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03. 빠른 비트에 몸을 맡겨라

컴퓨터의 변신은 무죄

1971년 인텔이 최초로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를 개발했을 때 여기에는 2300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있었다. 2000년 개발된 펜티엄4에는 약 4000만개가 들어있었다. 집적도가 무려 1만7000배가량 늘었다. 트랜지스터의 집적도가 2년에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을 적용하면 거의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연산단위는 1971년 4비트에서 2000년 32비트로 8배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연산단위에 무어의 법칙을 적용하면 2000년에는 연산단위가 무려 216비트로 늘었어야 한다. 집적도 증가에 비하면 연산단위는 제자리걸음한 것. 왜 그럴까?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컴퓨터에서 일어나는 모든 연산과 처리를 담당하는 반도체 칩이다. 인간으로 따지면 두뇌에 해당한다. 1971년 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가 32비트로 발전하는데는 10년 정도 걸렸다. 하지만 그 후 지금까지 20년간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연산 단위는 32비트에 머무르고 있다. 비트는 컴퓨터가 외부 정보를 0과 1로 바꿔서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단위를 나타낸다. 4비트에서 8비트가 된 것은 4차선 고속도로가 32차선이 된 격이다. 한꺼번에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8배 늘어난 것.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컴퓨터의 두뇌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크기는 작아졌지만 직접도는 늘어난 덕분에 컴퓨터는 작아도 속도는 빨라졌다.


빨라진 건 트랜지스터 덕분

그런데 집적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동작 속도와 관계가 있다. 4004는 동작 주파수가 약 0.1MHz였던 반면 펜티엄4는 3GHz 이상 돼 3만배 가량 증가했다. 동작 주파수를 보면 무어의 법칙이 제대로 적용된 것이다. 메모리반도체는 트랜지스터를 많이 집적할수록 기억 용량이 늘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연산 단위는 기억과는 관계가 없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트랜지스터로 동작 속도를 높혔다.

요즘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얼마나 빠를까? FM 라디오의 최대 주파수는 108MHz다. 동작 주파수가 3GHz인 펜티엄4는 FM 주파수보다 30배 빠르고, 2GHz를 사용하는 전자레인지보다도 빠르다. 이 속도라면 1초에 열자리 십진수 덧셈을 30억번 할 수 있다. 빛의 속도로 환산하면 빛이 10cm 가는 동안 덧셈을 한번 하는 꼴. 반도체에서는 자유 공간보다 빛이 절반 정도로 속도가 느려지므로 반도체 위에서 빛이 5cm 가는 동안 덧셈을 한번 하는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작동한다. 최근에 집적도를 늘린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이보다 더 빨라졌다.

그런데 가끔 컴퓨터를 쓰다보면 분명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작동 주파수도 크고 메모리 용량도 큰데 프로그램이 빨리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메모리의 동작 속도 때문이다. 30년간 메모리의 용량은 엄청나게 커졌지만 메모리의 동작 속도는 겨우 몇 배 늘어났을 뿐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메모리에 있는 프로그램에서 하나씩 명령어를 가져와 수행한 뒤 결과 데이터를 다시 메모리에 저장하는 일을 반복한다.

이 때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메모리의 동작 속도는 상대적으로 일정하기 때문에 결국 프로그램은 메모리의 속도에 맞춰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캐쉬’(Cache)라는 아주 빠른 속도의 메모리를 내부에 갖고 있다. 캐쉬가 있으면 외부 메모리가 느리더라도 프로그램이 외부 메모리 속도에 큰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2000년 5월 중국 베이징에 문을 연 '인텔 박물관'. 한 어린이가 반도체 칩들로 만들어진 작품을 신기한 듯 만져보고 있다.


머리는 단순해지고 몸은 더 민첩해져

무어의 법칙을 따라 메모리 용량이 급격히 증가한 덕분에 마이크로프로세서도 덩달아 발전했다. 초기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아주 복잡한 명령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구조도 매우 복잡했다. 메모리가 비싸고 용량에도 제약이 심해 메모리에서 프로그램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프로세서에 복잡한 명령어를 넣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차츰 메모리 용량이 커지고 가격도 내리면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프로그램의 크기보다 동작 속도가 중요해졌다. 게다가 C언어처럼 상위 수준의 언어를 사용한 프로그래밍이 대중화됐다.

1980년에는 상위 수준 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이 컴파일러를 통해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수행할 수 있는 하위 수준 프로그램으로 변환됐는데, 컴파일러를 통해 변환된 프로그램이 아주 간단한 명령어를 주로 사용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간단한 명령어만을 지원하다보니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구조도 훨씬 간단해졌고 이로 인해 동작 속도가 빨라졌을 뿐 아니라 반도체에서 차지하는 면적도 작아졌다. 남은 반도체 면적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동작 속도를 높이는 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파이프라인 같은 고속 기법을 활용하면 초스피드로 동작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도 만들 수 있다.

여기에 하나 이상의 명령어를 동시에 수행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구조도 개발돼 연산 속도가 동작 주파수의 수배나 되는 것까지 등장했다. 결국 반도체 메모리의 용량이 무어의 법칙을 충실히 따른 결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구조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초고속 마이크로프로세서도 등장할 수 있었다.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직접도 변화^마이크로프로세서는 무어의 법칙에 따라 약 2년에 2배씩 직접도를 늘렸다. 무어의 법칙이 발표된 1965년에는 트랜지스터가 65개였지만, 지난해 출시된 펜티엄4에는 1억2500만개가 들어있다.


멀티+64비트=울트라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 마이크로프로세서는 과거 30년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성능이 계속 좋아져 조만간 10GHz로 동작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도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동작 주파수가 무어의 법칙을 따라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차츰 물리적인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첨단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는 수십개의 원자 층으로 이뤄진 불과 수나노미터(nm)의 박막과, 머리카락을 1만개로 쪼갠 두께 정도의 아주 작은 패턴을 가공하는 기술을 사용한다. 가공이 가능한 박막의 두께와 패턴의 크기가 점차 물리적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무어의 법칙에 따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집적도가 증가할 수 있지만 결국 언젠가는 멈추게 될 것이다.

최근에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무어의 법칙과 무관하게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여러 개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하나의 반도체 칩에 집적할 수 있다. 현재는 대부분 반도체 칩 하나에 하나를 집적하는데 앞으로는 칩 하나에 여러 개를 집적하게 될 것이다. 최근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2개를 집적한 ‘듀얼 코어’를 선보이기도 했다.

연산 단위를 늘려 여러 개의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는 방법도 개발 중이다. 동영상이나 게임 같은 멀티미디어 연산에서는 현재 32비트보다 큰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도록 여러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는 구조가 유리하다.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6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이런 경우다. 서버 분야에는 이미 64비트, 128비트 또는 그 이상의 연산을 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사용되고 있지만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제 막 6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도입될 추세다.

이런 방법들을 통해 앞으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성능을 계속 향상시킨다면 무어의 법칙을 능가하는 새로운 성장 법칙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발전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슈퍼 울트라 하이퍼’ 초고속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등장할 수도 있다. 도처에 깔린 컴퓨터로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정보를 받을 수 있는 유비쿼터스 유토피아가 열릴 것이다. 진보는 계속 되는 것이니까.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무어의 법칙 지고, 황의 법칙 뜬다
01. 섬씽 디지털이 판치는 세상
02. 플래시 터뜨리는 황의 법칙
03. 빠른 비트에 몸을 맡겨라
04. 디지털의 화려한 플래시댄스
05. 기하급수의 세상에서 사는 법
06. 디지털 우주의 빅뱅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5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박인철 교수

🎓️ 진로 추천

  • 컴퓨터공학
  • 전자공학
  • 정보·통신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