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V의 아버지 김청기 감독(64)을 만나러 가는 길 내내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 찼다. 30대 중반, 그것도 학부형이 될 나이에 ‘만화영화’ 감독을 만난다는 이유로 이렇게 떨다니 말이나 될 일인가? 하지만 은막 위로 흐르는 ‘김청기’라는 이름 석 자만 보고도 숨 막히던 유년기를 보낸 이라면 사정은 조금 다르다. 부천시 한복판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노(老) 감독은 영락없는 현역이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열정은 젊은 감독 저리 가라다.
김 감독이 거대로봇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만화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은 국내 장편 만화영화가 침체의 늪을 떠돌던 1970년대 초였다. 국내에서 제작되는 장편만화영화는 거의 전무 하다시피 했고 일본에서 들어온 아톰에 이어 마징가가 아이들 사이에서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만화를 그리다 만화영화 쪽으로 방향 전환한 그는 “폭력이 난무하던 일본 만화에 아이들 정서가 흐려지는 현실이 무척 안타까웠다”고 한다.
마징가의 대항마(對抗馬)로서 거대로봇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방흥행사들은 마징가의 흥행에만 주목해 다른 시나리오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당시 분위기를 반영한 측면도 결코 없지 않다. 어떻게든 영화 제작비를 받아야 했던 김 감독도 투자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시나리오 표지에 마징가 그림을 그려 넣는 고육지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훗날 태권V가 표절 논란에 종종 휩싸인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형 거대로봇을 그리다 보니 비슷한 점이 점점 많아졌어. 대신 우리 캐릭터에 고유 무예인 태권도를 구사하게 하고 조선시대 무장의 투구를 씌우기로 했어. 당시 사무실이 세종로에 있었는데 그 앞에 서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모티브를 얻었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75년 여름 어느 날 그의 사무실엔 60명 남짓한 무리가 모였다. 아직 앳된 모습의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까지 패기 하나로 뭉친 이들이었다. 영화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 보드의 완벽성을 높이기 위해 들인 시간만 6개월이 넘었다.
“욕심을 부리다 보니 러닝타임이 1시28분이 되더라고. 당시 극장용 만화영화의 평균 상연시간이 1시간 10분이었으니까 분량이 상당히 늘었지.”
김 감독은 태권V 동작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한 묘안을 짜냈다. 실제 태권도 겨루기를 찍은 화면 위에 셀로판지를 갖다 대고 하나하나 모습을 따라 그리기로 한 것. 모션캡쳐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불리는 태권V의 힘찬 발차기와 훈이와 리처드 쇼의 겨루기 장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실제로 태권도를 구사하는 로봇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후폭풍은 상당했다. 관객동원에서도 그렇고 그후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예상밖이었다.
“태권V가 과학기술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분명해. 하지만 기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자칫 우리를 맹신과 우울증에 빠뜨릴 수도 있어. 로봇이 주인공인 만화영화지만 사람 냄새를 풍기게 하고 싶었어. 능력 있고 예쁘지만 결국 기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메리를 통해 인간 존엄성을, 왕따 과학자인 카프 박사를 통해 차별 받는 이의 고뇌를 보여주고 싶었지.”
악은 물리치되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는 어린 시절부터 김 감독의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그 뒤로도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적 휴머니즘의 추구는 그에게 중요한 화두로 남아있다.
요즘 감독은 새로 제작될 대형 애니메이션 광개토대왕 제작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새로 제작될 태권V 시리즈에 어느 정도까지 참여할 지 아직 결정된 것은 없지만 그가 후배들에겐 든든한 후견인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잠시 디지털로 복원한 태권V를 상영한 적이 있었어. 어린 시절 태권V를 보고 자란 세대가 이제는 부모가 돼 아이들 손을 잡고 왔더라고. 아이와 부모 모두 정말 좋아하는 표정을 보면서 언제까지나 가족이 함께 보고 즐길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졌으면 하는 생각을 해봤어.”
태권V시리즈 외에도 우뢰매 시리즈 등 굵직한 SF물을 제작해온 김 감독은 요즘도 과학잡지에서 작품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구한다고 말한다. 미래 기술의 보랏빛 청사진을 그리는 과학 기사와 자연과학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노 감독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재미 추구라는 어려운 과제를 30년 넘게 몸으로 소화해온 노 감독에게 ‘거장’이라는 호칭은 결코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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