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Back!” 미래에서 온 헐리우드의 로봇전사 터미네이터는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가 두 번이나 다시 돌아왔다.
떠난 임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우리네 정서라고는 하지만 정작 우리 로봇전사는 너무나 야속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라기엔 너무나 깜깜 무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인의 관심 밖으로 완전히 밀려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또 다른 누군가는 관악산 어귀가 그의 은신처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독도에 그가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부질없고 허망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태권로봇의 부활을 희망하는 작은 염원이 섞여 있었다.
올해로 탄생 30주년을 맞는 태권V가 부활의 기지개를 펴고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선 디지털로 복원된 태권V 1편이 상영된데 이어 올해 5월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영화제(SICAF)에서 다시 한 번 관객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영화기획사 신씨네는 태권V 탄생 30주년을 맞아 오는 7월 3D방식으로 제작한 새 태권V 시리즈 제작 설명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제 훌쩍 중년의 문턱에 다가선 태권V세대의 기대감도 그만큼 높아지고 있다.
녹슨 통 속에서 발견된 태권로봇
정작 태권V가 부활의 몸짓을 준비하고 있었던 곳은 의사당 밑도, 산중턱도, 섬도 아닌 홍릉의 어느 허름한 필름창고였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녹슨 필름통 속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필름이 발견된 것은 2003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디지털 복원을 맡은 최남식 영화진흥위원회 디지털영상팀장은 필름을 처음 발견한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영진위에 있는 필름창고를 정리하던 중 녹슨 필름통 속에 중간 중간 몇 장면이 빠져 있던 채로 발견됐죠. 이런 곳에 있을 줄 미처 몰랐습니다.”
필름을 발견한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태권V 필름은 이번에 발견된 것 말고도 더 있긴 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 영상자료원과 춘천에 있는 강원 첨단영상정보진흥원에서도 다른 필름을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영사기에 걸 수도 없을 정도로 훼손 정도가 심각했다.
영진위는 곧 복원 작업에 착수했다. 이대로 가면 필름이 딱딱해지면서 부식속도가 점점 더 빨라질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편 분량은 아니지만 이미 유현목 감독이 만든 ‘춘몽’과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처럼 훼손 정도가 심한 영화를 부분 복원한 기술을 십분 활용키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화면과 소리를 모두 복원해야만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필름통을 열어 필름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복원팀원들은 정말 ‘장난 아닌’ 작업이 될 것 같다고 직감했다고 한다. 사라진 부분도 문제지만 긁힘(스크래치)자국에 얼룩이 많았고 색도 심각하게 바래버린 상태였다. 또 열악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보관된 탓인지 필름 일부가 수축되고 말라서 자칫 그대로 부서져 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최 팀장을 비롯한 복원팀은 수선을 마친 필름을 디지털로 전환해 복원키로 결정했다. 현상소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화학 처리만으론 필름 복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모든 프레임들이 균일하지 않다는데 있다.
14만4000프레임에 가까운 방대한 필름 복원은 디지털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복원에는 대당 2~3억원을 호가하는 전용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사용됐다. 영진위엔 단 한 대 밖에 없는 고가 장비다. 전용 소프트웨어는 필름에서 없어진 부분의 앞과 뒤 장면에서 사라진 장면을 유추해낸다. 눈에 띄는 긁힌 자국이나 얼룩을 보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첨단 장비라 하더라도 기계라는 한계가 있는 법. 자동으로 걸러져 나온 필름은 전체의 50%에도 채 못미친다. 그 다음은 모두 수작업이다.
“그래픽 프로그램에서 프레임 하나하나를 일일이 불러와 걸러지지 않은 결함을 찾아 없앴습니다. 하루에 100프레임 정도 처리하는 날도 있었지만 5~6프레임 밖에 나가지 못한 날도 많았어요.”
이렇게 처리된 필름 정보량은 1테라(1조=${10}^{12}$)바이트. 요즘 흔히 컴퓨터에 들어가는 70기가바이트 하드디스크 15개에 달하는 분량이다. 10만8852프레임, 1170컷에 달한다. 디지털 복원작업이 시작된 지 꼭 1년만의 일이었다.
작업 후반부는 주로 소리 복원에 매달렸다. ‘빰빠빠빠빠빠빠~ 달려라달려 로보트야’라는 주제곡이 30년이 흐른 뒤에도 그 세대가 공감하는 문화코드로 인식되고 있는 까닭은 김청기 감독과 음악을 맡은 작곡가 최창권씨의 공이 컸다. 그만큼 머릿속에 쏙 들어오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5.1채널 입체 음향에 익숙한 신세대 관객의 귀를 과연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입체 음향 세대에게 과거의 느낌을 주면서도 이질감을 주지 않기란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장광수 영진위 녹음팀장은 “결국 예전 사운드를 복원하는 동시에 아예 새로 소리를 리메이킹하기로 했다. 모노사운드는 이질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손댈 경우 원래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복원팀은 리메이킹에 꽤 많은 공을 들였다. 성우를 불러 더빙을 하면서도 원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태권V 동호회와 당시 제작자들을 불러 몇 차례 감수를 받는 등 원형에 가까운 작품을 내놓기 위한 고심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이렇게 녹음한 새 버전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됐지만 1976년 버전은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3D 태권V 한 번 기대해 봐?”
오는 7월부터 제작에 들어갈 3D 태권V는 어떤 모습일까. 현재 태권V 판권은 신씨네가 소유하고 있다. 현재 오는 7월24일 제작발표회를 앞두고 시나리오와 3D시안 작업이 한창이다.
신씨네는 현재 3~4가지 시나리오를 준비해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월이 흐른 만큼 전체 줄거리와 소재, 등장인물의 전폭적인 개편은 불가피해 보인다. 전통적인 선악 대결구도로 갈 것인지 자체도 아직 미지수다.
시나리오 작업을 맡고 있는 신씨네 정우철 작가는 “주인공 훈이와 영희가 결혼해 낳은 아이가 새로 태권V 조종을 맡을 수도 있고, 그냥 어린 훈이와 영희를 그대로 등장시킬 수도 있다. 아직 정해진 시나리오는 없으며 다만 분명한 것은 30년 세월의 변화가 이야기 속에 드러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원 제작자인 김청기 감독도 “그동안 로봇을 비롯한 과학기술이 상당히 발전했으니 그런 내용들이 소재로 활용되지 않겠냐”며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로봇전문가들도 “1편처럼 손으로 직접 로봇을 조종하는 방식 대신 컴퓨터가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장면처럼 더욱 발전한 IT기술을 선보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주문한다.
새 태권V의 모습 역시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디자인 유출을 조심한 탓도 있지만 논란을 줄이기 위해서다. 사실 태권V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캐릭터 디자인에 대한 말이 많았다. ‘뭐 그런 것까지 신경쓰냐’는 사람도 있지만 형태부터 색상, 동작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따지는 이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추억의 훼손’에 분노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도 결코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신씨네측은 “캐릭터 디자이너와 애니메이터, 자료소장자, 동호회원은 물론 실제 로봇 전문업체 관계자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얼마 전 달리는 두발 로봇을 개발한 유진로보틱스와 태권V DVD를 만들었던 서태지컴퍼니도 자문에 기꺼이 응했다.
누가 이 거대한 부활프로젝트를 맡을 것인지, 누구를 대상으로 상영할 지 역시 정해진 것은 없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나 월트디즈니에 의뢰할 수도 있지만 국내 3D 제작 기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만큼 국내팀이 주도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신씨네 장순성 기획실장은 “초기 표절시비에 휘말리긴 했지만 30년이 흐른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상품이다. 추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몰입도를 최대한 높일 계획”이라고 말한다.
물론 3D로 부활한 태권V의 흥행 가능성은 결코 장담하기 힘들다. 지난 1994년과 2003년 각각 개봉한 3D 애니메이션 ‘블루시걸’과 ‘원더풀데이즈’처럼 거대한 자본이 투입된 작품들도 흥행에 참패한 마당에 30년 전 캐릭터의 부활에 의구심을 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3D라는 새로운 형식이 과거의 추억을 훼손하지 않겠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세월은 흘러 태권V를 향유한 세대는 어느덧 중년이 됐다. 태권V를 보며 공학자가 되겠다던 아이는 이제 진짜 로봇을 만들고, 한 장면 한 장면에 감동했던 또 다른 아이는 인정받는 애니메이터로 성장했다. 부모 세대의 추억 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태권V가 과연 요즘 아이들에게 어떻게 ‘먹힐지’ 모르지만, 결과야 어쨌건 새로 선보일 태권V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하루속히 보길 기대하는 이들은 많다. 비록 ‘토’를 달지언정 그래도 역시 태권V는 우리의 영웅이 아닌가?
태권V의 그때 그시절
1976년 처음 선보인 태권V는 사람들의 추억 뿐 아니라 한국 사회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만화영화, 만화책, 포스터, 딱지, 미니어처, 공책, 심지어는 칫솔과 숟가락에 이르기까지 태권V의 ‘영향력’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 태권V의 흔적이 남아있는 대표적 명소는 부천의 한국만화박물관 서울 혜화동에 있는 로봇박물관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춘천 애니메이션센터와 서울 애니메이션센터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 인사동에 자리잡은 ‘토토의 오래된 물건’도 여러 볼거리를 제공한다. 종종 열리는 로봇 관련 전시회에서도 태권V는 역시 단골손님. 태권V 관련 용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남상우씨가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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