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의 모태가 되는 그리스문명을 꽃피웠던 곳이지만 그 후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감수해야만 했다.
"한방울의 비로 여름은 죽어버리고…" 197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리스의 대표적인 시인 아힐레프스 엘리티스의 시구절이다. 그렇다. 시인의 말대로 그리스에서는 여름에 비가 오지 않는다.
5월부터 9월까지 지중해의 하늘은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보다도 더 푸르고 구름 한점없이 밝다. 대기가 온통 투명하다. 수평선 저 멀리까지, 계곡아래 깊숙이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발가벗은 듯, 제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다.
인적없는 백사장
태양은 사자 냄새가 날 정도로 뜨겁게 타오르고, 하얀 집 벽 위에 반사된 햇빛은 눈부시게 빛난다. 한 여름 오후면 사람들은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서 시에스터(낮잠)를 즐기고, 세상은 온통 정적 속에 잠긴다. 비가 오지 않기에 풀들은 말라 죽어버리고 들판은 온통 누런 빛을 띤다. 다만 부자들의 정원에는 스프링 쿨러(살수기) 덕분에 오아시스처럼 시원한 푸른 빛이 남아 있다.
쪽빛보다 더 파란 하늘 아래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 신전, 누렇게 말라버린 관목더미들의 황량한 대지, 마치 굳어버린 것처럼 한 줄의 물결도 없는 고요한 바다, 정적만이 감도는 인적없는 백사장, 이런 것들이 그리스의 여름을 특징짓는다.
비없는 여름
그러나 날씨가 궂어지고 첫 비가 내리면, 정말 갑작스럽다 할 정도로 여름은 끝나 버린다. 아니 끝난다기보다 갑작스레 죽어 버린다는 말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비가 내리면 벌써 가을이 시작된 것이다.
나뭇잎들은 떨어지고 대지는 푸른 빛을 되찾는다. 비는 점점 더 자주 내리고 짖궂은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날이 더 많아져 간다. 습기가 구석구석으로 스며 들고 끝내 사람들의 뼈 속에까지 파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우울한 잿빛으로 물들고 어디에나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계절이 다가온다.
이처럼 그리스의 여름은 남쪽 사막기후의 영향으로 고온과습(高溫寡濕)하고 겨울은 북쪽 서양대륙성기후의 영향으로 저온다습(低温多濕)한 날씨를 나타낸다. 이처럼 그리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주는 나라다. 여름에는 때때로 리비아사막으로부터 40℃가 넘는 살인적 열풍 '리바스'가 불어온다. 그러면 관상대는 전국에 열풍경보를 내는데 노인과 병약자는 덧문을 꼭꼭 잠그고 집에서 이 바람을 피한다.
1년 중 가장 추운 달인 1월, 아테네의 평균기온은 10℃ 안팎을 오르내린다. 어쩌다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게 되면 신문엔 '강추위 엄습'이란 제목이 대문짝만한 글씨로 보도된다. 그 정도 추위를 가지고 무슨 호들갑을 그리 떠느냐고 흉볼지 모르겠지만 난방시설이 미비한 그리스에선 10℃만 되어도 습기때문에 추위는 결코 만만치 않다.
영욕으로 점철되고
현재 그리스는 지중해의 동쪽 구석에 있는 발칸반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약 13만㎢(남한의 약 한배 반), 약 9백50만명의 인구를 가진 조그만 나라다. 그러나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요람지로서, 모든 서양 사람들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그리스 로마신화의 근원지인 동시에 B.C. 5세기에는 당시의 최강국 페르시아를 맞아 용감히 싸워 이기기도 했다. 또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국이기도 하다. 또 알렉산더대왕 시절에는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세계를 정복했던 민족이었다. 그 긍지는 오늘날의 그리스인에게도 강하게 남아 있다.
서양에서 기독교가 제일 먼저 전파돼 자리 잡은 나라로 아직도 국민의 95%가 그리스정교회를 믿고 있다. 중세 때에는 동로마제국의 후신인 비잔틴제국을 다스린 민족이기도 하다. 비잔틴제국은 오랫동안 이슬람세계와 접촉하면서 아직은 취약했던 서유럽을 이들의 침입으로부터 막았다. 7세기 이후에 북으로부터 밀려온 야만족 슬라브인을 기독교도로 개종케 하는데 성공했다. 오늘날 서구와 동구로 나누어지는 유럽의 문화적 경계선은 그때 이미 그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C의 빈국
그러나 비잔틴제국은 9세기를 고비로 약화되기 시작, 1204년에는 십자군의 침입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역사상 처음으로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후 제국은 거의 명목만 유지하는 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방의 영웅 칭기즈칸의 침입(13세기)으로 말미암아 이슬람세계 역시 지리멸렬하게 되면서 꺼져가던 비잔틴제국의 수명은 잠시 연장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잔인무도한 정복자 티무르마저 죽자 동방의 새로운 맹주가 된 오스만투르크는 명목만 유지하던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1453년에 점령, 1천년의 긴 역사를 가진 제국은 종말을 맞게 된다.
그 이후 1821년 터키족의 지배에 대항해 용감하게 독립전쟁을 선포할 때까지 그리스는 오스만투르크의 변방으로 전락, 세계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1831년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은 현대 그리스는 독일 바바리아지방의 귀족을 왕으로 맞아들여 왕국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후에도 낙후된 농업국으로 남게 되었고 국내 정치는 항상 불안했다. 독재와 이에 대한 항거, 터키를 비롯한 이웃나라들과의 끊임없는 전쟁, 한때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던 발칸반도의 살얼음판 균형과 열강들의 이해충돌 등으로 좀처럼 옛날의 영광을 찾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1967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군사독재를 현명하게 극복하고 이제는 유럽의 모범민주국가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리스는 1981년 EC(유럽공동체)의 열번째 회원국이 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아직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이웃으로 남아 있다. 현재 국민소득은 4천5백달러 정도로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이다. 또 그리스는 6.25 참전국으로 우리나라와는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있다.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아테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에 세워졌다. 간단히 말해 아테네는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신전을 중심으로 현대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고대와 현대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도시다. 이 도시에서 이방인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무래도 파란 하늘 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파르테논신전일 것이다. B. C. 5세기에 페르시아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만든 이 신전은 인간의 시각적 착각을 이용, 가장 완벽한 아름다음을 선사하고 있다.
우선 이 신전의 기둥들은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쪽을 향해 약간 기울어져 있다. 놀랍게도 이 기둥들은 하늘 위 17km 지점에서 한 정점으로 수렴되는 피라미드구조를 갖고 있다 한다. 또 각 기둥의 사이도 일정하지 않고 조금씩 차이가 나며, 기저부분도 그 중심부분이 약 30cm 정도 불룩하게 솟아 있다.
한마디로 이 건물에는 직선이란 하나도 없다. 이렇게 고의적으로 건물의 각 부분에 변화를 줌으로써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지혜가 새삼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