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릴랜드대 물리학과 서은숙(44) 교수를 만나기로 한 것은 지난 9월 28일 오전 10시. 약속 장소인 서 교수 연구실에 갔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조금 기다리자 한국인 조교가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서 교수는 미국 학자들과 세미나 중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인사를 보내자 그는 세미나를 멈추고 나왔다. 서 교수 연구실에서 자리를 잡자 전화가 끊이지 않고 비서가 계속 들락거렸다. 본격적인 인터뷰는 11시 가까이에 시작됐다.
“그래도 지금이 가장 한가할 때에요. 8월 말에 새로 업그레이드한 장비를 남극에 보냈거든요. 그때 왔으면 만나기 힘들었을 거에요. 11월에는 남극에 가야 하고요.”
“우주가속기와 놀고 있다”
현재 서 교수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지원하는 일명 ‘크림(CREAM)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다. CREAM(Cosmic Ray Energetic And Mass)이란 우주에서 날아오는 입자, 즉 우주선(cosmic ray)의 에너지와 성분을 의미한다. NASA가 10년 내 풀어내고자 하는 10대 과제 중 하나로 선정해 2000년부터 5년간 총 1천만달러(약 100억원)를 지원하고 있는 거대 프로젝트다. 서 교수는 미국(메릴랜드대, 시카고대, 펜실베이니아대, 오하이오주립대 등), 이탈리아(시에나대) 그리고 한국(이화여대, 경북대, 한국과학기술원 등) 3개국의 연구원 50여명을 이끌며 이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그는 우주선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차세대 리더로 손꼽히고 있다.
NASA나 우주입자 같은 용어를 들으면 당장 떠오르는 장면은 우주에 떠다니는 비행선이나 지상에 설치된 천체망원경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서 교수의 프로젝트는 색다르다. 우주비행선 대신 대형 풍선(벌룬)을 띄워 올린다. 주요 공략지점은 우주와 지상의 경계지인 지상 40km의 성층권.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고도보다 4배 높은 곳이다. 우주 연구에 풍선을 쓴다고 하면 어쩐지 첨단 과학과 멀게 느껴지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보통 풍선이 아니죠.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안해낸 첨단 우주입자 검출장비가 실려 있거든요.”
사실 지구는 우주에서 발생한 수많은 고에너지 입자에게 ‘두들겨 맞고’있다. 물론 대부분 지구 대기층에 흡수돼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이들 입자가 높은 에너지를 가졌다는 점만 밝혀져 있었다. 풍선은 바로 이 입자들에게 직접 두들겨 맞기 위해 띄운다. 우주입자가 대기층에 흡수되기 직전 성층권 상공에서 검출장비를 이용해 입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이 우주입자의 에너지는 1012~1015eV(전자볼트). 이런 입자 하나가 몸에 맞는다면 어떨까. 정확히 비유하기 어렵지만 박찬호 선수가 던진 야구공에 맞을 때의 충격 정도라고 한다. 우주입자의 정체를 알아내면 ‘빅뱅 가설’에 따라 137억년 전 우주가 대폭발(빅뱅)을 일으킨 후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돼 왔는지 밝힐 수 있다. 사실 과학자들은 이 작업을 ‘지상에서’ 실현시켜 왔다. 바로 입자가속기다.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FermiLab)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대표 사례다.
“문제는 가속기에서 발생하는 입자의 에너지가 1012eV 이하라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천연입자’는 이보다 에너지가 훨씬 커요. 우리가 얻는 데이터와 지상의 입자가속기 데이터를 합하면 우주의 근원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서 교수는 자신이 하는 일을 ‘우주가속기와 노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우주 어디선가에서 입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돼 오는 것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빅뱅 가설 입증하는 반물질 탐색
현재까지 우주입자의 기원에 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은 ‘초신성 폭발’이다. 태양보다 큰 별이 연료가 모두 타 죽을 때 갑자기 수억배나 밝아지면서 폭발하는 현상으로, 이때 주변에 생긴 강력한 자기장에 의해 입자들이 가속되면서 수만광년 이상 떨어진 지구에 도달한다.
“초신성이 폭발했을 때 지구에 도달하는 입자는 사실 여러모로 변질돼 있어요. 예를 들어 탄소는 다양한 성간물질과 부딪치면서 붕괴돼 붕소로 변해요. 따라서 붕소와 탄소의 비율을 측정하면 얼마나 멀리서 어떤 경로를 거쳐 지구까지 왔는지 대략 추정할 수 있죠.”
우주입자를 잘 관찰하면 ‘빅뱅 가설’이 옳다는 점을 증명할 수도 있다. 태초에 대폭발이 있었다면 우주에는 물질과 반물질(물질과 부호만 반대)이 동일한 양으로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음의 부호를 띤 양성자, 양의 부호를 띤 전자 등이 존재해야 한다. 서 교수팀이 반물질을 발견한다면 천체물리학계에 획기적인 업적을 쌓는 셈이다. 서 교수는 2000년 크림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입자검출장비 개발에 매달려 왔다. 입자의 성분과 에너지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고감도 센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여기에 한국 과학자들이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먼저 검출방비를 통과하는 전하량을 측정해 입자의 성분을 알아내는 부품 4개 가운데 하나가 한국 이화여대 연구팀을 주축으로 개발됐다. 서 교수는 “미국 시카고대 등에서 나머지 3개 부품을 만들어냈지만 한국산의 성능이 가장 뛰어나다”고 말했다. 과학기술부와 NASA로부터 총 5억원의 지원을 받아 2년간 연구한 결실이었다.
입자가 얼마나 큰 에너지를 가졌는지 알아내는 장치는 칼로리미터(calorimeter)다. 우주입자는 지구 40km 상공에 도달한 후 대기층을 통과하면서 무수하게 분열되며 에너지를 잃어간다. 이 과정이 마치 욕실의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 같다고 해서 ‘에너지 샤워’라고 부른다.
지상에서는 에너지 샤워의 마지막 ‘파편’을 통해 입자의 원래 에너지를 역추적해내기도 한다. 칼로리미터는 바로 이 과정을 축소해낸 장비다. 10cm 두께의 텅스텐 20여장을 장착해 우주입자가 40km 대기층을 통과할 때와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우주입자가 깨지면서 발생하는 빛 에너지의 1%를 얻어 계산하면 입자의 원래 에너지를 추정할 수 있다. 현재 메릴랜드대에서 활동 중인 이무현 박사가 칼로리미터 개발의 주인공이다.
세계 최장 비행기록 세워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4년째. 서 교수가 근무하는 물리학과 건물 1층 실험실에서 마침내 검출장비 개발이 완료됐다. 지난해 말 이 장비는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장소는 남극. 입자검출장비는 헬륨가스가 가득 찬 거대 풍선에 매달려 하늘로 떠올랐다. 풍선 제작 책임은 NASA가 맡았다.
2004년 12월 16일 오후 1시 30분(한국시간) 남극의 미국 맥머도 기지에서 한국인 10여명이 포함된 과학자들이 거대한 풍선에 헬륨가스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곧 태양전지 날개를 단 직육면체의 검출장비를 가뿐히 끌어올리며 지름 20m의 풍선이 하늘로 떠올랐다. 전체 길이는 무려 80m에 이르렀다.
놀랍게도 이 풍선은 42일 상공체류라는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NASA가 띄워 올린 풍선(${10}^{12}$eV 이하의 에너지를 가진 입자를 찾는 게 목적) 가운데 가장 오래 머문 것이다. 2001년에 31일간 비행한 것이 이전까지의 최고기록.
“오래 비행할수록 더 많은 데이터를 얻을 수 있어요. 덕분에 무려 4천만개에 달하는 우주입자 데이터를 확보했어요. 1년 후면 이 데이터를 분석한 주요 결과가 나올 거에요.”
얼핏 생각하면 풍선을 오래 띄우는 게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여기에도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먼저 과학자들은 풍선을 매년 12월 남극에서 떠올린다. 하루 종일 해가 떠있고 강추위가 없는 여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12월 초부터 1월 말까지 남극 상공에서 원형으로 회전하는 기류가 발생한다. 이 기류를 타야 풍선이 엉뚱한 곳에 가지 않고 안정되게 비행할 수 있다.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여름이 시작되는 10월에 남극으로 출발했다. 검출장비 부품들을 운송해 12월까지 2개월간 조립하고 잘 작동하는지 테스트했다. 하지만 이 작업이 생각대로 잘 이뤄지지 않아 상공에 회전 기류가 발생했다 해도 제때 띄워 올리기 어려웠다.
서 교수팀은 모든 테스트를 완벽하게 마친 후 부품을 남극에 보내는 전략을 세웠다. 덕분에 11월경 남극에 도착해 불과 2주 내에 준비를 끝내고 적시에 풍선을 띄워 올릴 수 있었다.
“사실 무척 번거로운 작업이에요. 하지만 가장 신속하고 경제적인 방법이기도 해요. NASA가 풍선을 매년 열심히 띄워 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벌룬을 하나 띄우는데 드는 비용은 인공위성에 비해 10분의 1 수준인 수천만 달러. 또 초신성 폭발이 관찰되면 불과 3개월 내에 출동할 수 있다. 초신성 관찰용 인공위성을 띄우려면 족히 5년은 걸린다.
서 교수팀은 지난 8월 센서 기능을 대폭 개선한 새로운 검출장비를 남극으로 출발시켰다. 올해 12월이면 또 한번 남극에서 풍선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어떤 기록을 세울 수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원래 NASA는 비행기간이 100일에 달하는 초대형 ‘울트라 벌룬’을 제작해 지난해 말 우리 검출장비를 띄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개발이 완료되지 않았어요. 울트라 벌룬만 있으면 더 많은 우주입자를 확보할 수 있을텐데….”
1783년 프랑스 몽골피에 형제가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에 최초의 열기구를 띄운 지 222년. 이제 과학자들은 헬륨가스를 가득 채운 풍선을 하늘 끝까지 올려 보내 우주의 비밀을 캐내고 있다. 그 가장 앞선 곳에 서 있는 서 교수의 활약을 세계 천체물리학계는 커다란 기대감으로 바라보고 있다.
풍선 띄워 우주입자 정체 밝힌다 - 서은숙
서 교수는 1997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신진 우수연구자 대통령상’을 수상해 5년간 10만달러(약 1억원)를 지원받았다. 당시 이 소식이 언론에 잠시 소개됐을 뿐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다.
하지만 미국 관련 학계에서는 ‘전설의 인물’로 통한다. 1991년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메릴랜드대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1995년 2월부터 2004년 8월까지 직함이 ‘리서치 사이언티스트’(Research Scientist)였다. 리서치 사이언티스트는 지도교수가 이끄는 실험실에서 연구에만 전념하는 ‘직업 연구자’이다.
그러나 서 교수는 1991년부터 지도교수의 일을 돕는 것뿐 아니라 독자적인 실험계획을 세우고 프로젝트를 수행해 나갔다. 교수가 아닌 신분이었지만 그의 비전과 능력을 보고 유능한 연구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 교수는 이 과정을 “돈 한 푼 없이 시작해 기업을 세워내는 격이었다”고 표현했다.
2004년 NASA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트하려 하자 그해 8월 메릴랜드대는 그에게 ‘종신 교수’ 직을 제의하며 떠나지 말 것을 부탁했다. 리서치 사이언티스트가 강의 경력 하나 없이 갑자기 종신 교수로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일.
서 교수는 고려대 물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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