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라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의 미라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피부는 탄력이 있고, 내장기관도 온전하다. 부검을 하면 대략적인 사망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 정도다. 가족단위로 발견되며, 관 속에서 썩지 않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미라라는 점도 같다.
또 예외 없이 조선시대에 매장됐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 후기로 나뉘는데, 특히 전기에 매장된 미라가 많다. 드물게 후기에 만들어진 무덤에서도 미라가 발견되지만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 그리고 사대부 가문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왜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의 무덤에선 미라가 발견되지 않을까. 왜 중인, 천민계층의 무덤에선 미라가 없을까. 이런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는 무덤뿐이다. 한국미라는 무덤 속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오산 6미라 발굴과정. 한 발굴단원이 나무관 위에 붙어 있는 명정(銘旌)을 벗겨내고 있다. 명정에는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본관, 성이 적혀
있어 미라의 신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회곽묘 있는 곳엔 미라가 있다
‘쿵~. 쿵~.’ 포크레인으로 몇 번을 내려쳤다. 워낙 단단하게 굳어 있어서 열릴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수 차례 더 두들기고 나서야 뚜껑부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곧 이어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돌덩어리 같은 ‘회곽(灰槨)’ 뚜껑이 열리고 나무 관을 감싼 목곽(木槨)이 드러났다.
2010년 5월 9일 경기도 오산. 기자는 오산 6미라 발굴현장을 찾았다. 연구진은 목곽을 열고, 그 안에서 있는 관을 포크레인에 매달아 트럭까지 옮겼다.
한국미라가 발견되는 첫 번째 조건은 회곽으로 둘러싸인 무덤이다. 회곽이란 나무관 주위에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는 회반죽 덩어리를 뜻한다. 온전한 ‘회곽묘(灰槨墓)’가 발견됐다면 그 안에는 십중팔구 미라가 들어 있다. 회곽이 나무 관을 둘러싸고 있으니 공기가 완벽하게 차단돼 미라가 만들어진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다른 종류의 미라가 출토된 적이 없다. 결국 한국미라는 회곽묘라는 묘제 문화에서 나온 산물이다.
우리 조상들은 왜 이런 방식으로 묘를 만들었을까. 고려시대에는 왜 회곽묘를 쓰지 않았을까. 이 의문점을 풀기 위해 몇몇 고고학자를 찾았으나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울산까지 차를 몰았다. 조선시대 묘제 전문가로 꼽히는 김우림 울산시립박물관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김 관장은 “한반도에서는 왕족, 사대부 집안에서 전통적으로 벽돌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 ‘석실묘’를 사용했다”며 “인력과 자원의 낭비가 크다고 판단한 조선왕실은 태종6년부터 석실 대신 회(灰)를 써서 무덤을 만들도록 권장했다”고 설명했다. 석실이나 회곽을 쓰는 까닭은 시신이 나무뿌리, 설치류, 벌레 등에 해를 입지 않고 온전하게 잘 썩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대전선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국조오례의’ 전권. 당시 왕실과 사대부 등이 지켜야 할 예법이 기록돼 있다. 조선 초기에 만들었던 ‘회곽묘(회격묘)’ 양식은 국조오례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왕의 미라도 존재할까?
회곽묘를 만드는 방법은 고려 말 한국에 주자학과 함께 전해진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전기의 회곽묘는 주자가례에서 제시한 방법과는 형태가 다르다. 주자가례의 방식을 응용한 새로운 무덤 만드는 방법을 왕실에서 지정해 권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방식을 ‘회격묘(灰隔墓)’라고 해서 주자가례에 실린 회곽묘와 구분하기도 한다(이 기사에서는 특별히 회격묘와 회곽묘를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회반죽을 주위에 두른 무덤’이라는 포괄적 의미에서 ‘회곽묘’라고 통일해 쓰고 있다).
세조실록을 살펴보면 왕실이 사대부 집안에서 석실묘를 쓰지 못하도록 했고, 대신 장례를 치를 때 직급에 따라 석회를 지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회곽묘 권장 정책을 펴던 조선왕조는 결국 왕족의 무덤도 회곽묘로 만들기 시작한다. 세조가 묻혀 있는 광릉은 처음으로 회곽묘로 만든 왕의 무덤이다, 이어 모든 조선왕조의 무덤이 회곽묘로 조성됐다. 지금 조선 왕릉을 발굴해 본다면 세조 이후 대부분의 왕을 미라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세종대왕도 적극적으로 회곽묘를 권장했던 인물이다. 만일 조선왕실에 회곽묘 제도가 조금만 일찍 정착됐다면, 우리 후손들은 언젠가 세종대왕의 생전 모습을 미라로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왕의 미라도 존재할까?
회곽묘를 만드는 방법은 고려 말 한국에 주자학과 함께 전해진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전기의 회곽묘는 주자가례에서 제시한 방법과는 형태가 다르다. 주자가례의 방식을 응용한 새로운 무덤 만드는 방법을 왕실에서 지정해 권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방식을 ‘회격묘(灰隔墓)’라고 해서 주자가례에 실린 회곽묘와 구분하기도 한다(이 기사에서는 특별히 회격묘와 회곽묘를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경우에는 ‘회반죽을 주위에 두른 무덤’이라는 포괄적 의미에서 ‘회곽묘’라고 통일해 쓰고 있다).
세조실록을 살펴보면 왕실이 사대부 집안에서 석실묘를 쓰지 못하도록 했고, 대신 장례를 치를 때 직급에 따라 석회를 지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회곽묘 권장 정책을 펴던 조선왕조는 결국 왕족의 무덤도 회곽묘로 만들기 시작한다. 세조가 묻혀 있는 광릉은 처음으로 회곽묘로 만든 왕의 무덤이다, 이어 모든 조선왕조의 무덤이 회곽묘로 조성됐다. 지금 조선 왕릉을 발굴해 본다면 세조 이후 대부분의 왕을 미라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세종대왕도 적극적으로 회곽묘를 권장했던 인물이다. 만일 조선왕실에 회곽묘 제도가 조금만 일찍 정착됐다면, 우리 후손들은 언젠가 세종대왕의 생전 모습을 미라로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세조의 무덤인 광릉. 사진은 세조의 부인이던 ‘정희 왕후’의 무덤이다. 회곽묘 형태로 만들어진 최초의 왕족 무덤이다. 세종대왕도 묘를 회곽묘로 만들려고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회곽묘는 어디서 시작했고, 어떻게 발전해온 것일까. 가까운 나라에 비슷한 장묘형태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한국미라와 같은, 무덤 속에서 만들어진 미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까.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미라의 사촌을 만나다
‘세상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미라’라는 중국 박물관 직원의 자랑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피부에 시반(시체에 생기는 검은 반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포르말린 보존용액에 담가둔 탓인지 아래 잇몸 부분만 입술 밖으로 두툼하게 밀려 올라왔을 뿐, 피부의 색감이나 보존 상태는 한 곳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미라가 아닌, 죽은 지 며칠 된 시신을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상태가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혐오감이 밀려왔다. 인간의 신체를 보고 있다는 ‘자각’이 강하게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시에 있는 후난성 박물관의 최대 자랑거리인 마왕퇴(馬王堆) 미라는 1972년 발굴된 후 40년 동안 세계 고고학계에서 큰 관심을 얻고 있다.
기원전 150년 부근에 사망했으니 2100년 이상을 땅속에 묻혀 있던 셈이다. 마왕퇴는 창사시 근처에 있는 유적지 이름으로 서한 초기 ‘창사국’의 재상이던 리캉(利倉)의 가족무덤이다. 이곳에선 3개의 무덤이 발굴됐는데 발굴순서에 따라 1, 2, 3호 무덤이라고 부른다. 1호는 리캉의 부인, 2호는 리캉 자신의 무덤, 3호는 아들 무덤으로 밝혀졌다. 이 3개의 무덤에서 미라가 출토된 것은 1호 무덤이다. 유명한 마왕퇴 미라는 결국 재상 리캉의 부인인 셈이다.
마왕퇴 유적은 한국 사대부 묘와 비슷하게 목관과 목곽을 사용했다. 회곽은 아니지만 숯과 백색 점토로 무덤 주변을 감쌌다. 놀라운 것은 규모인데, 한국미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깊이 16m, 가로 17.8m, 세로 19.5m의 계단 식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목곽을 감싼 숯의 두께가 40~50cm로 무게만 총 5t에 달한다. 마왕퇴 미라가 완전히 밀봉되기 위한 조건은 역시 무덤을 감싸고 있는 1.3m 두께의 백색점토다. 현지인들은 ‘백고니’라고 부르는데,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카오린이 주 성분이다. 4중 나무관을 만들어 시신을 넣었다. 규모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나무관-나무틀-충진재 순서로 시신을 감싸 땅에 넣는 매장문화는 비슷한 셈이다.
한 가지 의문점을 지우기 어려웠다. 마왕퇴 미라는 단순히 밀봉만 되어 있던 것일까. 2000년 이상의 세월을 견디려면 무언가 다른 조건이 필요했다. 한국미라가 회곽의 화학반응에서 발생하는 ‘열’로 살균작용을 거쳤다면, 이 거대한 목곽묘는 어떤 살균과정을 거친 것일까. 그 실마리는 가오쯔시(高至喜) 후난성 박물관 연구관(전 관장)과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마왕퇴 미라 발굴단 일원이었던 그는 “처음 관을 열었을 때 안에 물이 차 있었는데, 성분을 분석해 보니 적잖은 양의 수은이 검출됐다”고 했다. 그는 “부장품으로 넣은 칠기, 또는 실크 등에서 녹아 나왔거나, 당시 불로장생약으로 알려졌던 ‘신선단’을 장기복용했던 시신에서 녹아 나왔을 거라고 생각된다”며 “경위야 어떻든 수은성분이 세균의 접근을 막았을 거라는 추측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가오쯔시 연구관과 함께 마왕퇴 미라의 발굴에 참여했던 요우줸퀸(游振群) 박물관 담당 공산당서기관 역시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수은은 지금도 많은 학자들의 논란이 되고 있다”면서 “시신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일부러 방부처리를 했을 거라고 보는 학자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회곽묘는 어디서 시작했고, 어떻게 발전해온 것일까. 가까운 나라에 비슷한 장묘형태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한국미라와 같은, 무덤 속에서 만들어진 미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까.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미라의 사촌을 만나다
‘세상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미라’라는 중국 박물관 직원의 자랑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피부에 시반(시체에 생기는 검은 반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포르말린 보존용액에 담가둔 탓인지 아래 잇몸 부분만 입술 밖으로 두툼하게 밀려 올라왔을 뿐, 피부의 색감이나 보존 상태는 한 곳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미라가 아닌, 죽은 지 며칠 된 시신을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상태가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혐오감이 밀려왔다. 인간의 신체를 보고 있다는 ‘자각’이 강하게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시에 있는 후난성 박물관의 최대 자랑거리인 마왕퇴(馬王堆) 미라는 1972년 발굴된 후 40년 동안 세계 고고학계에서 큰 관심을 얻고 있다.
기원전 150년 부근에 사망했으니 2100년 이상을 땅속에 묻혀 있던 셈이다. 마왕퇴는 창사시 근처에 있는 유적지 이름으로 서한 초기 ‘창사국’의 재상이던 리캉(利倉)의 가족무덤이다. 이곳에선 3개의 무덤이 발굴됐는데 발굴순서에 따라 1, 2, 3호 무덤이라고 부른다. 1호는 리캉의 부인, 2호는 리캉 자신의 무덤, 3호는 아들 무덤으로 밝혀졌다. 이 3개의 무덤에서 미라가 출토된 것은 1호 무덤이다. 유명한 마왕퇴 미라는 결국 재상 리캉의 부인인 셈이다.
마왕퇴 유적은 한국 사대부 묘와 비슷하게 목관과 목곽을 사용했다. 회곽은 아니지만 숯과 백색 점토로 무덤 주변을 감쌌다. 놀라운 것은 규모인데, 한국미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깊이 16m, 가로 17.8m, 세로 19.5m의 계단 식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목곽을 감싼 숯의 두께가 40~50cm로 무게만 총 5t에 달한다. 마왕퇴 미라가 완전히 밀봉되기 위한 조건은 역시 무덤을 감싸고 있는 1.3m 두께의 백색점토다. 현지인들은 ‘백고니’라고 부르는데,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카오린이 주 성분이다. 4중 나무관을 만들어 시신을 넣었다. 규모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나무관-나무틀-충진재 순서로 시신을 감싸 땅에 넣는 매장문화는 비슷한 셈이다.
한 가지 의문점을 지우기 어려웠다. 마왕퇴 미라는 단순히 밀봉만 되어 있던 것일까. 2000년 이상의 세월을 견디려면 무언가 다른 조건이 필요했다. 한국미라가 회곽의 화학반응에서 발생하는 ‘열’로 살균작용을 거쳤다면, 이 거대한 목곽묘는 어떤 살균과정을 거친 것일까. 그 실마리는 가오쯔시(高至喜) 후난성 박물관 연구관(전 관장)과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마왕퇴 미라 발굴단 일원이었던 그는 “처음 관을 열었을 때 안에 물이 차 있었는데, 성분을 분석해 보니 적잖은 양의 수은이 검출됐다”고 했다. 그는 “부장품으로 넣은 칠기, 또는 실크 등에서 녹아 나왔거나, 당시 불로장생약으로 알려졌던 ‘신선단’을 장기복용했던 시신에서 녹아 나왔을 거라고 생각된다”며 “경위야 어떻든 수은성분이 세균의 접근을 막았을 거라는 추측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가오쯔시 연구관과 함께 마왕퇴 미라의 발굴에 참여했던 요우줸퀸(游振群) 박물관 담당 공산당서기관 역시 같은 말을 했다. 그는 “수은은 지금도 많은 학자들의 논란이 되고 있다”면서 “시신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일부러 방부처리를 했을 거라고 보는 학자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미라가 발굴된 실제 목곽. 사람의 키보다 서너 배는 크다.]
[마왕퇴 발굴지에서 나온 미라의 모습. 피부에 검은 반점 하나 찾을 수 없이 보존이 잘 돼 있다. 유리관에 담아 대중에게 공개하고 있다. 박물관 측은 “미라를 완벽히 보존하기 위해 포르말린 용액에 몇 가지 성분을 더한 특수 보존처리액을 만들어 미라를 넣었다”고 설명했다.]
[마왕퇴 유적. 미라가 나온 유적은 1호 고분이지만 현재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사진은 리캉 재상의 무덤이던 2호 고분으로, 이곳에서는 미라가 발굴되지 않았다. 관람객들의 안전을 위해 난간을 설치한 것을 빼면 발굴당시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국엔 회곽묘, 중국엔 점토묘
기자가 마왕퇴 미라와 유적지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한국미라와 생성 원인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왕퇴 유적지 같은 중국의 장묘문화가 자체적으로 발전하다가 주자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마왕퇴 미라와 같은 구조의 무덤에서 형성된 또 다른 미라는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덜컹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7시간을 달려간 곳은 후베이성(湖北省) 징저우(荊州) 시. 이곳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168호 미라’가 전시돼 있다. 더 오래됐다지만 실제로 사망한 시기는 마왕퇴 미라와 몇 십 년 차이 나지 않는다.
이 미라는 1975년 6월 8일, 징저우 시 인근 장링(江陵) 현 추도우지난성(楚都 南城)에서 발견됐다. 동주(東周) 시대, 즉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초나라 도성이었던 곳으로, 한나라 시대 들어 고급관리들의 묘지로 쓰였다. 180여 개의 한나라 무덤이 존재했는데, 168번째 무덤에서 발견됐다는 뜻에서 168호분 미라라고 불린다. 이 미라는 살아생전 우다이푸(五大夫)라는 관직을 지냈다. 현재의 시장, 도지사 같은 지방관이다. 180여 개나 되는 무덤 중 이 미라만 발굴된 이유가 뭘까. 1975년 당시 주변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중 발견했다는 것이 박물관 학예사의 설명. 그는 “남은 180여 개의 무덤 속에 또 어떤 미라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미라는 곳곳에 검붉게 그을린 자국이 있었지만 보존상태는 비교적 우수했다. 피부는 하얗고, 미라 발견 후 부검을 하고 내장기관과 뇌를 꺼내 함께 전시해 뒀다.
무덤은 규모가 작을 뿐 기본구조는 마왕퇴 미라와 똑같았다. 목관은 이중으로 돼 있었고, 적잖은 크기의 목곽도 보였다. 무덤의 구조 역시 비슷한데, 백고니 대신 청고니(청색점토)를 썼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살균작용은 어떤 원리로 이뤄졌을까. 박물관 안내를 담당한 학예사는 “관 속에서 물이 발견됐는데, 주사(朱砂)라는 광물질 가루가 녹아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주사는 붉은 빛이 나며, 살균력이 강한 물질이다. 공기가 차단된 미라는 살균과정을 거쳐야 미라로 보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아닐까.
한국엔 회곽묘, 중국엔 점토묘
기자가 마왕퇴 미라와 유적지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한국미라와 생성 원인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왕퇴 유적지 같은 중국의 장묘문화가 자체적으로 발전하다가 주자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마왕퇴 미라와 같은 구조의 무덤에서 형성된 또 다른 미라는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덜컹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7시간을 달려간 곳은 후베이성(湖北省) 징저우(荊州) 시. 이곳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168호 미라’가 전시돼 있다. 더 오래됐다지만 실제로 사망한 시기는 마왕퇴 미라와 몇 십 년 차이 나지 않는다.
이 미라는 1975년 6월 8일, 징저우 시 인근 장링(江陵) 현 추도우지난성(楚都 南城)에서 발견됐다. 동주(東周) 시대, 즉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초나라 도성이었던 곳으로, 한나라 시대 들어 고급관리들의 묘지로 쓰였다. 180여 개의 한나라 무덤이 존재했는데, 168번째 무덤에서 발견됐다는 뜻에서 168호분 미라라고 불린다. 이 미라는 살아생전 우다이푸(五大夫)라는 관직을 지냈다. 현재의 시장, 도지사 같은 지방관이다. 180여 개나 되는 무덤 중 이 미라만 발굴된 이유가 뭘까. 1975년 당시 주변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중 발견했다는 것이 박물관 학예사의 설명. 그는 “남은 180여 개의 무덤 속에 또 어떤 미라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미라는 곳곳에 검붉게 그을린 자국이 있었지만 보존상태는 비교적 우수했다. 피부는 하얗고, 미라 발견 후 부검을 하고 내장기관과 뇌를 꺼내 함께 전시해 뒀다.
무덤은 규모가 작을 뿐 기본구조는 마왕퇴 미라와 똑같았다. 목관은 이중으로 돼 있었고, 적잖은 크기의 목곽도 보였다. 무덤의 구조 역시 비슷한데, 백고니 대신 청고니(청색점토)를 썼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살균작용은 어떤 원리로 이뤄졌을까. 박물관 안내를 담당한 학예사는 “관 속에서 물이 발견됐는데, 주사(朱砂)라는 광물질 가루가 녹아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주사는 붉은 빛이 나며, 살균력이 강한 물질이다. 공기가 차단된 미라는 살균과정을 거쳐야 미라로 보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아닐까.
[168호 고분에서 발굴된 미라. 입안에서 발견된 도장에 ‘수이(遂)’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름에 흔히 쓰는 한자로 ‘수이선생’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60세 정도에 사망했으며 폐 질환을 앓은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장묘문화, 어디서 왔을까
조선의 회곽묘는 ‘주자가례’를 참고한 만큼 1차로는 중국의 문화를 흡수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주자가례에서 왜 그런 회곽묘 문화가 등장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실제로 중국에는 회곽묘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회곽묘는 삼물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석관’ 같은 느낌을 주지만 기본적으로는 나무로 만든 목곽묘다. 주변의 흙이 돌처럼 굳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무관에 시신을 염해 묻는 문화는 양국이 지금도 비슷하다. 결국 중국에 회곽묘가 없다면 중국에서도 무덤 속 미라를 찾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한국 미라와 같은 형태의 ‘쓰시(젖은 시체)’는 발견되고 있다. 마왕퇴 미라, 168호분 미라 등이 모두 같은 사례. 중국 창장(長江, 양쯔강) 이남에서는 제상, 고위관료 등이 이 같은 점토 무덤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회곽묘 문화가 정착되기 전, 한국의 귀족계층은 고조선 이후부터 전해져 내려온 석실 매장문화를 따랐다. 고조선 땅을 한나라에 빼앗긴 후, 한나라가 직접 관리하던 ‘낙랑’ 지역에서 천축분이라는 최초의 벽돌무덤 방식이 등장한 것이 효시다. 이 무덤양식은 계속 발전해 오다 삼국을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진다. 서정석 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 교수는 “석실무덤은 중국 문화가 대륙을 따라 한국으로 전해지는 기본적인 문화 전파경로를 따른 것”이라며 “그러나 회곽묘 문화는 기존 경로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국내 사학자들은 대부분 인정하지 않지만 중국남부 해안가, 한반도 일부, 또 일본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화전파 경로가 있다는 설도 존재한다. 목곽묘 전문가인 신용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장은 “ 아직 검증받은 것은 아니지만 통나무 목곽 등 일부 매장문화에서 그런 증거를 찾을 수 있다”면서 “한국의 주류 문화는 대륙에서 전파됐지만, 해안가를 통해 삼국간에 문화가 오고 갔다고 생각할만한 유물도 드물게 출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회곽묘 문화는 어디서 왔을까. 과연 회곽묘는 1500년의 시간을 넘어 해안가 문화를 따라 한국으로 넘어온 중국 점토묘의 변형일까. 아니면 주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을까. 조선시대 우리네 조상들의 타임캡슐인 미라는 여전히 그 신비로움을 감춘 채 과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Intro. 한국 미라 기원을 찾아서
Part 1.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미라"
Part 2. 죽음의 안식처, 무덤에게 묻는다
Part 3. 환경과 장묘문화가 만든 시간의 마법
한국 장묘문화, 어디서 왔을까
조선의 회곽묘는 ‘주자가례’를 참고한 만큼 1차로는 중국의 문화를 흡수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주자가례에서 왜 그런 회곽묘 문화가 등장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실제로 중국에는 회곽묘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회곽묘는 삼물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석관’ 같은 느낌을 주지만 기본적으로는 나무로 만든 목곽묘다. 주변의 흙이 돌처럼 굳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무관에 시신을 염해 묻는 문화는 양국이 지금도 비슷하다. 결국 중국에 회곽묘가 없다면 중국에서도 무덤 속 미라를 찾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한국 미라와 같은 형태의 ‘쓰시(젖은 시체)’는 발견되고 있다. 마왕퇴 미라, 168호분 미라 등이 모두 같은 사례. 중국 창장(長江, 양쯔강) 이남에서는 제상, 고위관료 등이 이 같은 점토 무덤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회곽묘 문화가 정착되기 전, 한국의 귀족계층은 고조선 이후부터 전해져 내려온 석실 매장문화를 따랐다. 고조선 땅을 한나라에 빼앗긴 후, 한나라가 직접 관리하던 ‘낙랑’ 지역에서 천축분이라는 최초의 벽돌무덤 방식이 등장한 것이 효시다. 이 무덤양식은 계속 발전해 오다 삼국을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진다. 서정석 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 교수는 “석실무덤은 중국 문화가 대륙을 따라 한국으로 전해지는 기본적인 문화 전파경로를 따른 것”이라며 “그러나 회곽묘 문화는 기존 경로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국내 사학자들은 대부분 인정하지 않지만 중국남부 해안가, 한반도 일부, 또 일본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화전파 경로가 있다는 설도 존재한다. 목곽묘 전문가인 신용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장은 “ 아직 검증받은 것은 아니지만 통나무 목곽 등 일부 매장문화에서 그런 증거를 찾을 수 있다”면서 “한국의 주류 문화는 대륙에서 전파됐지만, 해안가를 통해 삼국간에 문화가 오고 갔다고 생각할만한 유물도 드물게 출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회곽묘 문화는 어디서 왔을까. 과연 회곽묘는 1500년의 시간을 넘어 해안가 문화를 따라 한국으로 넘어온 중국 점토묘의 변형일까. 아니면 주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을까. 조선시대 우리네 조상들의 타임캡슐인 미라는 여전히 그 신비로움을 감춘 채 과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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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한국 미라 기원을 찾아서
Part 1.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미라"
Part 2. 죽음의 안식처, 무덤에게 묻는다
Part 3. 환경과 장묘문화가 만든 시간의 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