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작은 1956년 개국한 HLKZ TV 방송국의 미술 담당 문달부 씨가 만든 치약 CF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967년 신동헌 화백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대한극장에서 흥행하면서 한국 애니메이션은 중흥기가 시작되는 듯 했으나, 1970년대 TV가 안방에 들어오면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극장용 장편 중심이었던 한국 애니메이션은 ‘흥행실패→투자위축→제작중단’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로봇
그러던 중 국내 장편 애니메이션의 4년 공백을 깨고 등장한 것이 ‘로보트 태권V’였다. 폭발적인 흥행과 인기몰이로 사회적 관심이 태권V로 향하였고, 당시 태권V가 일으킨 반향은 지금도 한국 애니메이션의 향방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키워드로 읽힌다. 얼마전 ‘필름2.0’의 한국인이 사랑하는 로봇 20선 조사에서 태권V는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아기공룡 둘리’와 ‘로보트 태권V’가 선정된 것은 많은 이들이 태권V를 한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정계에서 태권V 캐릭터를 패러디하고, 언론사는 물론 각종 광고에서도 태권V가 문화적 자존심과 자부심의 대표적인 캐릭터 또는 지켜야 하는 상징으로 쓰인다. 태권V가 이렇듯 다양한 매체에서 오랫동안 문화적, 상징적 아이템으로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연 태권V가 우리에게, 한국인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태권V가 영향을 받은 작품은 분명 일본의 ‘마징가Z’이다. 잠시 마징가Z의 탄생을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당시 국가 전체가 침체 분위기였고, 패배의식을 불식시킬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 중 하나가 애니메이션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제2차 대전후, 미국 애니메이션을 좇는 데서 출발했다.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는 폐허가 된 일본인에게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 디즈니에 사로잡혔던 아이들이 성장하여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디즈니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데즈카 오사무가 1963년 ‘철완 아톰’을 만들어 방영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TV애니메이션 시대로 접어든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패망 이후의 일본 역사와 명맥을 같이 하고 있어, 일본 문화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1972년 방영된 마징가Z는 SF 거대로봇 애니메이션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마징가Z의 탄생은 당시 일본의 중공업과 자동차 산업의 발전이라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있다. 즉 거대한 것에 대한 찬미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로봇 20선에서 마징가가 2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마징가Z의 의의는 ‘인간이 탑승하여 직접 조종하는 최초의 로봇’이라는 점이다. 원작자인 나가이 고가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이 설정은 처음에는 오토바이로 탑승하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비행체가 두뇌부에 합체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거대로봇을 원격조종 한다든가 평범한 인간이 로봇을 조종한다는 설정은 일반 대중에게 큰 흥미를 끌었다. 이런 방식은 지금까지 모든 인간형 거대로봇 조종의 효시가 된다.
이러한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작품이 태권V이다. 일부에서는 마징가Z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으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만큼 한국 애니메이션에 무관심했고 그간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자료가 전무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최고 수준의 애니메이션
태권V는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1976년 7월 처음 선보였던 로보트 태권V는 서울 관객만 18만명(76년 당시 한국영화 역대흥행 순위 2위)을 동원하며, 흥행 기록을 세운다. 당시 수많은 아이들이 마징가Z에 흠뻑 빠졌을 때, 김청기 감독은 어린이들이 한국인이 만든 로봇에 열광하는 것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태권V를 구상한다.
마징가Z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김청기 감독은 세계 최초의 무술격투용 로봇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또 일본보다 뛰어난 작화 실력을 보여주어 TV판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고품질의 작품으로 선보였다. 일본 작품 대부분은 국내 하청으로 제작된 것이라 기술력만큼은 우리가 미국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린이들에게 태권V의 등장은 한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태권V의 태권도 장면은 심혈을 기울여 제작되었는데, 태권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주인공 훈과 상대 선수의 대결 장면에서는 당시 최고의 기술이었던 로토스코프 기법이 선보였다. 태권 사범들의 실제 시합을 카메라에 담아낸 다음, 단일 프레임마다 그림을 그려내는 고도의 기술이었다.
이는 많은 어린이에게 태권도를 확실하게 홍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태권도를 국가 무술로 지정한 터였다. 당시 학교의 태권도 교육과 맞물려 태권V와 태권도의 인기는 엄청났다. 우리나라에는 태권V가 있고, 태권V는 태권도를 할 수 있으며, 태권도는 우리의 국기(國技)이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태권도를 할 수 있다는 일종의 공감대가 자존심과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극적 구성에서도 마징가Z는 선과 악의 단순 대립 구도인 반면에 태권V의 설정은 인간애에 바탕을 두었다. 무조건적인 선과 악의 대립에서 벗어나 한발 더 앞선 구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임에도 국내 창작 시나리오의 높은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로보트 태권V는 마징가를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창작을 통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했다.
로보트 태권V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 앨범이 한국 최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태권V 앨범은 특이하게도 라디오 드라마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권V OST는 최창권 선생이 맡고 있었는데, 당시 김청기 사단의 김벌래 선생이 참여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모든 테마곡은 고유의 음색과 음율을 갖춘 독창적인 곡이 됐다. 아쟁과 징을 비롯해 최대한 한국 고유의 악기에서 얻어낸 음악은 일본과 미국은 물론 어느 나라 작품에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태권V를 고유한 문화적 자존심의 작품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메커니즘 형식에서는 영향을 받았지만, 작품 속에 담겨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고유의 정서와 선율이었다.
태권V 시리즈는 각 학교의 방학과 맞물려 개봉되었다. 작품 개봉 시기와 사회적 관심 측면이 작품에서 서로 연관성을 지니게 되었다. 태권V가 탄생한 1976년 즈음에는 한국 산업이 자립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1970년대 경제활동의 근간이 된 제 3,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1981)의 목표는 중화학공업 추진이었다. 마징가Z 탄생의 배경과 비슷한 중공업 발전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태권V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지상학 작가는 사회적 관심과 맞물리는 이야기를 작품에 잘 반영했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며 한국석유공사가 설립되고, 혹시라도 해저에 매장되어 있을지 모를 석유와 해양자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당시 해저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해저기지가 건설되며 이를 보호하는 로보트 태권V가 나오는 시리즈 제3탄 ‘수중특공대’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로보트 태권V’는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를 함께 한 작품임과 동시에 산업 발전 배경과 문화적 아이템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미래의 한류를 이끈다
그 시기에 태권V를 보고 자란 세대가 지금의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는 대표 세대라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어린이들은 태권V를 보며 무도인으로, 상상력을 작품으로 선보이는 애니메이터로, 로봇을 실제로 만들고자 하는 과학자로 성장했다.
다만 영화가 꾸준히 이어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여러 차례 끊기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로봇왕국 일본이 자랑하는 첨단 로봇기술의 근원이 만화 아톰에 뿌리를 두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징가와 건담, 에반겔리온으로 이어진 로봇 애니메이션의 계보는 일본인들의 과학적 감수성을 끊임없이 자극했고 일본 과학계에 지금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이 미국을 따돌리고 로봇왕국이 된 것도 일본인들의 이러한 상상력을 빼고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어릴 적 로봇만화에 심취한 이들이 자신의 꿈을 스스로 키운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전자산업과 IT 인프라에서 최고임에도 불구하고 차세대 로봇개발에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청소로봇, 안내로봇, 이족보행로봇 등 뻔한 아이템을 제외하면 도무지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로봇 업계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우리나라는 차세대 로봇산업을 키우는데 필요한 물적 기반은 골고루 갖추고 있다. 지금 한국 로봇산업의 가장 큰 취약점은 돈이나 기술력보다는 멋진 로봇세상을 만들겠다는 꿈과 열정이 뒤쳐진다는 점이다.
2005년 9월 30일 매우 이색적인 ‘로봇 전문가’ 회의가 열렸다. 만화가와 심리학 박사, 경영컨설턴트, 신문기자, 방송 PD, 교육 전문가 등 로봇 분야와 상관없는 ‘비전문가’들이 모여 차세대 로봇을 이용한 서비스시장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호서대 심상민 교수는 이날 국민적 관심을 끄는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것도 대중적인 로봇문화를 활성화하는데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도 태권V라는 대중적 로봇 콘텐츠가 있습니다. 최근 국산 게임,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주목할 로봇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데 이를 로봇산업과 체계적으로 연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는 한 나라가 보유한 로봇 콘텐츠의 상상력과 스토리가 21세기 로봇산업의 중요한 경쟁요소라고 강조했다. “로봇캐릭터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향후 한국산 로봇이 대장금처럼 주요한 한류상품이 될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요.”
태권V는 수십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되묻고 있다. 희망과 상상의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미래는 꿈을 품는 데에서 나온다. 태권V는 다시 부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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