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바위, 보.” 이긴 아이가 손가락으로 돌멩이를 먼저 튕긴다. 바닥에는 흰 분필 선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다. “세 번에 못 들어왔지? 이제 내 차례야.” 어린 시절 동네 뒷골목에서 친구들과 한번쯤은 해봤음직한 땅따먹기 놀이다.
요즘에는 땅따먹기 놀이를 온라인으로도 즐길 수 있다. 다만 이름이 확 달라졌다. ‘보로노이 게임’이 그것. 컴퓨터로 즐길 수 있는 신종 땅따먹기 놀이 쯤 될까. 번거롭게 세 번이나 돌을 튕길 필요 없이 마우스로 원하는 지점만 찍으면 프로그램이 알아서 자신의 땅을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그려준다. 마지막에 누가 많은 땅을 가졌는가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것은 땅따먹기와 똑같다. 그런데 보로노이 게임에는 땅따먹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고 한다. 도대체 뭘까.
보로노이(Voronoi)는 1908년에 사망한 우크라이나의 수학자다. 보로노이 게임은 그의 이름을 딴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개발된 프로그램이다. 재밌는 점은 이름조차 생소한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이 실제로는 게임 뿐 아니라 안 쓰이는 곳이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맹활약하는 ‘멀티플레이어’라는 것이다.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의 활약
로봇이 장애물을 만나면 우회하도록 동선을 짜야 한다. 나무를 심을 때 나무끼리 서로 경쟁하지 않도록 심는 위치를 잘 정해줘야 한다. 도시에 건물이 어떻게 들어서 있는지 분석해야 할 때도 있다. 모두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쓰면 손쉽게 해결된다.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의 개념 자체는 매우 자연스럽고 간단합니다.” 한양대 산업공학과 김덕수 교수의 얘기다. 김 교수는 2003년부터 과학기술부의 창의적 연구진흥 사업의 지원을 받아 보로노이 다이어그램 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어떤 공간에 점이 여러 개 있다고 하자. 여기서 아무 점이나 두 개를 골라 수직이등분선을 그어 이 선분들을 연결하면 어떤 도형이 나타난다. 이것이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이다. 크기는 각양각색, 모양은 삐뚤삐뚤한 벌집을 연상하면 된다. 실제로 벌집은 자연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보로노이 다이어그램 중 하나다.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의 개념은 이렇게 간단한데 이름은 왜 그리 낯설까? 김 교수는 “수백년 동안 과학자들이 전공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가장 먼저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사용한 사람은 프랑스의 데카르트. 그는 1644년 출판한 ‘철학의 원리’에서 우주와 행성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보로노이 다이어그램과 유사한 모양을 그렸다. 20세기 초에는 물리학에서만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이 ‘작용 범위’ ‘뷔그너-자이츠 영역’ 등 여러 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때문에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이 독립적인 연구 분야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세계에서 김 교수처럼 연구센터를 만들어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연구하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김 교수의 연구센터는 보로노이 다이어그램 연구의 ‘메카’인 셈. 무엇보다도 연구센터에서는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으로 과학의 근본을 파헤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최근 김 교수는 연구센터를 시작한 지 2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에 큰 성과를 거뒀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단백질 구조를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으로 쉽게 풀어낸 것. 이로써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은 근래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생명공학연구까지 ‘접수’해버렸다.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여줄 수 있습니다.” 김 교수가 개발한 프로그램은 3차원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단백질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점 대신 면으로 구조 진단
기존에도 이런 방법은 있었다. 지난 1990년대까지 드물지만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단백질의 구조를 분석한 논문이 발표되곤 했다. 하지만 당시 이들이 사용한 것은 엄밀히 말해 ‘점’들의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이었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원자의 중심에 점을 찍어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만든 것.
예를 들어 수소와 인, 황 등 여러 원자들이 섞인 분자가 하나 있다고 하자. 수소 원자의 경우 반데르발스 반지름은 1.2옹스트롬(Å, 1Å=10-10m) 정도고, 황이나 인은 수소보다 커 1.8Å가량 된다. 분자의 구조를 알기 위해 각 원자의 중심에 점을 찍어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그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 분자의 구조를 얼추 실제와 가깝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원자의 크기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확한 단백질 구조를 얻을 수 없다. 이것이 점으로 된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이 가진 한계였다.
김 교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 대신 ‘면’을 사용했다.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 표면의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그려 원자의 크기까지 고려한 것. 이 방법을 쓰면 겉으로 보기에 같은 평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단백질도 어떤 것은 편평하고 어떤 것은 울룩불룩하며, 심지어 8자 모양으로 꼬여 있는 구조라는 것까지 구별해낼 수 있다.
그에게는 단백질 분자가 서로 결합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하학적으로 ‘어떻게’ 결합해있는지가 중요하다. ‘어떻게’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3차원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이 생명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길 원한다”고 말한다.
“물질의 구조를 분석할 수도 있어요.” 김 교수가 개발한 3차원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은 단백질 구조 분석 뿐 아니라 재료공학 연구에도 유용하다. 2002년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는 어떤 물질에 충격을 준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물질 내부의 원자 구조가 달라진다는 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은 김 교수의 ‘어떻게’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논문에서 근거로 제시한 방법은 어떤 원자를 기준으로 일정한 거리에 주변 원자가 몇 개나 있는지 그 개수를 세는 것이었다. “기하학적 측면에서 보면 적절치 않습니다.” 김 교수는 “개수만 세는 것이 아니라 원자 간의 각도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도를 변수로 넣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원자의 이웃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3차원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이용하면 이 정보를 바로 얻을 수 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한양대 세라믹공학과 동료 교수와 함께 3차원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으로 동일한 문제를 직접 시뮬레이션 할 예정이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물질의 결정구조를 계산하고 예측하는데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이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요즘 김 교수는 자신이 개발한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단백질 데이터 전체를 분석하고 있다. 데이터 분석이 끝나면 이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전 세계에 온라인으로 서비스 할 계획이다. 올 연말쯤에는 단백질 구조를 연구하는 생명공학자들이 ‘사이버 도서관’을 만나볼 수 있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