 과감한 행동을 한다. 배고픈 아기를 먹여야 한다는 생각이 다른 모든 생각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엄마는 똑똑하고 용감하다”는 말을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처녀 생쥐(왼쪽)와 임신한 생쥐(오른쪽)의 내측 시삭전야 뉴런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뚜렷하다. 임신으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많이 분비되면서 뉴런을 활성화한 결과다. 내측 시삭전야는 모성행동에 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